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에서의 ‘상층부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상층부 연구의 기획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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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전통적인 방식의 연구대상은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의 이른바 저개발국아직훼손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곳의 문화 혹은 사회였다. 이러한 방식의 지식은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식민지 운용의 담론/지식/권력 작동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았고, 개개의 인류학자들의 진보적인 신념들이 존재했으나 이 역시 다른 방식으로 권력의 지식으로 포획되기 일쑤였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의 경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인권을 지키자는 목적에서, 영국의 사회인류학의 경우 원시사회를 보전하자는 입장을 가진 진보적인 성향의 지식인으로서의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러한 지식들은 위에서 말한 경향을 따르곤 하였다. 이러한 지식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여성주의 인류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들,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지향을 가진 인류학자들의 운동을 통해서 연구참여자와의 권력관계가 대두되면서 방법론적 개선을 했었지만 문제는 이것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인류학자들이 누구를 보느냐 역시 문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주민 인류학native anthropology’의 맥락이 제기되었지만 그들 역시 자국의 하층 계급lower class working class’의 하위문화subculture 탐구에 몰입하게 되곤 하였다. 로라 네이더가 언급하는 상층부 연구studying up의 맥락은 그렇게 시작한다. 상층부 연구가 늘 공백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권력의 심층을 탐구할 수가 없게 되고 국가의 작동 원리를, 혹은 관료들의 세계를 또는 자본을 운용하는 이들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였고 그들과 하층 계급 혹은 억눌린자들the oppressed의 관점을 실제적인 권력의 장안에 개입시키는 운동은 늘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방법론적으로 그람시주의자들의 대중의 양가성에 대해 파악하고 억압/동의 구조에 대해서 푸코주의자들처럼 분석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통치혹은 지배의 맥락은 늘 괄호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상층부 연구의 필요성은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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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상층부 연구에 대해서 1970년대 이래 여러 인류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해왔지만 실제로 연구 자체는 여러 가지 난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셰리 오트너의 할리우드 연구를 다룬 Access: Reflections on studying up in Hollywood는 그러한 난점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전통적인 방식의 인류학자의 연구 방법인 참여관찰과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초창기 말리노프스키의 제자인 Hortense Powdermaker는 실제 할리우드 구성원들에 대한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첨단화되고 기술적으로 혁신되고 자본의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그들만의 암묵지tacit knowledge’에 대해 민감해진 상태에서 문화산업내부의 내부 그룹inner circle’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장기간 눌러앉아관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연구의 불가능성은 실제로 거대 기업의 문화기술지를 작성하는 데에서도 동일하게 발생될 것이다. 부문과 상관없이 핵심 기밀이라는 방식으로 블랙박스를 만들고 있는 기업의 인터뷰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게다가 그들 내부 그룹의 구성원들은 많은 경우 유명인사celebrity’로 간주되기 때문에 익명성 보호가 난해하다. 오트너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접촉을 시도하지만 계속적으로 미끄러지고 그녀가 대안적으로 제기하는 방법은 인터페이스 문화기술지이다. 유명 인사들이 공적인 장소the public’에 그들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관찰하고, 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궤적을 추적하고, 샛길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방식. 하지만 결국 오트너의 연구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가 결국 만난 문화산업의 인사들은 대부분 인디영화를 만드는 비주류의 영화업계 종사자들이다. ‘접촉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상층부 연구는 결국 어느 정도의 미끄러짐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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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경험을 나 역시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군인 연구를 위해서 내 연구참여자로 설정될 수 있는 경우 중 가장 상층부인 예비역 통역장교들과의 접촉이 그러하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혹은 다른 해외 소재의 대학을 졸업했고, 군 생활을 마치고 대부분 초국적 금융기업이나 컨설턴트 그룹 혹은 MBA 과정이나 일반 대학원의 석사/박사 과정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특별한 경우 H그룹 회장의 첫째 아들처럼 경영 수업을 받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을 습득하기 위해서 통역병/통역장교 학원을 다녔지만 그 이후에는 한국살이에 특별한 미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통역병 혹은 통역장교로 복무했던 연유는 추후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재산 양도를 위해서라고 밝힌바 있다. 결국 접촉 자체는 생각보다 난해하고 20대 후반, 30대 초반 남성인 그들의 바쁜 일과는 제한적인 접촉만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결국 동기 네트워크인데 다양한 그들 집단과의 접촉은 어쨌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통역장교들은 () 공개네트워크를 운영하는데 그곳의 참여관찰을 하고 싶으나 이 역시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아직 연구는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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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카렌 호는 그녀의 박사논문 작업으로써 미국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의 현지조사와 인터뷰를 통한 문화기술지 작성에 성공한다. 이러한 상층부 연구의 성사가능성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인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학부를 스탠포드 대학에서 졸업했고, 인류학 석사/박사 과정을 프린스턴에서 수행했다. 그녀는 베트남 출신의 유색인종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맥을 통해서 진입에 성공한다. 그녀는 실제로 리스크 관리 매니저예비조사시절에 수행하면서 관계성을 맺을 수 있었다. 월가에서 수뇌부front-office’에 근무할 수 있는 2개의 대학(Harvard University, Princeton University) 중 한 군데의 학부를 다닐 수 있었으면 그녀는 수뇌부에 대해서 더 깊은 탐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왔던 학부 출신들은 보통 미들 오피스로 분류되며 이들은 리스크 관리 매니저를 많이 하는 부서로 발령되기 때문에 그녀 역시 그러한 직군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학벌에 따른 배치 과정에 연구자인 그녀 역시 배치되는 것을 통해 그녀의 문화기술지는 그녀의 주장을 아주 명료하게 잘 드러내준다.

 

 

Liquidated (Hardcover) – 10점
Ho, Karen/Duke Univ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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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매끈한서사에 대해서 반대한다. 사실은 어떠한 한 분파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칼 폴라니의 사회로부터 착근하지 않은종류의 시장의 독재라고 보는 서사. 자본주의의 이중운동에서 튀어 나가버린, 즉 사회로부터 탈구되어버린 종류의 세계로 신자유주의를 보는 서사일 것이다. 그녀는 문화기술지를 통해 어떠한 월가 투자은행 종사자들, 즉 상층부의 일상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논리를 드러냄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대한 풍성하고 입체적인 논의를 보여준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파워 엘리트로서의 투자은행 종사자들의 문화적 맥락이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리를 조형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동문혈통을 통해서 선발 과정을 거치며, ‘프로페셔널이라는 문화적 이데올로기 혹은 담론은 고학벌의 자부심을 강도 높은 과로노동에 종사하게 만들게끔 호명한다. ‘똑똑함으로 재현되는 담론은 옷차림과 먹는 음식, 먹는 방식 등의 문화적 코드를 통해서 구현된다. 동시에 이러한 프로페셔널담론은 내부의 위계 구획을 통해서(front-/middle-/back-) 직무 체계의 공간적 분할을 통해 실현되며 이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로 구분하는 방식을 통해 실행된다. 동시에 같은 직군 내부에서도 도드라진marked’ 직원과 도드라지지 않은 직원의 구분들은 승진에의 압력을 매개하여 폭발적으로 과로체제를 유지하며, 동시에 젠더와 인종은 프로페셔널담론을 통해서 특별 케이스token’들의 관리에 동원된다. 모두는 과로하며, 동시에 소수 인종, 여성의 경우 프로페셔널로 살아남기 위해서 과잉된 수행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양상들은 복합적으로 얽혀서 투자은행의 독특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용에서의 역할을 드러내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지배가 아니라,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서 그 집행자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며 문화적 비평은 그 맥락성을 드러내서 그들을 장소와 시간이 있는 실제의 영역에 배치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의 연구는 구체적인 방식의 대안적 정치적 대응에 대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재료로 기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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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층부 연구는 카렌 호의 경우처럼 동문과 산업의 필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때(그녀의 두 번째 직장에서는 그녀가 인류학도이기 때문에 직무에 적절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진행 가능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위험을 내포한다. 바로 그것은 연구자의 관계성과 성찰성 문제이다. 차라리 저널리스트의 방식으로(예컨대 나오미 클라인이나 바바라 에런라이크) ‘탐사보도하는 방식이라면 관계성의 문제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 것이며 팩트 논쟁정도로 사태는 오히려 간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학자의 경우 전통적 방식의 현지조사 관점으로 장기간 상층부에 진입했을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맥락에 위험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의 계급적 편향이 강해져서 성찰적 연구가 되지 않고 단순한 자기 세계에 대한 모사로 연구가 종료될 수도 있다. (예컨대 내 연구가 봉착한 문제도 거기에 있다) 어쩌면 조지 마커스와 마이클 피셔가 언급했던 비판적 문화 비평으로서의 기능 상실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연구 가능성이 획득되는 것에 비해서는 그리 큰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역시 지속적으로 연구자의 연구 계획에 있어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힐 사안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자기 계급의식에 대한 배반일 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