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백의 그림자(2010)

백의 그림자 – 10점
황정은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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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친구의 소개로 황정은을 알게 되었다. 소설책을 읽은 건 거의 1년 도 넘는 일인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 오쿠다 히데오, 양대 무라카미 씨 등의 일본소설을 주로 읽는 내 또래들에 비해 나는 30대 중반 이상의 취향을 따라서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그랬던 건 아무래도 심윤경의 소설이나 공지영의 소설 혹은 박민규의 김연수, 김사과 등의 소설을 좋아했던 취향 때문이었을 것 같다. 난 평단의 평가 따위는 잘 모르므로.. (그런 의미에서 뒤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을 읽은 것은 실수다… 말릴 것만 같다..) # 『백의 그림자』 를 읽는 내내 1995년인가 아빠와 함께 세운상가에 갔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용팔이'(용산의 전자상가 판매상들)들이 익숙한 나와 달리, 아빠는 뭔가 전자제품을 사야한다고 생각하면 집의 백색가전이든 컴퓨터이든 상관없이 세운상가를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느긋해보이면서도 달변인 아저씨 한 명과 아빠의 협상이 재미있었다. 기억나는 풍경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 중 한 곳에서 아빠가 괜히 전자제품에 해박한 척을 해 대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가게에 놓여있던 재떨이에 재를 떨고(당시만 해도 담배 피우는 게 아무 데서나 일상적이었다), 가게 주인은 AIWA와 SONY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한다. 아저씨는 빡빡 깎은 머리에다가 어리바리해 보이는 중학교 1학년짜리 내게 이것저것 워크맨을 보여주면서 기능을 설명했다. “이건 라디오도 되고 녹음도 되고, 이건 플레이만 되는 거야.” 난 이것저것 기능이 다 되는 걸 바랐지만 아빠는 라디오 많이 들으면 공부 안 한다고 핀잔을 주고, 저렴한 플레이만 되는 AIWA 워크맨 하나를 내게 집어주었다. 그리고 나오면서 후미진 골목에 있는 떡볶이 집에 가서 오뎅 한 개 씩을 먹고 아빠와 나는 50번 버스(지금의 262?)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소설가 황정은은 아빠가 세운상가에서 점포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래서 디테일 묘사가 발군일 것으로 추정은 된다. 그리고 신형철의 해제에 나온 것마냥 세운상가의 모든 장소들에 대해서 이름을 붙여주고 생략하지 않는 묘기도 부린다. 게다가 주인공 은교와 무재의 끈적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끌어당기는(밀지 않는다) 그들의 연애도 재미를 준다. 늘 섹스 신이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영하의 소설처럼 댄디한 스타일을 드러내며 등장하거나 김진명의 소설처럼 비장하게 나타나는 그런 소설들에 지친 나머지 나는 외로움에 지쳐 전화 통화를 기다리고, 전화 받아가지고는 썰렁한 소리와 노래 해달라며 조르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너무나 신선하다. 그들은 따뜻하다. 그들은 착하지 않지만 순진하지도 않지만 특별히 저항하지 않고 무기력하다. 무기력하되 그들은 특별히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뭔가를 공격하지 않지만 기억을 소거시키지 않고 떠오르는 모든 말을 전한다. 마치 인류학자와 어떤 아낙이 만나서 그녀의 생애사를 들려주듯이.

망각에 대한 소극적 저항!</p>

거기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에 끌려가, 홀려서 놓아버리지 않고 지금의 일상을 버티면서 살아가는 힘. 그게 아마 일상의 악다구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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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짠한 이야기는 바로 누가 뭐라 해도 오무사의 이야기다. 전구가게 아저씨의 이야기.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슴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pp.94-95).</p>

침침하게 머리 위를 밝히고 있는 알전구 불빛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님이 찾아와서 어떤 종류의 전구를 달라고 말하면 대답도 없이 서서히 걸상을 밀며 일어났다. 서두르는 법 없이 그렇다고 망설이는 법도 없이 선반의 한 지점으로 부들거리며 다가가서,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아닌 골판지나 마분지 상자들 틈에서 벽돌을 뽑아내듯 천천히 상자 하나를 뽑아내고 그것을 책상으로 가져와서 일단 내려 둔 뒤엔 너덜너덜한 뚜껑을 젖혀 두고, 이번엔 다른 선반으로 걸어가서 손바닥만 한 비닐 봉투 한 장을 가지고 책상으로 돌아온 뒤, 시간을 들여 정성껏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들어 둔 다음에, 오른손을 상자에 넣어서 손톱만 한 전구를 한 웅큼 쥐고 나서, 왼손에 들린 채로 대기하고 있는 봉투 속으로 한 번에 한 개씩, 언젠가 다른 손님들 틈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재미있게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 떨어뜨렸다(p.103).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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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p.104)라는 생각을 주인공 은교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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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서울’, ‘청계천’, ‘한강 르네상스’, ‘4대강’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토악질 나오는 까닭을 가장 그럴듯하게 황정은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아무도 비난하지 않지만 읽고 있는 우리는 개발’시정’, ‘토건국가’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 어딘가에서 뒤틀리는 심정을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가동은 장막에 둘러싸인 채로 밤을 틈타, 별다른 소리도 없이 분해되었다. 어느 날 수리실로 배달된 신문을 펼쳐보니 첨단 기술이 동원된 소음 없는 공사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십삼층자리 건물이 해체되는데 그토록 조용하다는 것이 이상하고 수상해서, 새벽까지 수리실에 남아서 일하는 여 씨 아저씨에게 물어도, 특별한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보면 밤사이 위로부터 한 층씩 사라져서 장막이 한 단씩 내려와 있었다.

마침내 가동을 밀어내고 남은 자리엔 재빠르게 공원이 조성되었다. 
오무사는 이 과정에서 다시 사라졌다(p.109).

사실 우리는 용산에서 들려왔던 ‘절규’의 목소리를 알지만, 거기는 행복했던 경우다 외려. 우리는 ‘별다른 소리도 없이 분해’되고 있지 않나. 지금 개발의 전사들은 오무사 할아버지처럼 뜨문뜨문 차분하게 침착하게 움직이는 나름의 속도를 가진 사람들을 ‘별다른 소리도 없이 분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두 알 법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음소거 시켜놓고 일은 진행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는 한 칸 단신으로도 개별적인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우주가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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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은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저항한다. 은교는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저항한다. 책에 등장하는 모두는 당장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생군상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속물스러운 삶을 지향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욕구도 없다. 모두가 ‘휘향찬란한’ 삶을 바라지는 않는다. 시크하고 쿨하며 현대자본주의의 표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다수였던 적도 없다. 다만 지배담론이 비추고자 하는 모습일 따름이다. 이를 위해 한 편에서는 그 표준적인 삶을 선전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별다른 소리도 없이’ 나머지들을 ‘분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싸움은 지배담론을 엎어버리는 과정(1)과 지배담론 바깥에 있는 목소리의 복권(2)의 중첩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목소리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이것을 듣고 울려퍼지게 할 수 있어야 더 이상 ‘분해’를 막을 수 있다.

삶은 살기 위하여 늘 나름의 움직임을 보인다. 무기력해 보이는 형상과 도드라지지 않는 삶의 태도의 유지는 그 자체 만으로도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 개인에게도, 그리고 주위의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끼리의 유대에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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