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의 문화비평… 그리고 신경제·신자유주의 『디자인 멜랑콜리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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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멜랑콜리아 – 10점
서동진 지음/디자인플럭스(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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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든 생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문화비평 이렇게 하는 거다.”
그런데 또 꼬리를 물게 하는 생각 하나. “이렇게 쓰면 누가 읽지?” 정답은? “인문학/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원생.”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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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빨려들듯 읽다가 정거장을 몇 번이고 놓쳐버렸다. 이틀 동안 다니면서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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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정치학’ 그리고 ‘시민권’, ‘반란의 정치학’으로 대표되던 서동진의 ‘개종’ 혹은 ‘전향’이 시작된 것은 이미 1997년께의 일이다(프레시안 인터뷰). 그는 ‘자유주의’라는 ‘불장난’을 그만두고 다시 ‘민주화의 한계’로부터 성찰을 시작한다고 고백한 바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다. 그는 5년 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쏟아낸 작업물들은 깨나 많다.)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시절의 서동진, 그리고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의 서동진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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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멜랑콜리아』는 이미 전통적인 문화연구의 신그람시주의적 설정에서 벗어난 서동진이 디자인과 신경제를 매개로 하여 디자인플럭스에 썼던 글들을 모아낸 책이다. 서동진은 디자인에 대해 ‘문외한’인 자신이 디자인에 대해 다소 까칠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비평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앨리스’라는 필명을 썼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책의 글들은 디자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미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좀 더 심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신경제의 회로를 타격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타격하는 방식은 맑스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정통파’로 간주될 수 있는 채만수 같은 사람과 정 반대의 방식으로 여전히 시크하고 댄디하다. 그는 시크함과 대디함 그리고 반문화적 속성들에 대해서 규탄하지만 자신 역시 그 결계에서 빠져나오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나오지는 않는다.) 난 거기에 대해서 전혀 불만이 없는 편이다. 자신 역시 그러한 ‘문화연구 꾼’ 중 한 명이었음을 지속적으로 고백하면서 거기에서 쉽사리 ‘청산’ 하는 것이 아니라 짚어나가는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 인정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맥락을 고려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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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글들에 대해 일일히 비평하는 것은 지금 내게는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그리고 특별한 비판의 언어가 내게는 아직 없다. 내가 보기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주 좋은 비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진’ 말들을 좀 풀어놓는 것으로 소감을 마치는 게 좋을 듯 하다.

우리는 반항과 거부, 부정 따위의 개념을 내세우며 자신이 인습과 규칙, 주류에 맞서서 살고 있다고 잘난 체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확신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고작해야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따위에 불과하였다면? 프랑스의 유명 사회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퍼뜨리는 이데올로그에 다름 아니었다면? 자신이 기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는 발견 이후에 그저 가슴이 아픈 정도에 그친다면, 그는 기만당할 것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한 번도 자신의 자유를 믿어본 적이 없는 우울증 환자였을 것이다(p.145).</p>

웰빙이라는 트렌드가 소비문화의 황금률로 자리 잡으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들이 넘쳐난다. 물론 남들은 굶어죽는데 저 혼자 배불리 살겠다는 못된 심보로 웰빙을 폄하하는 것은 시대착오임이 분명하다. 20대 80의 극악한 불평등의 사회를 호도하는 나쁜 이데올로기의 모범으로 웰빙을 규탄하는 것은 편협할 뿐더러 잘못된 생각이다.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믿음과 기대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 퍼뜨린 선동이 아니라 오랜 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려 했던 수많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의 신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삶을 향한 욕망,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린 테일러주의적인 산업 세계의 악몽에서 해방되려는 의지, 표준화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여정을 ‘탈영토화하려는’ 꿈이 바로 ‘웰빙에의 의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웰빙에의 의지를 권력이 우리의 순박한 욕망을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새로운 계책이라고 규탄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짚은 것이다(p.204).</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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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서 난 최종적으로 서동진보다 좀 더 ‘정치경제학’적인 지식의 건축물을 짜는 것이 좋겠다라는 전술적 결단은 내렸다. </span>2년 전 그가 왜 ‘사르트르’를 다시 읽는다 했는지 이해가 되지만, 내가 갈 길은 좀 다르리라는 생각도 한다. ‘주체화’와 나는 좀 먼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쓰기 방식의 ‘흡인력’은 탐이 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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