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에서 탈피해야 식민지 시대를 볼 수 있다 – 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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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10점
윤해동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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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가 드세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주위에는 ‘강성 민족주의자’가 많다. 그들은 크게 보아 세 부류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선량한’ 민족주의자. 국사 교과서를 열심히 봤고, ‘사회탐구’ 영역을 중 고등학교 때 좋아했으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다. TV를 보다가 일제의 ‘망언’을 들으면 분노하고, 축구나 야구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으나 ‘국가대표 경기’가 있으면 꼭 챙겨보는 이들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돗자리를 깔면서 한국의 경기를 보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특별히 ‘정치적’이지는 않고, 시시비비 구분은 잘 하지만 그냥 그 정도의 수준에서 이야기는 봉합되곤 한다. 고구려를 좋아하고, 신라를 욕하고, 발해를 꿈꾼다. “태왕사신기”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김구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대체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분단의 현실에 아파하고 동시에 그러한 맥락을 만들어낸 ‘열강’의 다툼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들은 또한 ‘정치적’이다. 대체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했던 것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이들은 ‘합리적’인 인간으로 자신들을 자처하고 뉴라이트에 분개한다. 식민지 시절에 ‘독립열사’들을 비교적 많이 아는 편이며, 중국의 국공합작 등을 예를 들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뭉게어버린 이승만의 ‘한민당’을 규탄한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국 누가 더 ‘민족’을 위해 열심히 싸웠는지의 문제가 쟁점이 되곤 한다.

세 번째는, 바로 주체사상파이다. 그들은 첫 번째의 부류와 두 번째의 부류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잘 조응한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잘 하다가, 어느 순간 ‘미제’의 문제를 꺼내기 시작하고, 남한이 과연 ‘정통성’을 가진 국가인지를 질문한다. 일재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남한에 비해 ‘정통성’을 더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해 ‘약간’ 호의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미국’이 저지를 만행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는 편이다. 이들 곁에서 한 시간 정도 신나게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박세길의 ‘베스트셀러’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권을 나누어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은 ‘엄청나게’ 정치적이다. 이들은 분명 두 번째의 경우의 ‘노무현 지지자’ 혹은 ‘민주당 지지자’에 대해서 힐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미’적인 한나라당을 규탄하고 ‘민족 통일’을 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세스로서의 ‘북미 회담'(사실은 ‘조미회담’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을 뭉게는 이명박 정권과 미국이라고 언급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미국을 까기도 참 애매한 상황이긴 하지만…) </p>

이들이 언급하는 ‘민족주의’는 그들의 방향과 상관없이 대체로 그들의 발언들을 ‘대중의 상식’과 유리되지 않는 선에서 잡아주는 지지대가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한국의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국가주의적 역사관’ 혹은 ‘민족주의적 역사관’ 안에서 이야기들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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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에피소드. 작년(2010년) 8월 일본을 방문에서 NHK에서 진행하는 <일본, 지금 여기에서(니혼노 고레카라)>에 출연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 진행이 끝나고 어떤 ‘열혈 민족주의자’ 방송작가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독도가 그렇게 문제라면 차라리 폭파시켜버리고 공동수역으로 활용하자고 했던 김종필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곧 바로 “당신처럼 얼빠진 사람 때문에 일본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당신이 역사를 알아요?”라고 쏘아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에게 나는 ‘신나게’ 다구리를 당했다. 뭐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으나. 어쨌든 여기에서 사람들의 젠더나 계급 혹은 학력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강력하게 ‘아’와 ‘피아’를 나누는, ‘우리’와 ‘적’을 나누는 기준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민족주의. 그 힘은 알튀세르의 말마따나 ‘물질성’을 가진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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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에 대한 관념이 강하게 설파되는 시기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혹은 일제 강점기)와 ‘구한말’ 정도가 될 것 같다. 거기에 “6.25 동란”이나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을 하게되면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언급하면 이 서사는 완성이 된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대한 언급은  모든 ‘판단’을 정지하게 할 때가 많다. 일제는 “헌병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민족 말살”의 정책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했고, 그에 대해 많은 이들은 3.1절이나 광주학생운동 등을 통해 저항하려 했지만 숨죽일 수밖에 없었고 1945년 8월 15일 바야흐로 ‘광복’을 맞았는데. 이러한 ‘광복’은 결국 열강의 분할통치 전략에 의해…….

문제는 이 ‘식민지 시대’ 혹은 ‘일제강점기’의 시대가 그렇게 일관된 ‘수탈’과 ‘억압’의 시기였냐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식민지’의 용도라는 것이 제국주의적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대상화’되고 ‘자원 동원’의 장소로서 활용되는 것이긴 했다. 분명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정책이라는 것은 동시에 식민지를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근대화’ 정책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즉 식민지의 ‘근대화’는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그 ‘근대화’의 효과들은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 공간’이었던 ‘식민지 근대’로서의 조선의 문제를 살펴보게 할 필요를 만든다.

동시에 전통적인 민족주의(관제화된 방식이든 주사파 전통이든)의 관념은 ‘조선 내부’의 ‘저항’이라는 것들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예컨대 독립운동의 전통은 3.1절과 광주학생운동 정도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통성’을 지닌 항쟁이 되며, 그 이후, 즉 1920년대 이후 벌어진 ‘저항’들은 모조리 한반도 ‘외부’에서 벌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임시정부와 김좌진, 홍범도 등으로 대표되는 만주/연해주/간도에서의 무장항쟁들만이 정통성을 가지게 된다.

분명 한반도 ‘내부’에서의 저항은 존재했고 그 규모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예컨대 여운형이 왜 ‘건준’의 헤게모니를 지닐 수 있었을까? 그냥 미제가 ‘꽂아서’? 아니다. 그 뒤에는 노동조합 운동과 광범위한 ‘적색 분자’들의 파업 그리고 정치적 운동들이 존재한다. 이재유, 이현상 등의 ‘경성 트로이카 그룹’들이 분명하게 ‘반제국주의 노선’과 좌파의 이념 아래서 ‘해방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정통성’을 지닌 민족주의 사관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공식담론 바깥으로 던져버린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민족주의 사관은 식민지 시대에 벌어졌던 ‘대중사회’의 탄생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채만식, 염상섭, 박태원, 이상 등의 ‘식민지 문인’들, 그리고 여러 분과에서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저작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억압’의 장소이고 늘 ‘신음’해야만 했던 조선 민족의 상황에서 이러한 이들의 ‘탄생’ 혹은 ‘출현’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 초 중반 이후에 탄생했던 ‘젊은 작가’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식민지’를 경험했고 이들에게 ‘조선’이라는 ‘조국’ 혹은 ‘모국’의 인상은 주입될 뿐 즉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에게도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은 ‘친일/반일’의 잣대로 평가하려 든다는 것이다. 거기에 <신여성> 등에 등장하는 신문물을 접했던 ‘모던뽀이/모던껄’의 이야기들은 ‘역사학’에서 다룰 수 있는 범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 덕택에 한국의 ‘근대성’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길이 민족주의 사학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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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달리 대답하는 법’을 찾기 위한 시도이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
2010/02/13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민족주의 강박에서 벗어나도 뉴라이트는 비판할 수 있다)가 윤해동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교착’상태에서 드잡이로 끝나는 논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함이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정교화되고 ‘실증 자료’를 통해서 식민지 시기의 ‘근대성’을 입증하는 이들에게 속속들이 ‘민족주의 사학’이 ‘발리고’ 있는 상황에서 달리 우익의 ‘뉴라이트’ 비판을 위해서는 결국 ‘근대성’이라는 것들을 달리 성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NL 혹은 주체사상파의 인식 틀에서 ‘식민지 반자본주의’의 이전 형태인 ‘식민지’의 ‘근대성’ 혹은 ‘자본주의의 등장’에 대해서 명료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공간에서 ‘근대성’ 혹은 ‘자본주의’의 요소들이 등장했다고 말하면 경기를 하곤 한다. “어디 식민지에서!”하면서 뒤로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상을 식민지 공간에서 경험했던 사람들의 서사는 ‘근대 문물’을 체험하고 ‘근대 대중 문화’를 체험했던 그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뉴라이트 사용후기 – 8점
한윤형 지음/개마고원

윤해동의 이러한 언급은 어떤 방식으로 ‘식민지 시대’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통찰이다.

합리성은 무의식에 내면화하지만 식민화된 지배방식에는 강력하게 거부하거나 저항한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식민화’로서, 탈식민이 탈근대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식민 지배하에 형성되는 근대적 합리성은 무의식 속에서 내면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식민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분열 증상을 나타낸다. 나는 이것을 ‘무의식의 식민화’로 표현했다. 요컨대 식민지적 분열현상은 식민 지배가 총동원 체제로 전개되는 식민 말기의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식민지민의 의식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현상인 것이다(p.30).</p>

내지연장이라는 정책적 기조는 기본적으로 내지(즉 제국주의 본국인 일본)에서 실험된 근대화정책들을 식민지에서도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 첫 번째는 그 근대가 어떤 근대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 근대화의 3각 동력은 자본주의 산업화의 달성, 근대국가의 건설, 제국주의의 실현이었다. (……)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식민지에 ‘내지’의 정책이 연장될 때 그 정책이 그대로 식민지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근대적 정책에 대한 식민지의 저항도 문제가 되지만, 식민지는 일본과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서의 정책은 실험적 성격을 가진다(pp.33-34).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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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많은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은 몸으로 ‘근대’를 느꼈으나, 동시에 ‘식민지’를 체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분열 증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어법은 동시에 조선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경영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도 가능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근대화된 방식의 문명’을 체험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식민지’ 경영에 있어서 ‘전근대화된 방식의 식민지’의 양상을 활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수탈’ 혹은 ‘착취’를 위해서 그러한 식민지를 ‘근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양가적 요구 때문에 늘 ‘정신분열’ 상태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근대화’시켰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을 민족주의자들보다 더 혹독하게 제국주의로서의 ‘일본’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화’ 자체가 ‘식민지 경영’의 필요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방식의 비판은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식민지 공간의 모든 것들을 균질화시킴으로써 제국주의 국가 안의 모든 것들 역시 균질화시켜 버리고 결국 투쟁의 전선을 ‘일본 vs 한국’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 이미 많은 생애사 혹은 구술사가 밝혀내듯, 가장 ‘평화’로운 시기로 간주되는 공간에서도 가장 ‘억압’적인 양태들이 발견되고, 가장 ‘억압’적인 식민지의 순간에서도 개인의 차원에서의 ‘평화’를 발견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계급과 젠더의 분할을 따라서 달리 재편된다. 이는 단순히 “매국노 5적”과 나머지 ‘선량한 조선 민중들’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식민지 공간 안에서의 분절을 민족주의에서 탈피함으로써 좀 더 정교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저항 민족주의를 기저로 구성된 국사는 식민지기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을 억압하고, 모든 것을 민족의 기억으로 수렴시킨다. 그 때문에 다양한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은 모두 민족의 기억, 국민의 기억으로 동원된다. 이를 ‘기억의 국민 총동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억압된 기억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표명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내면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언표상에서는 기억의 ‘민족적 통일’이 저항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p.42).</p>

그렇다면 일제 지배하의 ‘수탈’이란 무엇인가? 근대화와 차별화가 동시적으로 발현하는 상황을 수탈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바로 ‘규율 권력’의 이중성을 말한다. 식민 지배하에서 미시적인 생체 권력은 지속적으로 작동했다. 이것은 욕망과 규율화의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대상으로서 교육과 징병은 일제하 조선에서도 원활히 작동하고 있었다. 식민지 회색지대가 근거하는 지점은 바로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곳이다. 식민지 회색지대라는 개념은 이항대립의 도식 속에서 말소되어버린 식민 지배하의 일상생활이 작동하는 광범위한 지대를 복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지, 말 그대로 생활의 회색지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p.55). 

‘근대’란 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란 일종의 제도이기도 하고 동시대와 연관된 생활양식, 태도, 자세 등 일종의 에토스이다. 또한 근대의 에토스란 도구적 합리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월러스틴의 분류에 의하면 양면적 근대의 한쪽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 중 ‘기술의 근대’가 바로 그것이다. ‘기술의 근대’는 외부 강제에 의한 산물이지만, 식민지민의 열망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성’은 ‘잡종성'(혼종성)으로 표현되며, ‘식민지 근대’가 잡종화할 운명은 ‘제국주의 근대'(일본)의 잡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p.79).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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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방식의 ‘민족주의’라는 교의의 내파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성찰과 ‘탈근대적’ 방식의 인식 체계로의 전환을 당연스레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체계의 전환이 ‘친일파’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누히 지겹지만 언급될 필요도 있겠다. 우리는 민족주의에서 탈피함으로써 더욱 더 혹독하게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 일본 내의 ‘비판적 지식인’ 혹은 ‘혁명 그룹’에 대한 서사를 통해 그들이 꿈꾸었던 ‘제국주의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고, 조선 내부의 ‘근대적 대중’들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저항점을 만들고 식민지 체제에 어떠한 ‘동의’를 만들어 주었는지를 살필 수도 있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김구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모두를 ‘부역자’로 몰아붙이곤 했지만, 동시에 그 ‘부역자들’은 다른 한 편 파업에도 참여하고 신문도 보고, 어느 순간에는 연극도 보고 소작쟁의도 하고 라디오도 보고 하는 ‘일관되지 않고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주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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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구와의 대화 과정에서 박정희가 ‘만주국’에서의 경험 때문에 <경제개발5개년>을 수립했다는 주제를 정치학과 대학원생이 논문으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주국’은 실험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이고 또한 ‘사회주의적’인 요상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서 박정희가 ‘뭔가’를 봤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은 또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고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로 느껴지지만) </p>

하지만 민족주의 사관에서 빠져나와서 살펴보자면, (그 친구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박정희가 그걸 봤다고 해서, 만주국이 실험적인 ‘개발’의 양상을 봤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경제개발5개년>의 모토가 되었다 한들 박정희를 비판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민족주의 사관에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근대’에 대한 막연한 긍정 혹은 예찬이 아닐까. ‘근대’는 좋은 것이니까 박정희 같은 ‘악당’이 할 수 없는 것, 일제가 해줬을 리 없는 것. 이런 방식. </p>

어쨌거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지 5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품절이다.. 역시… ;;) </p>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10점
윤해동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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