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의 청소년, 그리고 지금의 청소년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10점
조한혜정 지음/또하나의문화
2009/04/1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래, 다시 마을이다! – 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 또 하나의 문화, 2007</a>
2009/08/27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우정과 환대의 지식 공동체 – 조한혜정 외 : 교실이 돌아왔다, 2009
2009/09/0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감응적 개념 – 조한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1
2010/07/2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5] 박원순의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2010/08/2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9] 여성주의와 소통. 그리고 좌파.
2011/05/09 – [생각하기/정치사회비평] – [레디앙 – 진보, 야!] 나라의 기둥 20~30대 어린이 책임져라
2010/09/06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레디앙 – 진보, 야!] 면목동 중딩, 싸움을 못한다는 것의 의미?
2010/07/2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헨드릭스의 책읽기 #15] 박원순의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2009/06/01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화학 협동과정 합격
2010/10/26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10주년 학술 행사!  </td> </tr> </table> #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한혜정 밑에서 문화연구를 ‘하고’있다. 문화연구에도 여러가지 계보가 있고,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문화학과’ 혹은 ‘문화학협동과정’은 독특한 학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현장 연구’이다. 참여관찰로 특징지어지는 ‘인류학적’ 방법론이 내가 다니고 있는 학과에서는 ‘기본적’ 속성이다. (물론 ‘현장 연구’없는 방식의 연구를 통해서 학위를 취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현장 연구’에 대한 강조는 아무래도 ‘문화연구’를 소환했던 맥락과도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먼저 인류학에서의 ‘문화연구’를 불러들이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는 1980년대 인류학에서의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과 결부되어 있다( 2011/03/1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경계를 흩어버리는 글쓰기, 그리고 일상감각으로 글쓰기). 다른 한 편에서 ‘현장 연구’를 강조하는 흐름은 연세대학교에서의 ‘문화연구’가 ‘현장’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그 현장 혹은 연구의 주제 중 강했던 경향이 바로 ‘청소년’이다. # 사실 이러한 ‘청소년’과 결부된 문화연구가 비단 연세대학교만의 ‘독특한’ 흐름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1970년대 문화연구에서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Learning to Labour』 같은 저작 같은 경우의 주제가 바로 노동계급 청소년들이었고, 다른 한 편 문화연구의 독창적인 연구분야인 ‘하위문화subculture’같은 경우도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이민자의 자녀들, 즉 청소년들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한국에서 “왜? 청소년?”인가? 어떠한 맥락에서 ‘청소년’에 대해서 강조하게 되는가? 그러한 실마리를 조한혜정의 15년전의 저서, 즉 1996년에 출간된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 우선 맥락을 좀 살펴보자. 한국 사회에는 도대체 어떤 ‘청소년’들이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은 일단 ‘학생’과 ‘비학생’으로 나뉜다. 학생의 범주에 들어가게 될 경우 그에게는 ‘입시공화국’의 맥락에서 ‘학업 노동’의 의무가 부과된다. 입시공화국은 참으로 공평무사하게도 ‘등수’에 따라서 한국사회의 권력에의 접근성, 자원의 배분 등의 ‘격차’를 위계적으로 배분하고 있다. ‘SKY’로 지칭되는 명문대와 그 아래의 ‘서성한’, ‘중경외시’ 등등의 등수는 그대로 노동시장의 진입과 더불어 1차적인 위계를 형성하고, 두 번째로 4년제 대학과 2~3년제 전문대학의 위계가 만들어지며, 동시에 고졸과 그 이상의 학력의 위계를 분할한다. 학생은 그러한 강력한 ‘위계’ 안에서 훌륭히 ‘학업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언급한 대로 ‘비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인구’ 혹은 ‘인간’으로 잡히지 않는 속성의 존재들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열을 통해 대부분이 고등학교까지 모두 진입할 수 있게 되고, 제도적으로 이들 중심으로 모든 청소년 정책이 재편되어 있기 때문에 ‘비학생’, 즉 학생이 아닌 모두는 어떠한 ‘보호’에서도 비껴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학생’ 말고 동시에 부모의 교육적 비전이나 학생 자체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해서 제도권 교육 바깥에 잠시 걸터있는 경우가 있다. 이 중 일부는 아예 ‘정규교육 바깥’에서 다른 방식의 교육을 생각하고 실천하지만, 많은 경우는 ‘명문대에 들어가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주도학습’을 수행하고 검정고시 등을 통해서 대학입시를 준비한다. # 위에서 언급한 청소년의 맥락은 사실 ‘한정적’인 나이라는 범주 만을 통해서 구분한 것이다. 요즘 ‘소년 운동’등을 통해서 제기되는 맥락을 따져보자면, 나이 30을 먹어도 부모의 손아귀 바깥에서 ‘자립할 수 없는’ 존재 모두를 청소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성인’은 성년식이라는 의례ritual를 치루고 ‘결혼’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의미지어지고 동시에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서 자신의 생계를 치러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한국의 20~30대는 그러한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혹여 ‘결혼’을 한 들, 그것의 의미가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하고 ‘독립적인 가계’를 이루었음을 반드시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신자유주의적 격차사회와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너무나 강고하다. # 이러한 현재의 맥락을 놓고 1996년에 나온 조한혜정의 책을 읽는다. 그 때 도대체 왜 ‘청소년’에 주목했을까?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당시의 ‘독특함’을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어제나 그제나 한국의 ‘입시사회’의 병폐는 극에 달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소비자본주의의 ’10대 소비자’ 만들기 전략은 당시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난 나야!”라는 리바이스Levi’s 광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청바지 브랜드를 통해서 확립시키려는, 즉 ‘소비적 주체’로 만들려는 기획이 어떠한 문화적 코드를 통해서 발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90년대의 교육은 ‘표류’하고 지속적으로 ‘이탈자’들을 광범위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바깥 세상의 맥락과 상관없이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제도권 교육의 맥락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고 많은 ‘이탈자’들을 만들어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90년대의 그 ‘이탈자’들은 ‘대안적 공간’을 갈구 하고 있었고, 마침 등장한 ‘문화적 흐름’들은 그들을 다른 방식의 주체로 읽어내곤 했다. 전교조 등의 ‘참교육’, 흥사단/YMCA 등으로 대표되는 시민단체들의 ‘청소년 프로그램’ 등은 10대들에게 나름의 ‘대안적 공간’들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이러한 ‘이탈자’들이 그러한 ‘양지’로만 진출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들은 ‘소비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영유하기 위해서 부모의 용돈으로는 턱 없었고, 주유소나 유흥 업소 등에서 ‘불안정 고용’으로 노동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러한 ‘이탈자’들은 예전의 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불우 청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지만, 동시에 이들 역시 여러가지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비행 청소년’으로 생산되기 일쑤였다.</p>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소리’를 지르곤 했다.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의 메시지가 90년대를 쩌렁쩌렁 울리고, 이제는 제발 집에 들어오라는 의 가사가 TV를 울려댔다. 그리고 염색 등 여러 가지 자기 ‘스타일링’의 맥락이 활짝 펼쳐나고 ‘자기 표현’은 ‘신세대’의 사명인 것처럼 대중매체에서 울려퍼졌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염색’을 하지 않게된 지금이 좀 흥미롭긴 하다. 청소년들은 이 가혹한 신자유주의적 질서 안에서 ‘순치’된 것일까? 대학에서도 ‘정장’을 입고 늘 상시적으로 기업의 면접에 대비하는 20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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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 제도권 교육에서 ‘생존’하면서 영리하게 PC 통신이나 앞서 언급한 ‘대안적 공간’들을 활용하거나,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 영화 등의 당시 등장하던 ‘문화적 매체’들을 잘 활용하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약간 거칠게 말해 이적 같은 인물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제도권 교육에서도 ‘엘리트’ 위치를 놓지 않고 동시에 문화적 감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들에게 주입되는 ‘제도권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여러 ‘대중 문화’의 ‘팬덤’을 형성했고 이는 동시에 ‘공윤심위 폐지’ 등의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들이 모여 ‘청소년 운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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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비자본주의, 입시교육의 한계로 초래된 ‘교실 붕괴’, 대안적 공간들의 등장, 새로운 ‘영리한 청소년’들의 등장. 등등은 1990년대 ‘부상하는 주체emerging subject’로서의 청소년을 바라보게 하는 맥락으로 작동하게 되며, 조한혜정의 저작은 그들의 부상이 기존의 갈팡질팡하며 길을 못 찾는 교육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찾으려 했던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지속적으로 ‘기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이야기한다.

지금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기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지배와 경쟁, 소유와 통제, 그리고 집단주의적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의 기본 구성 원리를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소중하게 일구기 시작해야 한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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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은 비단 ‘탐구’로 종결된 것은 아니다. 이는 1980년대의 ‘또하나의문화’에서 주관하던 <어린이 캠프=""> 그리고 1999년 부평에서의 화재사건 이후 ‘하자센터’를 만들려는 ‘운동’의 맥락과 연결되고, 대안학교 운동과 연결되며, 탈학교 운동과도 결합된다. 인류학에서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준거집단’과 결합된 연구였기 때문에 ‘실천’을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font> </p>

하지만 지금 15년이 지나, 이 책을 달리 평가해 볼만 한 소지는 많은 것 같다. 여러가지 ‘대안적’ 흐름이 생겨났지만 공교육, 제도권 교육 자체는 더욱더 ‘입시 체제’에 심화되어 재편되기 시작했다. ‘교육 인적자원부’는 지속적으로 ‘창의적 인재’에 대해서 역설했지만 기존의 공교육을 어떠한 방식으로 ‘민주적’ 재편을 할 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p>

다른 한 편 여러 대안 학교들은 분명 ‘내용’의 측면에서 질적 성숙을 보여주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누가’ 그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지의 측면에서 ‘계급적’ 난점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386 중산층 엘리트들의 자녀들이 갈 수 있는 학교라는 방식으로 대안학교는 마치 외국어 고등학교, 과학고등학교 같은 ‘특목고’처럼 호명되는 경향마저 존재한다. 

세 번째로 이러한 대안 학교와 대안적 공간들의 논의는 전혀 공교육에 ‘침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대안 학교를 보내는 부모들은 그 공간을 ‘더 나은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경우로 진단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지속적으로 ‘입시 교육’ 때문에 찌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대안 학교를 상상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맥락들 때문에 대안 학교와 대안적 공간들을 폄하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위치성’일 따름이다.

네 번째로 ‘대안적 가치’를 가지고 청소년들과 호흡할 수 있는 ‘여지’ 자체도 축소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불안정고용’으로 특징지어지는 ‘노동 유연화’시대의 맥락은 ‘다른 방식의 교육’을 수용하기에 너무나 팍팍한 사회적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한 ‘팍팍함’을 탈피해서 다른 방식의 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들은 역설적으로 상층 계급들 뿐이다. 유학을 보내거나 앞서 언급한 대안 학교에 보내거나. 대부분의 중산층 이하 가계는 여전히 ‘입시 교육’에 올인하는 것을 계급 재생산 혹은 계급 상승의 전략으로 판단하며, 15년 전에 비해서 그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가계는 ‘입시 경쟁’에서 실패하고 점차 쇠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 결과적으로 이러한 맥락들은 지속적인 ‘교육 실패’를 불러일으키고, 거기에다가 1996년 전에 처했던 사회경제적 맥락, 즉 축적체제의 재편 또는 ‘사회 발전 양식’의 재편에 대응하는 것 마저 실패하게 만들었다. ‘포스트-포디즘’의 다품종 소량생산의 체제가 만들어야 할 ‘창의적 인재’는 ‘길러지지 않고’ 그냥 내던져진 채 ‘하청 노동’ 혹은 ‘비정규직 노동’의 형태로 착취적 체제만 강화되는 상황이다(
2011/05/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박카스만 봐도 토악질 나오게 만드는 책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2011)). 거기에 전통적인 ‘학벌’의 맥락은 동시에 작용하여 ‘능력주의’조차 침해되고 있고 정량화된 방식의 ‘토익’이나 여러가지 자격증은 전혀 ‘인재’를 변별할 수 있는 기준임에도 ‘저고용’의 시대와 맞물려 최악의 결과들만 양산하고 있다. 누구도 만족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그에 대한 ‘지배적 대답’인 신자유주의적 처방들은 사태를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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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대안적 논의’들이 필요한다. 지금은 ‘덫’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86 출신의 ‘매니저맘’의 입시 게임 전략이나, 아예 배제 되어 버린 ‘전문고(실업고)’의 문제,  ‘비학생’의 문제는 점점 더 엉켜 있다. 학교 폭력은 좀 더 ‘지능적 왕따’로 진행되고 더욱 더 물리적 폭력을 가혹하게 수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게다가 1990년대에 있었던 ‘사회’가 개입하는 형태의 교육 형태는 약화되고 결국 교육 문제는 ‘엄마’의 몫 혹은 ‘가족’의 몫이라는 가족주의만 더욱 강화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안’들이 요청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요즘 내 주위의 문화연구하는 이들은 다시금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는데 이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다시금 ‘사적 영역’으로 침전되는 교육을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끌어낼 수 있으며, 기존의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것들을 어떻게 ‘공적 영역’에서 읽어낼 수 있을까 등등..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미 1996년의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에 등장했던 것 같다. 어쩌면 조한의 이야기의 맥락이 ‘굴절’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font>

결국 한 사회의 ‘건강’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공동체의 운명과 연결시켜 풀어 갈 언어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상황 변화에 다라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의견을 모아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공론의 장이 확보되어 있는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동양이건 서양이건, 이 지구상에 건강하게 살아 남을 사회는 바로 이 영역이 활성화되어 있는 사회일 것이며, 교육은 바로 그런 조건을 마련하는 기본 토대여야 하는 것이다(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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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10점
조한혜정 지음/또하나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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