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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만 봐도 토악질 나오게 만드는 책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201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 이러한 ‘열정’ 권하는 사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청춘’, 20대~30대의 ‘젊은이’들이다. 대학에 동년배의 80% 이상이 입학하고(했고), 대부분은 ‘지적인 노동’ 혹은 ‘비물질적 노동’을 기대하면서 대학을 다닌다. 그건 한 편에서, ‘계급 상승’ 혹은 ‘계급 재생산’을 학벌과 학력을 통해서 획득했던 전 세대의 경험 때문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창의 산업’을 통하여 이윤을 획득하려고 했던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축적전략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다 알다시피 한국의 축적구조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산업 사회 축적 구조인 포디즘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포스트포디즘 체제로 ‘안착’에 실패했고, 복지제도는 어제나 그제나 기업복지 수준에서 봉합되었고(이 말은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면 거의 복지가 없다는 말이다), 1998년의 IMF 합의 이후 ‘노동의 유연화’ 흐름은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모든 것은 ‘불안불안’하다. 사무직에서는 언제 책상이 없어질 지 모르는 일이고, 공장에서는 언제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받을 지 모르는 일이다. 동시에 청년들에게는 ‘청년 실업’이라는 폭탄이 투하되었다. 전반적인 고용의 규모는 압도적으로 줄었고, ‘지식 노동자’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적절한 사무직이나 전문직의 ‘안정적’ 직장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1990년대의 ‘프리랜서’ 바람은 묘하게 비정규직화와 맞물려, 최고은의 죽음과 같은 ‘하청 체제’ 안의 문화생산자들의 ‘불안정 노동’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어느 날부터인가 IT 강국, ‘한류’의 진원지가 되었지만 새로 생겨나는 모든 직군은 ‘불안정 노동’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의 선택은 ‘불안한’ 곳으로 들어가거나, ‘안정적’인 ‘마지막 보루’인 공무원, 교사, 경찰 시험 등에 응시하는 것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한’ 곳으로 들어가는 모든 이들의 ‘주문’이 ‘긍정의 힘’이고, 자본과 국가가 이들에게 권하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 # 하지만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단순히 그러한 논리에 대한 ‘비평’만을 수행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에는 생생한 ‘열정 노동’을 수행하는 청춘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프로게이머, 문화 산업, IT 산업, 언론고시, 서비스 직종, 다단계 판매, 시민단체와 정당 등에 있는(하는) 청춘들의 맥락들은 지금까지 모든 ‘사회’, 즉 자기의 외부에 대한 질문을 봉쇄당한 채 ‘자기’만을 문제로 삼고 ‘열정’ 하나로 극복(혹은 위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의 지금이 담겨 있다. 구체적인 삶과 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읽는 이는 지금 여전히 “눈높이를 낮추”라며, “젊으니까 할 수 있다며” ‘열정’이라는 박카스를 권하는 것의 ‘잔인함’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뒤에는 늘 ‘훈계’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사회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화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의 ‘열정’을 착취하기에 이러한 ‘질책’과 열정의 ‘강권’이 적당한 방식이기 때문이며, 특별히 어떠한 ‘비용’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청춘’들에 대한 서사였던 ‘세대론’이 실제로 어떠한 맥락으로 작동하는지, 예컨대 ’20대 개새끼론’ 등으로 어떻게 변질되는지도 ‘노동’이 되어버리는 ‘열정’에 대한 책의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니나 가라 하와이**“처럼 “**니나 가져라 열정**“라고 힐난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지금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은 아포리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세계를 깨기 위해서도 결국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반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반복이 아닌, 사태를 직시하고 모든 곤경을 끌어안는 그런 반복이다. 그런 반복 속에서 우리의 역사는 다시 진행될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과 열정을 그대에게!**“(p.258) 이러한 결론은 아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메타포를 가져온 것 같다. 그런데 저자들은 “**일개인의 입장에서 어차피 열정 노동을 할 거라면, 본인의 재능과 운을 믿고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쪽이 훨씬 나은 일이 아닐까?**“(pp.234-235)라면서 ‘합리적’인 지금의 ‘청춘’의 사고방식을 인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의 직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다시금 ‘자기계발’의 맥락에 갖힐 소지가 다분하다. 너무나 ‘사태’를 잘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마저의 ‘피로’를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해소하기 위해 박카스를 마시고, 만 원 짜리 자기계발서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야 말로 너무나 합리적인 상황이 아닌까? 문제는 ‘사태의 직시’여부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개별화된 청춘들을 묶어내는 전략의 부재 혹은 운동의 부재가 아닐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필요해보이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를 만들어주는 문제에 대한 천착 같아 보인다. **난 이 지점에서 책에 나왔던 ‘잉여’들의 ‘바닥’에서의 연대를 잘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극심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구태여 ‘주류’를 꿈꾸지 않고(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는 역설적인 ‘능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러한 ‘능동성’은 과대평가될 수 없다(**문화연구 그룹이 가장 빠지기 쉬운 딜레마**). 중요한 것은 그렇기에 그것들을 더 ‘주류’의 세상과 조우할 수 있게 맥락을 만들어주는 ‘문화번역’이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에 대한 부재로 이 책을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전히 문제의 ‘심층’을 다루는 이야기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옆에 놓여있었던 박카스를 보니 토악질이 나온다**. 결국 책을 읽는 우리의 태도는 좀 더 ‘곁가지’로 간주되는 주위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바라보고 그들에게 말거는 태도일 거라는 ‘점잖고’ ‘안전한’ 대답을 하는 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p>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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