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이라는 판타지 해체하기 – 남성성과 젠더(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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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젠더 – 10점
권김현영 외 지음/자음과모음(이룸)

2010/12/2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남자로-식별되는-남자men-identified-men로 여성주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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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의 난처함 중 하나는 바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든 여성주의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대화 속에서 ‘남자’로 환원되는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남자들은~” 혹은 “남성은~”이라는 말은 가부장제라는 말과 호환되는 말로 쓰이곤 했다. 물론 가부장적 권력 안에서 남성이 어떠한 존재로 어떻게 호출되며, 그 효과가 여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부인할 생각은 없었고 나 역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자’로서 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길은 늘 멀기만 했다. 늘 ‘남성’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누군가 여성주의를 배우는 내가 여성주의자냐고 물어봤을 때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발을 빼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급진주의) 여성주의가 전제하는 구도 안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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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강박에서 벗어났던 것은 몇 명의 ‘다른 방식’으로 남자-남성-남성성을 사유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들을 접하고 나서부터 였다. 이야기는 전도되었다. 아무리 가부장제가 남성 주체를 생산하기 위해 애를 쓰더라도 개개인은 그러한 남성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지속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마초’의 행태를 따라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모습이 보편적인 남성성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보편적인 남성성의 조건이라는 것 자체도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형상일 따름이다. 즉 달리 말해 늘 생각했던 ‘남성 지배’의 신화는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이 말은 굉장히 강력하다.

한 편에서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제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반영으로 전제되는 남성성에 대해 너무나 과장해놓은 교의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고, 그러한 상대화된 남성성과 남성에 대한 이해는 지금 거대한 ‘전략적’, 그리고 구체적 국면에서의 ‘전술적’ 판단이라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분명 지금 여기 ‘지배적 남성성’ 혹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형상이 떠다닌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적’이라고 판단할 경우 해체의 약한 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한 편에서 이러한 전술은 기존의 ‘강력한 가부장제’가 아니라, ‘강력한 남성성’이 아니라, 그러한 남성성과 가부장제에서 ‘이탈’하거나 ‘경계선’에서 표류하고 있는 존재들을 드러내는 과정. 즉 페미니즘이 즐겨쓰는 방법론인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통해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간의 ‘차이’가 젠더 이론에서도 쟁점이 되었다면, 남성들간의 ‘차이’ 역시 젠더 이론을 통해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가부장제’와의 성전(聖戰)을 방불케 하는 비장한 전투의 방식에서의 ‘퇴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언제까지 존재하지도 않는 ‘남성성’을 구현하는 완벽한 “마초를 죽이자는” 방식으로 대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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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젠더』는 이러한 새로운 눈으로 남성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간명하면서도 힘이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다른 눈’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자.

남성성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과거로서의 역사적 산물이라기보다 인간의 행위와 실천에 대한 선택적, 모순적, 단절적 기록으로서의 역사다. 남자와 남성성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한 과정에 개입된 구성적 권력과 개인들의 순치, 우연성, 저항이 드러나게 되면 남성성의 보편적 지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우리는 남자와 남성성을 솜씨 좋게 연결시켰던 이음매들을 다시 분절하고 그 사이사이에 감춰지고 누락되었던 불협의 소리들을 복원하여 남성성의 역사를 차이 속에서 다시 쓰고자 했다(권김현영, “서문”, pp.10-11).</p>

보이지 않던 젠더 구조를 드러냄gendering과 동시에 그러한 젠더 구조가 (일시적이고 우연한) 역사적 산물임을 강조함으로써 젠더를 해체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즉 분석 범주로서 성차는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남성성의 위계와 그 구성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유동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모순적 과정이다(정희진, “1장 – 편재遍在하는 남성성, 편재偏在하는 남성성 “, p.17).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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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의 1장과 2장은 대체로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론 안에서 ‘틈새’를 찾아 남성성을 연구하는 방법론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리고 뒤의 3장~5장. 루인과 나영정, 한채윤의 이야기는 지배적 남성성에서 ‘이탈자’로 존재하는 이들을 통하여 남성에 대한 관념을 재구성하거나 ‘남성’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이들의 ‘남성성’을 살핀다. 즉 한동안 전도유망하게 대두되었던 ‘여성의 남성성 female masculinity’라는 관점들을 통해 바라보거나, 혹은 성전환자 남성FTM(Female To Male)의 눈, 또는 레즈비언 부치(레즈비언 중에서 ‘남성 역할’을 한다고 간주되는 이들)의 눈의 등장을 통해서 살펴본다.

남자가 아닌 자들(NOT MEN)이 ‘남자THE MEN’의 몫을 요구하고, 남자들(men)의 모습이 ‘남자THE MEN’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고 계속 미끄러져 내린다.

House-Hus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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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남성성 연구를 위해서, 특히 한국의 남성성 연구를 위해 필요한 쟁점은 이러한 페미니즘 렌즈의 ‘남성’을 바라보는 잣대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즉 ‘서구 중간계급 부르주아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 민족성, 인종, 계급이 교차하고 있는 곳에서도 작동하는 가의 쟁점이다. 이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쟁점이기도 하다. 특히 ‘식민지’를 경유한 한국의 남성들을 기존의 페미니즘의 이론으로 조형할 수 있을까? 예컨대 식민지의 ‘모던뽀이’ 들의 남성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무력에 대한 추구, 강자에 대한 의존성, 여성에 대한 보호자 의식이 없는 남성성은 하나의 일관된 남성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성학을 포함하여 기존 지식 체계에서 여성들 간의 차이는 젠더 문제로 다뤄져왔지만, 남성들 간의 차이는 남성의 경우 성별 범주라기보다는 성별을 초월한 사회적 범주라는 성차별 의식에서 계급이나 인종과 같은 권력의 문제 그 자체이지, 남성들 간의 차이가 젠더와 관계되어 있다는 인식은 부재했다. 즉 남성과 남성의 차이는 남성이 생산하고 결정하지만, 여성과 여성의 차이는 여성이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과 남성의 차이를 성별 문제로 인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정희진, p.26).

봉건 질서를 유지하게 했던 신분제 이후의 근대에 남자가 된다는 것은 여자와의 차이를 통해 등장하는 동시에 여자를 타자의 위치에 두고, 남자들간의 이상적 동등성을 구현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적 남성 주체의 구성은 성별화된 계기를 통해 등장하고 다시 그 성별이라는 차이를 방축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런데 여자가 타자의 자리로 가지 않고 남자들 간의 이상적 동등성이 구현되기 어려울 때 이 근대적 남성 됨의 기획에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식민지 조선 남성의 처지를 놓고 볼 때 근대적 의미에서의 남성이 된다는 것은 여자와의 차이와 남자와의 동일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모두 난관이었다(권김현영, 2장 – “남장여자/남자/남자인간의 의미와 남성성 연구 방법”, p.46).

내가 군대 연구를 함에 있어서 시원적으로 ‘씩씩한 남자’로 등장하는 개화파 이후 ‘지배적 남성성’, 군인의 모습 역시 이러한 격자로 보자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균질된 군사화된 주체, 그리고 서구의 ‘남성부양자’ 모델로 남성들을 읽어내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제 존재했던 ‘남성들’과는 전혀 다른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규준으로서의 ‘지배적 남성’을 만드는 것은 국가-자본의 목표였고, 이는 곧바로 관철되어 ‘새로운 주체’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저항, 공모, 협상이 공존하는 ‘과정’으로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군사주의 비판에서 조형하는 ‘남성성’은 훨씬 더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서 ‘상대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노자는 ‘지배적 남성성’을 조형하는 방식으로 ‘씩씩한 남자 만들기’를 추적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지금까지 그 경향을 투과시키는 오류를 저지르는데, 이는 급진주의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던 연구들의 한계와 맞닿는다(
2010/04/0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박노자가 추적하는 남성성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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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6장 엄기호의 논문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은 지금의 남성성의 주소를 확인시켜주는 글이다. 다른 글들이 ‘남성성’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거나 내부의 ‘타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폈다면, 이 글은 ‘마초’ 혹은 전형적인 한국 남자들의 모습을 살핀다. 실은 이 논문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저자 중 한 명인 최태섭의 논문 “후기 근대 역사의 종말 이후 주체성의 양식: 잉여, 속물, 오타쿠”(정확한 제목은 아니다…

‘노동의 세기’가 종료되고 더 이상 노동생산성에 의해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 운용 방식인 ‘유연화’의 상황에서 계속 잉여로 소환되는 남자들을 엄기호는 ‘찌질이’로 호명한다. 예전과 같은 연애-혼인의 메커니즘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남자들의 몰락 때문에 점차 난해해지게 된다. 이러한 ‘몰락’은 사실은 이제 ‘평등’한 관계를 여성들과 맺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오’가 빠지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엄기호는 주장한다). 이들 중 그나마 버티고 있는 이들을 ‘속물’이라고 엄기호는 표현하고, 이는 김홍중의『마음의 사회학』에 등장하는 ‘속물성’의 추구와도 맞닿는 남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애를 포기한 남자들의 대응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연애 자체, 혹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를 포기하고 영원한 ‘자기-배려’의 세계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를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태섭이 차용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으로 하자면 ‘오타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연애는 거치장스럽다. 자기-몰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에는 붕괴된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괴물’은 주로 디씨인사이드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과장된 마초인증’을 통해서 ‘시민권’을 획득한다. 그리고 포르노 혹은 ‘야동’, ‘야사’에 대한 정보와 짤방을 공유하면서 ‘여성 교환’의 의례를 치르고 자신들의 연대를 과시한다. 군가산점제 논쟁 등이 벌어질 때마다 ‘칼’을 뽑고 몰려가서 ‘한탕’을 하는 습관 역시 이러한 공간에서 형성된 ‘남성연대’ 덕택이다. 개별적으로는 무력하고 붕괴된 비정규직의 삶을 살면서, 이들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이러한 ‘괴물’들이 출몰하는 온라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엄기호의 진단은 지금 벌어지는 남성들의 ‘과장된 남성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어떠한 방식으로 무력하고 가능한지에 대한 통찰력있는 진단으로 보인다.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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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분석들에서 나는 ‘담론’ 층위 말고,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했던 바 그 이데올로기 혹은 담론의 ‘물질성’의 차원 역시 좀 살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이러한 ‘지배적 남성성’을 추동했던 ‘동의 기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과거의 식민지 시대의 ‘억눌린 남성성’을 진단할 때에도, 산업화시기 ‘씩씩한 남자’의 시대를 진단할 때에도, 또한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을 살펴볼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모두는 지배-담론의 효과, 그리고 억압기제의 양상은 잘 살펴보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담론-이데올로기적’ 분석으로만 가득차 있고. 동시에 ‘동의’라는 측면 역시 간과될 때가 많아 보인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든 남성-주체들을 ‘바보’로, 즉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존재로만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넘어선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우리가 상상하는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며, 실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남자다움’은 구체적인 남성들에게 ‘규준’되고 그 규준이 되게하는 메커니즘은 ‘물질성’을 토대로 작동한다. 계속적으로 ‘결여’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구체적 남성들의 ‘남성성’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신자유주의가 되어버려 ‘개체성’의 수준으로 계속 분화하고 온라인 공간에서만 ‘출몰’하는 이 남성성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만 남자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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