사진으로, 그리고 텍스트와 함께 본 ‘무한회귀’로서의 이주노동

제7의 인간 – 8점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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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장르의 글을 쓰는나는 시각에 서툴다. 오히려 글의 리듬. 그리고 책을 잡았을 때 풍기는 책의 냄새에 익숙하다. 나는 후각과 청각에 예민한 편이다.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의 구체적인 양상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옷의 코디도,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둔하다. 그냥 예쁘다” “안 예쁘다” “멋있다” “안 멋있다정도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의 한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 강렬함을 느꼈을 때 그 인상은 그런대로 기억하는 편이다. 물론 그에 대해서 정교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내게 시각은 구체적인 감각이 아니라 직관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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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가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이 병치되어 있는 7의 인간을 읽으면서 받는 감각도 그러하다. 사진은 눈을 크게 뜨게 만들고 잠깐이나마 진행되고 있던 사유를 멈추게 만든다. 책을 읽는 것이 어려웠다. ‘문자를 텍스트로 읽다가, ‘사진을 읽을 때마다 자꾸만 의식의 흐름이 끊기고야 만다. 이어지다가 끊기고 또 이어지고 끊기고. 그렇기 때문에 일관된 서사로서 뭔가를 읽어내겠다는 근대적 책읽기는 자꾸만 헤매고 만다. 그래서 한 번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머리가 멍하고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공감empathy’을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읽었던 텍스트를 에버노트에 정리하고 그 텍스트들을 다시 읽고 책을 잡고 사진을 읽어보려 한다. 이것 역시 쉽지는 않다. 사진의 구체성은 여전히 포착되지 않고 직관적으로 텍스트와 이어보려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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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자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그들의 이 주요한 수단이었을 것이고, 문자가 발달하고서는 그들의 이 주요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매체의 역사는 다른 하나가 없어지면서 진행된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이 있을 때 다른 한 편 그림이 있었고 18세기 이후 사진이 등장했다. 시각적인 매체는 다른 종류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만들어 준다.


텍스트로서의 사진? 사진 역시 읽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이해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통해서 읽는행위를 잘 하지는 못한다. 서사의 일환으로써만 사진의 강렬함을 그와 연동하여 생각했을 분이다. 그 부분이 내게는 답답하다.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는 동선 안에서 잠시 멈춰가는 지점으로서만 사진이 읽힌다’. 마치 공지영의 소설을 읽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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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에 대한 이러저러한 매체들의 재현representation이 있다. 글을 통해서. 그리고 구술을 통해서. 연구자로서 나는 이러한 재현물들에 익숙하다. 거기에 인권영화제와 여성영화제를 통해서 영상물로 등장하는 그들의 이야기, 동시에 뉴스를 통해 재현되는 위험한 존재이자 순치되고 있는 존재로서의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에 익숙하다. 거기에는 다문화 사회의 전망이라는 텔로스를 향해 달려가는 재료로서의 그들의 모습이 있는 반면, 동시에 불법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재현되는 그들의 모습이 있으며, 동시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어떠한 해방의 기획 하에 있는 21세기 글로벌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그들의 모습이 있다. 그러한 재현들은 경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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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의 인간의 사진은 글로 드러나는 여정과 더불어, 그리고 때때로는 좀 더 과장되게 또는 느슨하게 그들의 일상과 거대 도시, 그리고 그들의 마을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비틀어 보여준다. 이주 노동자들은 전지구적인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에 의해서 추출되듯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유입되었다고 국제 정치경제학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설명은 그들의 의 맥락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저개발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강탈과 착취를 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인위적인 울혈 증상에 걸린 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저개발은 그냥 죽일 뿐만이 아니다. 그 치명적인 정체는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닮아 있다. 그 이민은 살고 싶어한다.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p.34).


 그들의 구체적인 삶들의 역동성은 그들의 정체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주 노동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 과정은 매끈하지 않다. 그들을 선동하는 조국도심의 풍문들이 거래되고 유통되고 그들에게 원심력을 작용한다. 또한 그러한 원심력들에 따라 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들의 기획과는 무관하게 여러 가지 외부의 힘들이 작동하게 된다. 평생 조우하기 힘들 것만 같은 국가와 직접적으로 마주쳐야 할 때가 있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이주가 불가능해진 그 순간에 그들은 브로커와 조우하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브로커와 조우하는 것은 사실 개인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강박감과 책임감,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는 부양의 의무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은 걸머져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몸 바꾸기를 체험하게 된다. 아니 강제 당한다. 육가공 공장에서 도축을 경험하게 되는 의 서사는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자신의 삶의 리듬과 상관없이 기계의 리듬에 맞춰서 최적화된 형태로 몸을 바꾸는 그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교환 관계로 모든 것을 살피게 된 통찰력이다. 그러한 통찰력을 갖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삶의 현재가 미래를 통해 유보되고, 과거 역시 노스탤지어로만 한정적인 시간에 소환될 수밖에 없는 그의 일 경험일 이후의 경험이 만들어낸 효과이다. 이러한 이주 노동의 체험에 대해서 감옥형기를 채우는 일이라고 묘사하는 존 버거의 서술과 이러한 형기채우기를 위해 동원되는 여러 가지 기제에 대한 장 모르의 사진은 읽고 보는 이를 숨죽이게 만든다. ‘섹스노스탤지어’, 그리고 지지리 궁상인 고향의 참상’. 그들의 현재는 지속적으로 부품으로 만들어지고, 그들의 머릿속의 모든 것은 임금으로 환산된다. 처음 그들이 겪는 일은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하고 자신의 임금과 계산을 해보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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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형기를 채우듯 마치고 돌아간 고향이 고향이 아니고, 그들의 이주 노동을 통해서 겪은 경험들 중 가장 내밀한 고통의 영역은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시한일 따위는 할 수가 없게 되고 다시금 역동성의 문제는 증폭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신체검사장으로 들어가 다시 이주 노동자가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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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돌아온 아들을 자랑하고, 아들은 무용담을 뿜어내고, 사촌 동생에게 대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계속 겪게 되는 경험세계의 탈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수형 생활은 끝났지만 그의 생환 서사는 아무 곳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존 버거와 장 모르는 그러한 서사의 소멸을 복원시킨다. 사진은 길게 떠들지 않지만, 옆에서 슬며시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고  증언한다. 그들은 어떻게 다시 신체검사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무한회귀로의 노동 서사는 사진과 글의 병치를 통해 우리에게 외친다.</p>

</span>그들을 다시금 이주를 떠나게 하는 압박은 국제 정치경제학의 맥락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내밀한 구체적 일과 일 바깥의 서사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그 내밀한 서사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들의 모습에 대한 사진의 묘사는 은연중에 내밀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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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진과 더불어 존 버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간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통찰력을 주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 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 봐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의 주관 속에 들어가느니 하는 얘기는 오해에 이를 여지가 있다. 남들의 주관이란 똑같은 외부적 사실들에 대해서 단순히 내부적인 태도만이 다른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중심부에 놓여져 있는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p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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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막으로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용도는 애초에 약간의 삽화가 있었지만 주되게는 의 매개체로서의 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자체는 에서 한 꺼풀 벗겨져 튀어나와 그 나름의 맥락의 세계를 만들었다. ‘문어체’, 그리고 학술적 글쓰기’. 그런데 여기에 사진이 뒤섞인 세계는 문자logos 중심의 헤게모니를 뒤흔들고 있고, 7의 인간역시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달리 생각해보면 한 가지의 매체 자체를 완전히 보지 않으면서 살아온 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찌 어찌 사진을 다루고 글과 조우하거나 계속 긴장 상태에 두면서 한 권의 책을 그리고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을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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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나 저나 번역어는 ‘영’ 맘에 안 든다. ‘이민노동자’라니!! (응?!) </s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