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만 봐도 토악질 나오게 만드는 책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201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10점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근대 이후 한국은 전반적으로 ‘입지전’적인 경험을 으뜸으로 쳐주는 사회다. 정주영이 그랬고, 이명박이 그랬으며(따지고 보니 둘 다 현대 출신이구나), ‘노가다’를 하다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장승수(변호사)의『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의 ‘대박 히트’도 그러한 맥락 안에 위치한다. <아침마당> 같은 주부 대상 프로그램에서는 여지 없이 ‘입지전적 성공 체험’의 ‘사연’이 단골 소재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조의 이야기와 그들의 ‘비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이런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는 모두는 또한 ‘성공’을 마음 속에서 다짐한다. ‘민중가요’였던 <사노라면>의 가사처럼 “내일은 해가 뜬다”며 오늘의 비루한 삶은 정당화가 된다. 이러한 ‘성공’에 대한 갈망은 사자성어에도 존재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늘 우리는 ‘달달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유보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미래’는 늘 ‘미래’이고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font> 이러한 한국적 맥락에서 자기계발서가 잘 팔리는 것은 너무나 쉽게 이해할 만한 일이다.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같은 미국발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뭔가 ‘비밀’을 깨닫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개신교를종교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일'(일요일)마다 목사의 설교에서 ‘긍정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매일 매일을 묵상하면서 꿈을 멈추지 않는다. 전통적 한국의 ‘입지전’적 경험, “고진감래”의 서사, 거기에 마케팅으로 무장한 미국발 자기계발서와 그를 따라하는 아류로서의 국내의 자기계발서들. 이것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 최태섭, 한윤형, 김정근은 그러한 세상에 대해 ‘열정 노동’의 세상이라고 이름 붙인다. 책의 서두에서 등장하는 박카스의 신화는 ‘열정’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활용되는지에 대한 잔인한 예화다.  > 교과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반듯한 청년들은 현실의 청년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광고는 청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개인의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상황의 익명의 연기자들은 이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광고는 마치 열심히 살고 있는 청년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현실의 청년들은 이 광고에서 위로받을 수 없었다. 광고를 본 어른들의 눈총과 ‘난 뭐지?’라는 자괴감속에서 청년들은 마음 놓고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씁쓸한 다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피로 회복제가 사람에게 훈계를 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p.22).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러한 ‘열정’을 권하는 사회,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더 중요한 ‘열정’을 권하는 사회의 특징은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지만, ‘입지전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신의 서사에서 ‘사회’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난국’을 돌파했던 자신들의 경험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환경은 늘 자신에게 적대적이었고, 그것은 상수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차원이 된다**. 그런데 ‘열정’을 권하는 사회가 좀 더 묘한 것은, 그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셈’은 하지말고 어찌되었건 ‘열정’적으로 하면 된다는 방식. 이는 『긍정의 배신』에서 바바라 에렌라이히가 이야기했던 맥락과도 맞닿는다( 2011/04/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아직도 ‘긍정의 힘’을 믿으시나요? – 『긍정의 배신』(바바라 에런라이크, 2011). ). > 그동안 기업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경영 과학’을 공부한 냉철한 전문가이며, 기업이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에렌라이히:p.154). > >  경영 컨설턴트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동기 유발 전문가들의 적잖은 영향을 받아 CEO들은 정장을 차려입은 인물이라기보다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지자’라는 자아상을 갖게 되었다(에렌라이히:p.159). > >  동기 유발 산업은 이런 새로운 현실을 교정할 수 없다. 동기 유발 산업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라고 제안하는 것뿐이다. 기업 구조 조정은 환영해야 할 즐겁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은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이며, 새로운 ‘승리자’ 집단은 격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기업들이 동기 유발 업체에 높은 비용을 치르면서 해 주길 바라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에렌라이히:p.164). > > 더 이상 서점가의 ‘경영 담론’은 경영 과학을 통한 생산성 증가 같은 전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미사여구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경영 담론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을 ‘관리’하고 ‘계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경영’과 ‘삶’ 혹은 ‘노동’과 ‘삶’은 하나가 되었다. 스펙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뻔한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 계발 도서를 읽으며 동기를 부여 받는다. 이런 방법은 ‘하면 된다’를 부르짖으며 공업화를 이룩한 한국인의 심성에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p.102).   달리 이야기하자면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 들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하는 인간들 보다는 지속적으로 ‘열정’이라는 ‘박카스-피로회복제’를 먹고 끊임없이 과로에서도 ‘긍정적 사고’를 버리지 않고 ‘미래’를 꿈꾸면서 사는 인간형을 지금의 사회가 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형은 심지어 가장 ‘냉철’하게 돈을 만져야 하는 금융산업 안에서도 양산되기도 한다(Karen Ho의 『Liquidated』에 등장하는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을 보라). 게다가 이러한 자기계발 시장, 치유 산업 시장은 점차 법인화되고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 이러한 ‘열정’ 권하는 사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청춘’, 20대~30대의 ‘젊은이’들이다. 대학에 동년배의 80% 이상이 입학하고(했고), 대부분은 ‘지적인 노동’ 혹은 ‘비물질적 노동’을 기대하면서 대학을 다닌다. 그건 한 편에서, ‘계급 상승’ 혹은 ‘계급 재생산’을 학벌과 학력을 통해서 획득했던 전 세대의 경험 때문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창의 산업’을 통하여 이윤을 획득하려고 했던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축적전략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다 알다시피 한국의 축적구조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산업 사회 축적 구조인 포디즘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포스트포디즘 체제로 ‘안착’에 실패했고, 복지제도는 어제나 그제나 기업복지 수준에서 봉합되었고(이 말은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면 거의 복지가 없다는 말이다), 1998년의 IMF 합의 이후 ‘노동의 유연화’ 흐름은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모든 것은 ‘불안불안’하다. 사무직에서는 언제 책상이 없어질 지 모르는 일이고, 공장에서는 언제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받을 지 모르는 일이다. 동시에 청년들에게는 ‘청년 실업’이라는 폭탄이 투하되었다. 전반적인 고용의 규모는 압도적으로 줄었고, ‘지식 노동자’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적절한 사무직이나 전문직의 ‘안정적’ 직장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1990년대의 ‘프리랜서’ 바람은 묘하게 비정규직화와 맞물려, 최고은의 죽음과 같은 ‘하청 체제’ 안의 문화생산자들의 ‘불안정 노동’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어느 날부터인가 IT 강국, ‘한류’의 진원지가 되었지만 새로 생겨나는 모든 직군은 ‘불안정 노동’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의 선택은 ‘불안한’ 곳으로 들어가거나, ‘안정적’인 ‘마지막 보루’인 공무원, 교사, 경찰 시험 등에 응시하는 것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한’ 곳으로 들어가는 모든 이들의 ‘주문’이 ‘긍정의 힘’이고, 자본과 국가가 이들에게 권하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 # 하지만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단순히 그러한 논리에 대한 ‘비평’만을 수행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에는 생생한 ‘열정 노동’을 수행하는 청춘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프로게이머, 문화 산업, IT 산업, 언론고시, 서비스 직종, 다단계 판매, 시민단체와 정당 등에 있는(하는) 청춘들의 맥락들은 지금까지 모든 ‘사회’, 즉 자기의 외부에 대한 질문을 봉쇄당한 채 ‘자기’만을 문제로 삼고 ‘열정’ 하나로 극복(혹은 위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의 지금이 담겨 있다. 구체적인 삶과 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읽는 이는 지금 여전히 “눈높이를 낮추”라며, “젊으니까 할 수 있다며” ‘열정’이라는 박카스를 권하는 것의 ‘잔인함’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뒤에는 늘 ‘훈계’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사회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화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의 ‘열정’을 착취하기에 이러한 ‘질책’과 열정의 ‘강권’이 적당한 방식이기 때문이며, 특별히 어떠한 ‘비용’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청춘’들에 대한 서사였던 ‘세대론’이 실제로 어떠한 맥락으로 작동하는지, 예컨대 ’20대 개새끼론’ 등으로 어떻게 변질되는지도 ‘노동’이 되어버리는 ‘열정’에 대한 책의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니나 가라 하와이**“처럼 “**니나 가져라 열정**“라고 힐난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지금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은 아포리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세계를 깨기 위해서도 결국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반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반복이 아닌, 사태를 직시하고 모든 곤경을 끌어안는 그런 반복이다. 그런 반복 속에서 우리의 역사는 다시 진행될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과 열정을 그대에게!**“(p.258) 이러한 결론은 아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메타포를 가져온 것 같다. 그런데 저자들은 “**일개인의 입장에서 어차피 열정 노동을 할 거라면, 본인의 재능과 운을 믿고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쪽이 훨씬 나은 일이 아닐까?**“(pp.234-235)라면서 ‘합리적’인 지금의 ‘청춘’의 사고방식을 인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의 직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다시금 ‘자기계발’의 맥락에 갖힐 소지가 다분하다. 너무나 ‘사태’를 잘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마저의 ‘피로’를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해소하기 위해 박카스를 마시고, 만 원 짜리 자기계발서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야 말로 너무나 합리적인 상황이 아닌까? 문제는 ‘사태의 직시’여부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개별화된 청춘들을 묶어내는 전략의 부재 혹은 운동의 부재가 아닐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필요해보이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를 만들어주는 문제에 대한 천착 같아 보인다. **난 이 지점에서 책에 나왔던 ‘잉여’들의 ‘바닥’에서의 연대를 잘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극심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구태여 ‘주류’를 꿈꾸지 않고(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는 역설적인 ‘능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러한 ‘능동성’은 과대평가될 수 없다(**문화연구 그룹이 가장 빠지기 쉬운 딜레마**). 중요한 것은 그렇기에 그것들을 더 ‘주류’의 세상과 조우할 수 있게 맥락을 만들어주는 ‘문화번역’이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에 대한 부재로 이 책을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전히 문제의 ‘심층’을 다루는 이야기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옆에 놓여있었던 박카스를 보니 토악질이 나온다**. 결국 책을 읽는 우리의 태도는 좀 더 ‘곁가지’로 간주되는 주위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바라보고 그들에게 말거는 태도일 거라는 ‘점잖고’ ‘안전한’ 대답을 하는 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p>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10점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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