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삶 속에서 본 미국의 빈곤층 – 바바라 에렌라이히, 빈곤의 경제(2002)

빈곤의 경제 – 10점
바바라 에렌라이히 지음, 홍윤주 옮김/청림출판
2010/09/0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22] 하우스 푸어, 베이비붐 세대, 88만원 세대
2011/04/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아직도 ‘긍정의 힘’을 믿으시나요? – 『긍정의 배신』(바바라 에런라이크, 2011)
[#M_이론적인 이야기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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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술지를 통한 지식을 생산함에 있어서 ‘참여’와 ‘관찰’ 두 가지는 모순적이다. 참여하면서 관찰하고, 관찰을 하면서도 거리 간격은 좁혀졌다 다시 벌어졌다 하는 긴장상태를 놓을 수 없다. 사실 ‘참여관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말리노프스키 역시 그 긴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그의 ‘평이하고’ ‘공정한’ 문화기술지와 달리 그의 일기장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만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곤 한다(앨런 버나드,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2003). 그런데 최근의 경향을 보면 이러한 긴장은 ‘신기한’ 것을 찾아나갔던 ‘힘 있는 남성’ 인류학자들의 시기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느린’ 세계를 채집하듯이 사례 수집하며,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지식을 생산하던 초창기 참여관찰의 인류학자의 몸으로는 도무지 ‘현재’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세계의 속도가 빨라졌다. 더 이상 ‘미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개 사회’로 간주되는 모든 곳에 ‘서구 사회’의 각인이 새겨져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인류학자의 표본을 요구한다. 사실 굳이 그(녀)가 인류학자여야 하는지도 헷갈리는 상황이 되었다. 예전처럼 ‘귀족풍’의 위풍당당하고 뭔가 진취적으로 보이는 탐험가형 인류학자가 아니라, 지금은 잽싸게 잘 개입하고 잘 치고 빠지면서 동시에 맥락도 읽어낼 수 있는 그러한 저널리스트의 모습이 좀 더 그러한 표본에 근접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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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의 문제가 또 존재한다. 그건 아무래도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케이트 크리언, 『그람시 · 문화 · 인류학』, 2004)이 미친 영향이거나 아니면 영국의 ‘문화연구 그룹’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여성주의 인류학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연구자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예전처럼 ‘과학’을 한다는 식의 지적 태도를 보여줄 경우 곧 바로 질문이 쏟아진다. “누구의 과학인가?” “어디로부터의 과학인가?” 과학 주체의 문제, 그리고 지식-담론으로서의 과학의 계보학. 결국 중립은 풍자의 대상이 되었을 따름이다. Jeffrey S. Juris 같은 경우는 아예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떠나서 ‘전투적 문화기술지’를 작성하자고 말한다. 연구자와 활동가의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의 인류학의 본령이라고 주장한다(Jeffrey S. Juris, “Practicing Militant Ethnography with the Movement for Global Resistance in Barcelona”, 2007). 중립성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뛰어넘어 어떠한 ‘정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그 안과 바깥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동가이면서(참여), 동시에 연구자(관찰/참여)이기도 한 그러한 지식의 생산자에 대해 그는 질문한다. 칼 마르스크의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이 떠오른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활동가’로서 개입하는 ‘유기적 지식인’ 혹은 ‘연구자’로서의 지식 생산이 어떠한 결정에 대한 ‘정책 생산’만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집단행동과 과정에 대한 ‘성찰성’의 제공, ‘분석’의 제공, 그리고 집합적인 연구에 대한 성찰성의 제공이다. 이 지점은 ‘활동가’이면서 ‘연구자’인 지식인으로서의 긴장의 지점을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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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 Juris는 전투적 인류학을 위해 자신의 몸 자체도 구체적인 연구의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발상이 하버마스의 말마따나 ‘도구적 이성’을 활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몸에 각인되는 ‘정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탈구의 ‘현재성’을 끊임없이 놓치지 말고 성찰적 지식으로 생산하라는 말일 것이다. 기존의 인류학자로서의 감각과는 다른 지점이 여기에도 존재한다.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다이내믹하게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정치적 활동’과 연동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활동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활동을 하면서 만드는 지식’이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다. 연구자는 전통적으로 (좌우파 공히) 지식을 생산하고 활동가는 그러한 지식/담론/정책을 받아다가 활용하는 노동 분업을 수행했었으나 이러한 지식 생산에서는 그 기준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게다가 연구자는 공정 무쌍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늘 점검하기도 하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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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바바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Nickel and Dimed』를 읽었다. 에런라이크는 미국의 ‘워킹푸어’들의 일과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참여관찰’을 실행한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6~7$ 정도의 시급을 받고 일주일 내내 일하고, 한 주에 400불 정도의 숙소에서 생활을 한다. 의료보험 혜택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없고 노동조합이 없다. 한 번 사고가 터지거나 경조사가 터지면 이들의 생활리듬은 꼬이기 시작하고 대출 인생이 시작된다. 즉 크레딧 푸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p>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학제적으로 인류학자도 아니고, 그나마 조금 완화된 기준으로 봤을 때 사회학이나 문화연구와 연동된 지식인도 아니다. 그녀는 분과 학문적으로는 좀 먼 곳에 있는 ‘생물학자’이다.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아의 ‘분과학문’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녀의 생물학적 지식들이 ‘사회과학적 작업’과 매끈하게 연동된다. 다른 한 편 동시에 그녀는 정치적으로 좌파 지식인으로 지향 지어진 사람이며, 그것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연구를 위해 필요상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면 평소 그녀의 정향이 잘 드러난다. 그녀는 조사를 위해 자신이 아예 ‘빈곤층’으로 몸 바꾸기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기존의 범주로 구태여 분류하자면 ‘저널리스틱’한 작업이다. 최근 한국의 진보 매체들에서 ‘체험기’조로 만들어내는 지식들(『사천 원 인생』 등)과 그녀의 지식 만드는 방식은 대체로 합치된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기법인 ‘심층 취재’가 ‘경험’이라는 맥락과 결부되면 약간의 기술적 차이를 제외하면 인류학적으로 ‘참여관찰’한 지식이 된다. 사실 이 지점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많이 흐려지게 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이 책의 방법론으로 차용된다. 그런데 Juris의 관점을 따르자면 이러한 에런라이크의 『빈곤의 경제』에서의 지식 생산은 전통적 인류학에 더 가깝게 된다. Juris의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 하자면 그녀는 AFL-CIO 같은 미국의 노동조합의 노동운동 부문에서 싸우면서 썼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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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에런라이크는 이 책에서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쓰지는 않는다(다른 책에서는 그러한 방식의 저술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한 정치적 목표와 결부되어 있다. 당시의 메디 케어, 그리고 전반적인 ‘신경제’ 운용을 하던 미국 민주당 정부의 신자유주의에서의 ‘가난한 자’에 대한 ‘비난 서사’에 대한 전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 맡겨두면 스스로 업무에 대한 협동과 분담 시스템을 고안했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황에 대처할 줄 알았다. 실제로 복종을 강요하는 일 외에 관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p.253).
가장 일상적인 그(녀)들의 매일의 노동의 세계와 ‘모텔·컨테이너 박스’로 상징되는 그들의 생활세계는 정치화된다. 그리고 그 정치화는 앞서 언급한 거대한 ‘현실정치realpolitik’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책의 집필의 ‘목적’인 주체화와 ‘정치화’라는 목표는 실제로 그녀가 ‘워킹푸어들’과 조우했을 때에는 계속적으로 실패한다. 마지막 월마트에서 노동자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약간의 ‘저항’을 하는 것이 그녀가 얻어냈던 가장 큰 정치화의 결과였다. 이것은 마치 1970년대, 아직 집단적으로 ‘존재이전’을 결행하기 이전 한국의 학출 노동자들이 몇 년을 거쳐 ‘기껏’ 야유회 정도를 조직할 때의 ‘의식화’하기의 어려움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에런라이크는 가장 착취당하면서도 동시에 지배 질서에 대해서 어떠한 균열도 못 내고 ‘개인화’된 방식으로 그 모순들을 해결하는 방식을 이해하려 애쓴다. 에런라이크는 그에 대해서도 나름의 ‘합리성’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성찰적 지식’의 힘일 수 있다.
왜 테드의 칭찬 한마디가 그토록 중요할까? 내 생각에는, 내 동료들의 가난함-문제는 이거니까-은 만성적인 박탈감이 그 원인이다. 집주인들은 일이 잘 되었다고 우리에게 감사하는 일은 없고, 거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영웅으로 환호하는 것도 아니다. (……) 그리고 그 용감함 덕분에 그녀에게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사실도. 내가 열 개나 되는 방을 진공청소기로 밀고 나서 부엌 바닥까지 닦는 것을 보고, “세상에나, 바바라, 정말 훌륭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p.141).
이 ‘만성적인 박탈감’과 그에 대한 ‘사소한 보상기제’의 힘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연구자’와 ‘활동가’의 간극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위해 ‘워킹푸어’들의 삶의 맥락을 드러낸다. 영화 <식코>에서 왜 다들 그렇게 다치거나 어디가 아플 때 방치하는 지에 대해서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현장지식’이기 때문에 발견된다는 측면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들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개입’의 정치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개입’의 정치는 연구자와 활동가의 구분, 정치적 중립성 · 당파성의 구분, 그리고 경계의 해체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또한 이러한 ‘개입’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자원에 대해서 성찰하고(예컨대 청소를 하면서 자신의 중산계급 작가로서의 몸 관리에 대해 성찰하는 지점) 그것들과 자신이 목격한 사람들의 삶과 연동하여 보여주는 지점들은 그녀의 주장에 힘을 더해준다. 그녀는 기존의 우파 지식담론에 대해 문자화되고 수치화된 텍스트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삶’들의 맥락의 번역을 통해 싸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그녀 자신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경험도 존재하지 않나.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