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술지를 ‘쓰는’ 문제에 대해서: 저널리즘의 눈을 통해 본 문화기술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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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사의 눈을 빌어 문화기술지에 대한 생각을 달리 배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잘 쓰인 단신의 기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나 구조화된 설명도 없지만, 그 자체로 사태의 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신문기사 작성의 ABC에 해당하는 6하 원칙.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똑같은 반응으로 충격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아비투스 때문에 미사여구에 대해 질력이 나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이는 그 사태맥락을 파악하고 싶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맥락이 등장한다. 그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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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배경에 대한 맥락적 설명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그 사태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 구조적 동인. 예컨대 베르테르 효과가 카이스트에 퍼졌다고 할 때, 카이스트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범위를 구체적으로 잡을 때 그러한 개혁의 내용들. 예컨대 학점에 따른 등록금 페널티나, 초과학기 이수를 할 때의 불이익 등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총학생회나 단과대 학생회, 혹은 그러한 개혁에 반대 혹은 지지를 표명했던 학생사회와 학교 측의 대립·협상·동의의 양상에 대해서 파악한다면 그러한 맥락 자체의 이해는 훨씬 더 섬세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역사적 분석이 가미된다면 공시적 측면과 통시적 측면 모두가 강조된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fact’들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사를 씀에 있어서 편향이 등장하는 것은 글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된다. 신뢰는 글쓴이, 기자가 다루게 되는 어떠한 사실의 객관적 기술에 의해 획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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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구조맥락’, ‘역사’, ‘사실관계를 엄선해서 잘 배치시키는 것만으로 독자를 설득하거나 어떠한 충격에 빠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매시간 마다 보도되는 뉴스, 쏟아져 나오는 신문, 잡지 등의 미디어에 익숙해져있는 모두는 그러한 사실에 충실한 글쓰기를 선의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두는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사실을 보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이 곧 바로 충실한 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쓴이의 문제를 내포한다. 그러한 글쓴이의 문제는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글쓴이의 의도에 관한 것이다. 도대체 글쓴이, 기자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여주려고 하나. 예컨대 “‘병역거부강의석 징역 16이라는 201162일자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서 사람들은 가장 먼저 기사가 병역거부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지, 혹은 병역거부에는 반대하나 그들의 사법적 처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된다. 기사는 분명 사실관계를 보여줄 것이지만, 그 행간에 깔려있는 기사의 논조 역시 독자의 판단 대상이 된다. 아직 많은 기사들은 그러한 관점행간에 대해서 일간지 단신 기사 수준에서 잘 밝히지 않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서, 잡지의 에디터 피처 기사를 통해서, 혹은 다른 미디어의 글들을 통해서 이러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은 점차 정착하고 있다.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서 강준만 교수가 끊임없이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도 그러한 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그 누구의 관점이 어떠한 맥락에 서 있는지도 질문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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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 글쓴이의 취재과정이 문제가 된다. 어떠한 방식으로 현장에 진입해서, 어떠한 정보원을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인터뷰를 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글을 썼는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종종 검사의 취조를 방불케 하는 닥달을 통해서 정보를 취득하고 그것을 기사로 만들었거나, 정보원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절취한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을 경우 그것은 역시 문제로 파악된다. <미디어 오늘>이나 <미디어스> 혹은 <PD저널> 같은 매체에서는 그러한 취재과정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그러한 취재윤리는 이미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독자의 관점에서 선의로 파악할 수 없이 쓰인 기사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제기는 점차 확산되고 있고, 글쓴이 혹은 기자는 최소한 그러한 글에 대해서 질문이 들어왔을 때 밝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한겨레21>이나 <시사In> 같은 주간지나 <프레시안> 같은 매체의 심층취재 같은 경우 그러한 취재과정자체를 서두에 밝히는 것이 훌륭한 기사의 조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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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렇다하여도 좋은 글혹은 좋은 기사가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두 가지, 사실관계를 널리 보여주는 것과 글쓴이의 의도취재과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글쓰기는 정직하지만 재미없고’ ‘김빠지며’ ‘통찰력 없는기사가 될 소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태의 진실이 독자에게 어떠한 종류이든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데에는 다른 것들 역시 중요하다. 예컨대 먼저, 강력한 스토리텔링이 중요할 것이다. 사람은 사실이라는 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구성되어 씨줄과 날줄이 잘 짜여있는 이야기의 형태로 차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지식은 그 자체로 어떠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할 소지가 있다. 독자를 산만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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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 사태의 모든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떠한 부각되지 않았던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이미 사회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독자들에게 기존의 지식 체계를 허물어버리는 효과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7000만 원 연봉을 받는유성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심층 취재를 통하여 그 노동이라는 것이 40년차 노동자의 것이며, 그러한 임금을 받기 위해 주간 근무와 야근, 그리고 특근 노동을 주말 없이 수행하는 경우에만 획득한다는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귀족 노조에 대한 상식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구태여 유성기업의 전체 노동운동 역사와 자본과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의 역사를 다 드러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한 측면을 깊게 파헤치는 것을 통해서 전체의 세계를 달리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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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모든 것은 문화기술지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저널리스트들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사저널리스트의 글쓰기의 방법과 인류학의 지금 제기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서구의 남성 인류학자가 지식을 생산하면서 제공했던 사실주의적 경향realists tale’이나, 그에 대한 성찰적 문제제기를 통해 등장했던 고백적 경향confessional tale’이나, 스토리텔링과 부분적 지식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효과에 대해서 고민했던 인상주의적 경향impressionist tales’ 모두 기사의 방법론의 경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인류학적 지식 만들기에 대한 학문세계의 특권화된 인식체계자체였다고 본다. Maanen(1988)의 본문에서 언급되듯 이미 저널리스트들도 그러한 인류학적 방법론을 잘 이해하고 차용해서 훌륭한 글을 생산한지 오래된 것으로 파악한다. 바바라 에렌라이히나 나오미 클라인의 작업을 보라(2011/04/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아직도 ‘긍정의 힘’을 믿으시나요? – 『긍정의 배신』(바바라 에런라이크, 2011)
 
2011/05/1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다시 삶 속에서 본 미국의 빈곤층 – 바바라 에렌라이히, 빈곤의 경제(2002) </p>

2009/12/18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저널리즘이 쓴 최고의 신자유주의 분석 –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span>). 게다가 ‘개념적 사유’를 저널리스트가 잘 못한다는 것 역시 ‘학문세계’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span>오히려 과도한 학문적 윤리에 대한 부르주아의 일반화된도덕에 입각한 지식생산 방식들이 인류학적 지식의 경직성을 더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상층부 연구에서 연구자가 왜 을 사리게 되는가(
2011/05/19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인류학에서의 ‘상층부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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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결국 내가 보기에 사태의 진실로 가는 길은 복수이고 가장 적절한 방법은 특별히 없어 보인다. 인류학 혹은 질적연구방법론을 활용하는 연구자는 주된 문화기술지의 3가지 글쓰기 스타일 모두를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다른 학제에서 쓰는 방법들, 그리고 저널리스트들의 탐사 보도의 형태를 통해서도 여러 가지 통찰력을 인지해야 한다. 이제 누구도 사실주의적 경향을 통해 진행된 것들을 절대적 진리로 숭상하지 않고, ‘고백적 경향에서 나타는 방식의 글쓰기를 읽으면서 선의를 확신하지 않는다. 이미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어떠한 기준들은 유동하면서 지식생산을 고무하거나 그 기세를 꺾어놓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재적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적재적소의 판단은 여러 가지 현장 체험을 통한 훈련과 지식 담론의 습득과 그에 대한 비판적·성찰적 사유를 통한 세계관의 형성, 그리고 실용적으로는 지적 노하우의 선취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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