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 2030 콘서트] 위기에도 의연한 사람들

원래 제목을 잘 찾지 못해서 담당 기자한테 부탁했는데 ‘위기에도 의연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나왔다. 원래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50대 이상의 ‘억척스러움’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소비 자본주의적 주체’로 살 수 없게 된 내 또래들부터 ‘억척스러움’은 익힐 테지만, ‘협력’이나 ‘나눔’, ‘보살핌’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50대 이상의 그러한 것들을 몸으로 익힐 수 있는지에 대한 바였다. 제목을 봐서는 정확하게 딱 떨어지지는 않고 결과적으로 망글이 되었다. 물론 망글이 된 건 내 글의 문제가 절대적일 것이다. 어쨌거나.

[경향 – 2030 콘서트] 위기에도 의연한 사람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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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무상 급수’가 쏟아지다 소강상태이던 어느 날, 면목동 동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집 ‘수해복구’를 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부모)의 집은 2층 단독. 반지하방은 세가 잘 나가지 않았다. 방이 좁았던 친구가 엄마를 졸라서 거기 살다가 물난리를 겪은 것이다. 휴가철임에도 돈이 없어 빈둥거리던 서른살 친구들이 모였다. 미션은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밖에 내버리는 것이었다. 갖가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엔 친구의 역사가 있었다. 어렸을 때 탄 상장들, ‘월부’로 엄마가 구입했을 ‘학습대백과사전’ 같은 책들과 고등학교 때 보았던 ‘정석’ 등. 뭔가 빼곡하게 꽂혀 있던 책장은 흠뻑 젖어서 썩어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책들은 곰팡내를 풍기며 축축하게 붙어 있었다. 컴퓨터 본체, 모니터와 흑백 프린터도 있었다. 가져가도 되냐고 묻자 물에 잠겨 쓸 수 없을 거라 이야기한다.

짐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몸으로 일을 안 해본 우리는 뭐든 서툴렀다. 그리고 좀 지나 짐을 빼놓는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허름한 옷차림의 아저씨들이 와서 “버리는 거요?”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아저씨들은 ‘쓸 수 없을’ 컴퓨터 등을 잽싸게 들고 간다. 쓰레기 잘못 버린다고 문제 삼을까봐 긴장한 우리는 ‘샌님’ 같은 생각을 한 거다. 좀 지나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났다. 할머니는 휴대폰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여기 ○○교회 앞인데 좋은 게 많아!” 할머니는 아예 우리가 내버리려는 책들을 직접 받아 오토바이에 능숙하게 쌓아올린다.
할머니에게 벌이가 짭짤한지 물어보았다. 오토바이 기름값은 할 거란다. 고철이든 전선이든 뭐든 가져간단다. 기름값을 하고 나머지는 동네 ‘노인네’들 챙겨줄 거란다. 할머니는 연방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채갈까 긴장하는 눈빛도 역력하다. 이윽고 봉고차 한 대가 도착하고 ‘구르마’도 등장한다. 말만 하면 당장 집에 들어와서 다 집어 갈 기세다. 좀 지나 어떤 아줌마의 등장. 아줌마는 침착하게 남은 책들을 살피다 멀쩡한 책 한 권을 ‘득템’했다(건졌다). 곧 아줌마는 주저앉아 ‘청소년을 위한 수필집’인가를 가로등 불에 읽는다.
뉴스에서는 물을 퍼내는 장면이 수해의 고통을 말해주지만, 다시 삶을 제 손으로 일궈야만 하는 사람들의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구청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려면 스티커를 사서 붙여 버리라고 공지한다. 쓰레기를 벌이로 생각하거나 고쳐서 쓰는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몸짓과 책 읽는 아줌마의 이야기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청년들의 삶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마냥 느끼게 된다.
청소년기에 소비를 통해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 생활을 익혔던 친구들은 이제 소비할 돈이 없는 상태다. 중산층이 붕괴하는 마당에 부모들은 빈둥대거나 변변치 않은 직장에 다니는 자식에게 돈 주는 데 힘이 부친다. 친구들 몇몇은 여전히 노력하면 많이 벌고 폼나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녀석들은 ‘로또’나 ‘연금 복권’을 기대한다. 큰돈은 ‘인생역전’이 되어야 만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의 시대에 안정적인 돈벌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풍요롭지 못함은 청년들에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친구들은 돈 대신 몸으로 때우는 일에 익숙해지고 손쉽게 뭘 사거나 버릴 수 없게 되고 있다. 몸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일일 테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상황들에 위축되고 소심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축되지 않고 나누고 베풀 수 있는 몸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