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 중 백미 – “베트남전 – 우리에게 무엇인가?” 2002년 7월 6일

출처: http://koreanliterature.kaist.ac.kr/leesangkyung/literature/article_73.htm

21살 때 정말 나름대로 ‘베스트 논객’끼리 100분 토론에 나와서 챙챙 거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 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어쩌다가 찾아냈다. 난 당시 사회자가 故 정운영 선생인 줄 알았는데 유시민이었군.

리영희, 한홍구, 지만원, 채명신

지금의 지만원과 채명신이 하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참 그 때만 해도 ‘극우파’들이 얼마나 기가 죽어 있고 말빨에서 딸리며 조직이 혼비백산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요새 지만원의 막말과 채명신의 백선엽化를 생각해 보면… 참.

워낙 리영희 선생이 디테일이 세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토론의 하일라이트는 아마  김진선 전 주월 맹호부대장의 발언인 것 같다.

리영희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립다. (물론 요새 이런 투로 이야기하면 꼰대에 계몽주의자에 온갖 욕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꼭 이북 출신이 아니라도 호남 출신 정치 덕후 50대 이상 아저씨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뭐 그래도 이렇게 ‘올바르게’ 이야기하는 대쪽같은 지사들도 있어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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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100분 토론 : “베트남전-우리에게 무엇인가”
(방송 : 2002년 7월 6일)

 

유시민 / 사회자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MBC 100분 토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새롭게 100분 토론 사회를 맡게 된 유시민입니다. 오늘 토론의 주제는 예고해드린 바와 같이 ‘베트남전 우리에게 무엇인가’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는 벌써 2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에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수많은 고엽제 피해자와 부상자들이 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군인들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다는 그런 의혹이 제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트남 전쟁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는지, 아니면 외세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이었는지, 또 이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던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새롭게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과거를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인지, 우리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토론자 여러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나오셨습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나오셨습니다. 군사평론가 지만원 박사 나오셨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교수 나오셨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베트남전 – 우리에게 무엇인가

유시민 / 사회자
오늘 방청석에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들과 시민단체 회원들, 그리고 많은 대학생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생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의견이 있으신 분은 전화 02)784-3300번으로 전화를 해주십시오. 또, MBC 인터넷 홈페이지로 접속해서 함께 토론에 참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먼저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 저희가 준비가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자료화면
10년의 전쟁으로 3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냉전이 낳은 불행한 과거 베트남 전쟁,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1965년 10월 9일, 해병 2여단 청룡부대 탕란상륙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할 경우 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며 베트남전에 확전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존슨대통령과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을 논의하면서 미국이 모든 참전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 전투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당시 야당에선 이 파병이 대리전, 청부전쟁이라며 강력 반대했지만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전쟁 때 미국과 자유 우방에 진 빚을 갚는다는 명분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임무는 전투와 토벌작전을 병행하며 베트공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지역을 봉쇄하고 민간인 집단거주지인 전략촌을 베트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한국군은 73년 완전 철수할 때까지 연 31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고, 이 과정에서 전사자 5천여 명, 부상자 2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파병이 미국의 경제지원 확대와 월남전 특수로 이어져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경제적 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파병이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은 용병에 지나지 않았다 라는 지적도 있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북 베트남군에 점령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한국군 참전군인들의 피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만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을 포함한 부상자들은 대물림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나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있었다면 한겨레 21의 보도는 지난 6월 27일 고엽제 피해자들의 신문사 난입으로 이어져 잊혀져 가는 전쟁 베트남전을 다시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았다. 베트남전 참전 25주년, 한국은 베드남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우리에게 베트남 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총성은 멎었지만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시민 / 사회자 
자~ 지금 자료화면 보셨는데요. 우선 채명신 장군께 첫 발언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25년이나 지난 지금, 이 전쟁이 다시금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이 사태를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근데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참 어떤 때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어가고, 또 어떤 때는 착찹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지금 3만여 명의 우리 전우들이 고엽제에 의한 피해를 입고 신음을 하고 있는데 정말 이거 참상은 직접 보지 않고 겪지 않은 사람은 알 도리가 없지요. 팔 다리가 썩어져 나가서 잘라나가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자손에게까지 이것이 유전된다는 그것 때문에 모두 다 전전긍긍을 하고 있는데요. 그런 걸 보면서 정말 당시의 한국군을 지휘했던 사령관으로서 정말 가슴 아프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월남 참전에 대해서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 국민들이 왜 월남에 갔느냐, 왜 뭣 때문에 먼 남의 나라에 나서 우리가 피 흘려야지 됐느냐 하는 여기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안타까움을 느끼는데요. 누가 자기의 남편이나 자기의 자식을 머나먼 이역 땅에 가서 피 흘리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왜 갔느냐, 나 나 우리 참전용사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자의에 의해서 간 사람 없습니다. 전부 국가에서 보냈기 때문에 갔고, 국가에서 보내서 갔으니까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가 뭘 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을 했고, 우리가 이 기회에 국가를 위해서 뭘 해야 되겠느냐, 여기에 우리의 최선의 지혜와 노력을 다했는데 한데 그것을 요새 와서 양민학살이다, 이런 시각으로 비춰지는 것 정말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서 참담한 심정을 말씀하셨는데요. 리영희 선생님께서 좀 말씀을 해주시죠. 왜 이렇게 뒤늦게 이렇게 이것이 다시 논란이 되어야 했는지…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그것은 우리가 수많은 군인을 파병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낸 그 월남, 소위 베트남 전쟁이라는 거에 성격과 본질에 대한 인식이 잘못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다시 문제가 생겨나는 건데, 나는 우리 한국 국민들이 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전쟁이며 그 본질이 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나 선입감이나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에 입각해서 이해하면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 한국전쟁, 남북이 싸운 한국전쟁과 아주 다릅니다. 흔히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 6.25전쟁처럼 생각하는데 베트남 전쟁은 어느 국가가 어느 국가를 침공한 이런 그 침략전쟁이 아니라 원래는 그 베트남 인민이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그리고 민족해방, 85년에 걸친 불란서의 식민지와 5년 동안의 일본 식민지, 그리고 1945년에 해방돼서 호지명이 인도하는 세력이 이미 사실상의 통일국가를 선포하고 지배를 확고히 했어요. 그런데 불란서가, 불란서군이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얻어서 베트남을 점령하러 들어온 것이죠. 이를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국이 조선민족이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쫓겨나갔던 일본군이 다시 우리가 해방됐다고 생각하는 우리 땅에 일본군이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서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여기에서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오랜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독립운동 전쟁의 연속이지 어떤 침략전쟁이거나 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전쟁이거나 그런 것도 아닌 것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지금 우리 국민들의 베트남 전쟁이란 인식이 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와서 다시 논란이 된다 이 말씀이신데요,

지만원 / 군사평론가
25년 전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저는 월남전을 그렇게 늘 봐왔습니다. 월남전은 우리 한국 운명의 거울이다.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국민들은 외부에서 아무리 많이 도와줘도 결국은 망한다. 월남에서 승려들 학생들 데모 무지하게 했습니다. 부패, 싸우고자하는 의지 없었습니다. 월남군 총을 거꾸로 매고 다녔습니다. 이런 민족에게 미국이 도와주고 우리 한국이 도와주고 7개국이 도와줬는데 결국은 망했습니다. 그때 우리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 한국의 안보를 다지는 계기로 이 월남전이 부각되기를 상당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이 3만 2천 명 정도의 고엽제 환자인데 이것이 왜 중요하냐, 이 팔다리가 다 썩어서 진물이 납니다. 그런데도 우리병원에서는 그거 고엽제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 의료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다고 그것을 보고 그게 고엽제냐 아니냐 이렇게 또 눈물을 흘리게 하느냐, 그럼 그렇게 했을 때에 장차 그럼 전쟁이 났을 때 누가 나가서 싸우려고 하느냐. 국가는 국민에게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자식을 보내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데 불러서 불려 가 가지고 이런 병에 걸렸는데 몹쓸 병에… 그게 기냐 아니냐, 이러고 눈물을 흘리게 하니 장차 누가 가서 싸우겠느냐, 그래서 이런 것이 좀 부각됐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서러운 이런 순간에 있는데 갑자기 이게 한국군을 마치 짐승집단으로 월남에 가서 짐승집단 노릇을 한 것처럼 이렇게 갑자기 뭐 월남군, 베트남 학살 뭐, 이런 얘기가 이제 튀어나오니까 우리군인이라고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명예가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명예 아닙니까? 월남에 제가 처음에 갔을 때 총소리가 났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내가 여기 괜히 왔다, 이걸 물을 수 만 있으면 좋겠다, 물을 수만 있으면… 그건 누가 거기 가서 목숨을 바치고 싶겠느냐, 그런데도 그렇게 고엽제 그런 시달리는 그런 후유증들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다가 명예까지 짓밟혔다. 그럼 이게 어떻게… 나는 국가가 부를 때 나간 죄 밖에 없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이른바 양민학살 논란, 고엽제 피해에 대한 배상, 또는 보상문제는 조금 있다 강론적으로 다시 한번 다루기로 하구요.

김지만 / 군사평론가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부각이 돼야 되는데 그거는 부각이 안되고 갑자기 예를 들어서 한국군을 어떻게 구수정, 한겨레 21 구수정 특파원이 어떻게 했냐면 이게 광기와 야만과 용병이고, 이건 뭐 예를 들어서 상징적인 게 있는데요.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지는 살점과 뼈 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 다음에…

유시민 / 사회자
말하자면 현장취재의 일부인데요. 그것은 조금 있다가 다시 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베트남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느냐, 이 문제에 관해서 한홍구 교수가 하실 말씀이…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저는 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25년이 지났지만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것이 아마 우리 사회의 그 동안의 성숙도를 반영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6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의 시절, 그리고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는 동안에 우리가 사실 이 베트남 전쟁이 과연 어떤 성격의 전쟁이었는가. 남북 분단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동서냉전의 상황 속에서 이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참전했었던 전쟁, 그러니까 우리가 한 건 무조건 정당한 거다, 하는 그런 전제 위에 서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이제 세상이 참 많이 그 동안 변했습니다. 우리는 변화했다는 것 자체를 인정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 거죠. 옛날의 추억에만 매몰되어 있을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됐을 때 우리 사회가 진전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나서부터 상당히 우리가 그 동안에 몰랐던 사실들, 그리고 또 우리의 시각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을 했죠. 제가 어렸을 때 바로 베트남 전쟁의 그 파병이 되던 시기는 제가 6살, 7살 나던 그런 아주 어렸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 나름대로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 기억을 갖고 있지요. 갖고 있는데 그런 식의 호지민은 마치 그 시절의 구호처럼 때려잡자 김일성처럼, 찢어 죽여야할 그 악질 공산주의자로 우리는 듣고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그 월남전에 직접 참전을 했었던 한국군의 그 나중에 사성장군을 예편을 한 육군대장을 지낸 분이 써낸 수기에서 뭐라고 얘기했냐하면 ‘나는 지금 25년이 지난 다음에 호지민을 진정 존경하고 이런 지도자가 대한민국에 나와야 된다라고 생각하고’ 하는… 그런 그 아주 엄청난 인식변화를 가져온 겁니다. 적이지만 존경한다.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요. 지금 두 분은 참전경험이 있으신데 채명신 장군과 지만원 박사께서는, 당시 참전했던 분들이 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라든가 역사적 배경을 다 알고 가신 것은 아니 지 않습니까? 국가에서 명령이 와서 가신 건데…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그리고 또 문제가 뭐냐 하면은 가령 미국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평가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에 싸움에서 졌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근데 우리 진정한 문제는 뭐냐 하면은 베트남에 대해서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저는 거기에 더 문제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참전용사들께서 명예마저 짓밟혀서는 안된다 하는 얘기가 저한테는 참 가슴 아프게 와 닿는데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참전용사들 같은 경우 월남전쟁이란 게 무엇인가 하는 그 전체상을 그려볼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들이 현장에서 직접 체험했었던 이 전투경험이라는 게 생사가 달렸는데 얼마나 치열한 경험입니까? 거기에 밖에 매몰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월남전의 일선 지휘관, 월남전에 보낸 사람이 대통령을 18년을 했고, 그리고 월남전의 일선 대대장이었던 사람들이 연달아 두 번 대통령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엽제 환자들, 아까 지금 지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아무런 대우를 못 받았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지금 전두환, 노태우 두 전임대통령들이 다 월남전 대대장으로 갔다왔던 사람들이죠. 근데 채명신 장군 경우에는 어떠십니까?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맥나그라씨인데 이 분이 전쟁 끝나고 나서 자기 회고록에서 이 전쟁은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잘못된 전쟁이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일으킨 것은 2차 베트남전쟁 아닙니까? 1차는 프랑스하고 베트남사이에 45년부터 54년까지 있었구요, 2차가 64년부터 시작해서 75년까지 73년까지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국하고 베트남 사이에 있었는데 이 2차 베트남 전쟁, 미국이 주도했던, 이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만일에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군대를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 이런 말도 성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래서요 제가 왜 월남에 갔느냐 그걸 좀 설명해 드리겠어요. 왜냐 하면 거기 일부 국민들의 시선은 돈벌러 갔다. 뭐 용병으로 갔다. 여러 가지의 시각들이 있는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간 것은 우리 개인의 의사로 간 거 아니고 국가가 우리를 선발해 보냈어요. 그럼 왜 국가는 우리를 보냈느냐. 이걸 이해하려고 할 것 같으면 우선 그 당시에 우리가 대통령으로서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던 가장 절박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병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는 것은 박 대통령이 보내고 싶어서 어떻게 보낼 수 없냐, 먼저 제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가게 된 거예요. 그럼 왜 박 대통령이 그런 제의를 했겠느냐, 여기에 그 당시에 60년대라는 게 동서냉전이 한참 첨예화된 그 시대가 아닙니까? 그 시절인데 그 여기 맥라그라 장관이 잘못 개입했다는 것 저도 100% 동감합니다. 왜 미국이 그런 식으로 뛰어들었냐 하는 데도 제가 전 동의를 안 했고, 또 우리 지 박사 말씀하신 난 월남에 가서 한 달 반만에 아, 이거 우리가 잘못 왔구나 하는 거를 제가 느꼈어요.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다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우리는 월남에 가지 않으면 안됐는데 그 첫째 이유는 월남에 간 것은 우리는 남을 도와주러 간다는 명목은 있었지만은 솔직한 얘기가 전쟁이라는 것이 국가의 이익 모든 지금 200여 개 국가가 자기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 지금 싸우고 있고 경쟁하고 있는 겁니다. 명분이야 근사하죠. 대의을 위해서 어떻고, 뭐 어떻고 하지만은 결국에 가선 자기국가의 이익이라는 것을 항상 우선하는데 그럼 그 당시에 우리가 군대를 왜 보내지 않으면 어떤 긴급한 상황이 있었느냐, 월남전은 미국이 동원령을 선포해 가고 전쟁을 선포하고 한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투입하는 군대는 현재 있는 군대 갖고 투입을 해야 되는데 구라파에 있는 미군은 나토군이니까 손댈 수가 없고, 그렇다면은 미국 본토에 있는 그 3개 사단, 특히 아시아 지역에 있는 한반도인 2개 미군 사단이 월남 투입의 제일 우선 순위였습니다. 제일 우선 순위였다구요. 그러니까 다행히 박 대통령이 군사전력을 아시는 분이고, 또 저희들도 그때, 저는 그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죽 연구하고 실무를 담당하던 책임자었습니다마는 불언간 한국에 있는 미국 2개 사단이 빠져나간다 하는 거는 군사적인 깊은 상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건데, 곧 빠져나간다, 그럼 그 당시에 한국에 있는 2개 미군 사단이 빠져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김일성이가 맨날 뭐라고 했냐 하면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은 잃은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다. 큰소리를 매일같이 쳤습니다. 왜냐 하면은 그 당시에 남북간의 군사적인 격차는 6.25때보다도 더 격차가 컸고, 그리고 막강한 중공과 소련이 배후세력이 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국제적으로 김일성이가 북한이 유리한 것은 그 당시에 전세계에 국제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발언권을 갖고 있던 것은 비동맹국가 그룹인데, 이 비동맹 국가 그룹은 잘 아시다시피 호지명과 그 다음에 스카르노, 네루, 그 다음에 낫세, 푸도, 이 다섯 사람에 의해서 이제 움직이고 있는 단체인데 이 사람들은 북한만 인정하고 남한은 완전히 배격을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약에 2개의 미군 사단 빠져나가면은 6.25때는 3일만에 우리 수도 서울 뺏겼지만은 이번엔 3일만에 부산을 뺏길 수 있는 그런 상태였다구요.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지금 채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국가안보를 위해서 미국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씀인데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불가피한 거예요.

유시민 / 사회자
이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한 가지만 확인하고 넘어가죠. 지금 두 분 말씀하시는 걸 제가 들어보면은 참전 군인 입장에서 말씀하셨는데 베트남 전쟁은 파병해서는 안될 전쟁이었다, 또는 파병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건 월남전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라구요. 나도 월남에 가서 한 달만에 이거 우리가 잘못 왔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왜냐 하면 아까 우리 지 박사가 지적한대로 이 공산주의자들은 부패를 먹고 자라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남이 그렇게 극도로 부패한 상태 하에서 과연 미국이 물자를 투입하고 돈을 투입하고 생명을 투입하고 우리가 피를 흘리고 도와주고 와가지고 과연 장래가 밝겠냐 하는 데서 저는 부정적인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그 당시에, 이건 지금 와서 처음하는 얘기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우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냈다는 것,

유시민 / 사회자
안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간 것이지…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러면 이왕 갔다면 우린 뭐해야 되겠느냐, 이게 이제 우리 국가이익을 추구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나는 거죠.

유시민 / 사회자
여하튼 그러면 말씀을…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저는 사실 미국의 압력을 2개 사단을 철수한 다음에 압력을 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현재 미국이 과연 그러면은 한국이 파병을 안 했더라면 과연 철수했을 것인가, 그 문제를 지금 와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그렇게 깊숙이 파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주된 정책 목표에 뭐냐 하면 미국으로부터 그러면 한국 정부의….우리가 가서 미국의 젊은이들 대신 피를 흘리는 대신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한국정부와 사전 협의없이 철수하지 않는다 하는 그 공약을 받아내는 거였고, 박 대통령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아마 채 장군님께서도 그렇게 믿으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1971년에 미국의 정책이 변화하니까 미국은 한국 정부에 아무런 사전 협의없이 한국군을 빼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것이 미국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전용하느냐 아니면 본토로 철수시키느냐, 아니면 한국이 계속 주둔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이라는 파병이라는 변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미국 자신의 정책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고, 그런 면에서 볼 때 베트남 파병이라는 것이 그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런 전제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장군님의 전제를 따른다하더라도 결국 뭐냐 하면는 미국의 당시의 정부와 대통령이 설정했었던 국가목표, 국가이익이라고 정의했었던 그분을 전혀 지켜 내지 못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비판을 지금의 입장에서는 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만약에, 만약에 미군이 그때 빠졌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습니다. 저는 확실히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미군 2개 사단이 빠지면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없습니다. 그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역사에서 가장 해놓은 것이 참…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런 걸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미국의 압력 때문에 불가피하게 파병을 한다면 그 파병을 했을 때의 개입을 하는 정도와 방식의 문제가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거 말이에요. 그 말씀드리죠. 압력이 있은 것이 아니라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지금 한반도의 안보유지가 되고 있는 것은 미군의 주둔과 그 다음에 한·미 방위조약에 의해서 유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시죠? 방위조약에 어떤 조항이 있냐면은 우리가 필요로 할 적에 미군이 요청할 적에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이 자동 개입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아세아 지역이나 가까운 지역에서 미군이 방공전쟁을 수행할 적에 한국에 요청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요청에 응해야 될 그런 의무가 있습니다. 그건 한·미 방위조약상에 우리 의무조항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 국제사회의 하나의 관례로 보아서 우리가 한국전쟁 때 미군이 안왔다면 우리는 없어진 거 아닙니까? 미군이 1주일만 늦게 왔더라도 대한민국 없는 겁니다. 근데 미국이 빨리 와 가지고 우리를 구출해 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국제적인 부채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월남에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시다시피 맨 처음에 보낸 건 130명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가볍게 그렇게 해서 어떻게 땔려고 했는데 이게 전쟁이 자꾸 되니까 자기네 전투병을 투입하면서 당신네 전투병 와주시오. ‘NO’ 할 수가 없습니다. 그 ‘NO’할 수 없다는 것은 한·미 방위조약상의 의무사항…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방위조약상의 의무사항도 있습니다만…

유시민 / 사회자
다시 그 문제가 나오는데요. 지금 반공전쟁을 미국이 수해를 할 때 어떤 우방 군사적인 우방으로서 안갈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힘이라던가, 또 우리가 6.25전쟁, 한국전쟁 때 지원 받았던 것, 국제사회에서 이거에 대한 보답, 이런 걸 말씀하셨는데 지금 역시 베트남전의 성격문제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과연 반공전쟁이냐 그렇지 않으면 인도차이나 반도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말하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하고 싶었던 미국의 어떤 군사전략에 불과했느냐, 이거는 사실 따져봐야 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이 토론의 시간이 워낙 짧고 배당되는 시간이 어차피 10여분 밖에 안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발언을 우리 국민들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본질을 아직까지도 완전히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는 발언만을 오늘 제안해서 하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아까 지 선생님께서 베트남 군인들이 총 거꾸로 매고 자기 방어할 용의도 없고, 다 또 채 장군님께서 다 타락했고 부패했다고 했죠. 바로 그것이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말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베트남 인민들은 호지명이를 비롯한 그 세력이 민족해방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서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데에 제1차 불란서 전이 끝난 뒤에 미국이 그 불란서를 대신해서 바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전쟁을 시작한 겁니다. 그것이 54년에, 그래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1965년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영국 수상에게 친서를 보내서 1956년에 실시되기로 되어 있던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제1차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에 2년 후에는 남북전체를 포함하는 총선을 실시하기로 돼 있었거든요. 이거를 북쪽에서는 요구하는데 누가 이거를 깼느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영국 수상에서 친서를 보내는데서 뭘 이야기 하냐하면 지금 미국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을 동원해서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조사한 결과로는 베트남 남북의 모든 베트남 인민의 80%가 호지명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 남부의 정권, 우리가 반공정권이라고 해서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다고 해서 수많은 군인을 파견했던 그 사이공 정권은 철저하게 부패돼있다. 철저하게 부패돼있고 그 사이공 정권에서 과거 불란서와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싸웠던 인물은 육군 중령 한 사람 밖에 없었어요. 근데 거기에 그것과 대조적으로 북베트남의 호지명을 비롯한 이 정부 지도자들은 전부가 불란서와 일본식민지에 대항해서 싸워서 형무소 생활을 10년, 20년씩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소위 우리가 베트공이라고 멸시했던 남쪽의 민족해방 전선의 중앙위원 39명의 경력을 보면은 이 39명의 경력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이 불란서 식민지와 일본식민지하에서 민족 해방 독립투쟁을 싸웠던 사람입니다. 즉, 우리가 돕는다는 반공이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사이공 정권이라는 것은 우리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제시대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의 집단이라고 말해도 가히 틀리지 않습니다. 이거에 비해서 반대로 호지명과 우리가 베트공이라고 멸시했던 그 세력은 민족해방 전선의 지도부는 전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과거식민지 하에서 일본과 불란서를 대항해서 싸웠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까 지 선생이 우리가 군대를 보내서 도우려고 했는데 자기네들이 지킬 의지가 없이 총을 거꾸로 매고 다 그랬다는 당연합니다. 왜냐 하면 호지명이를 선거를 실시하면 80% 이상이 전무 호지명과 그 세력을 지지할 것이라는 미국대통령의 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남쪽과 북쪽의 지도자들의 민족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지금 그 지위에 서냐 자기의 입신이 남베트남 사이공 정권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은 이건 과거의 고딘디엔 할 것 없이 이런 참 이런 표현을 하면 안되지만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정부패한 집단이었습니다. 어째서 베트남 인민이 사이공 정권을 위해서 싸우려고 그럽니까? 당연히 안 싸우려고 그러죠.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여기 책을 가져왔지만 보여드릴 수가 없지만 시간이… 베트남의 내란은 미국이 1956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제네바 협정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면은 호지명 쪽이 이기니까 즉 좌파라고 할까? 이 세력이 이기니까 이걸 백지화했던, 이래서 이걸 원인이 돼서 내란이 일어난 것이다 하는 것은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인정하는 건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내란이 격화했나 하는 것은 우선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뒤에서 조장하고 속이고 무력으로 하고 이게 아니라 남북 총선에 의해서 통일 베트남 정권을 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던 미국도 동의했던 1956년 선거를 미국이 이걸 백지화 시키려는데서 나옵니다. 그러길래 이걸 보십시오. 왜 베트남 전쟁을 이 어떤 전쟁이냐 하면은 이것이 미국의 청년들이라는 것은 굉장히 애국주의자입니다. 1차 대전, 2차 대전, 한국전쟁을 통해서 국가의 부름에 기꺼이 응해서 전쟁에 나갔는데 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만은 미국전쟁 징병필을…57만 명이 징병필을 합니다. 청년들이… 279개 대학교가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에는 응징하지 않다, 징병카드 오면은 라이타로 불태워버리고 전부 그래서 20만 9,517명이 기소 당합니다. 징역은 3,250명이 징역… 집행유예가 5,500명입니다. 불기소 처분이 19만 7,750만입니다. 외국에 도망간 숫자가 5,270명입니다. 등록 거부한 것이 25만 3,000, 국내에서 그대로 도피한 것이 17,500명입니다. 여기엔 클린턴 대통령도 포함돼 있는데…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미국내에서 조차도 전쟁터에 나가야 될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말씀이신데요.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누구를 돕는 거냐, 결국은 부패타락한 과거 식민지 하에서 불란서와 일본군 식민지 하에서 그 외세를 도왔던 세력을 돕는 것이다.

유시민 / 사회자
여기서 잠깐, 잠깐만요. 조금 있다 제가 기회를 드리고 잠깐 전화연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분인데요. 여보세요?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네,

유시민 / 사회자
김진선 장군이십니까?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네, 맞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네, 대장으로 예편하셨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네,

유시민 / 사회자
언제 월남전에 참전하셨습니까?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1970년에 1년 동안 참전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때 장교, 물론 대위로 대위쯤 되셨나요, 그때가?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중대장이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당시 뭐, 오늘 토의들 하시지만 전쟁은 지도자가 하고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고, 군인은 명령을 내리면은 싸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중대장 할 때에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목숨 걸로 싸웠어요. 그 이상 뭐, 아무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라든가 배경 이런 것에 대해선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기회가 없으셨다,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그렇지요. 뭐, 특별히 저희들이 뭐 사관학교 다니면서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서 디엔디엠 전투는 배웠지만 그 어떤 전쟁의 성격이라든가 이런 걸 배운 바는 없었죠.

유시민 / 사회자
군사적으로만 베트남 전쟁을 보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신가요? 아니면 베트남 전쟁을 보는 시각이 지금은 좀 바뀌셨습니까?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지금은 다르죠. 그 동안 책도 읽고 경험도 했고, 또 그 뒤로 베트남 하노이에도 가봤고, 하노이에서 사회과학원장하고 학술토의도 해보고 그랬습니다. 그 뒤로 대위 때 봤던 베트남 전쟁과 실제로 다르다하는 것을 느끼고, 그 뒤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리영희 교수님도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내용까지 다 알고 좀 더 이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연구를 해야 되겠다. 왜냐 하면 일생에 전쟁에 가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를 분석하지 않고 과거의 대위 때 생각했던 것만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맞지 안잖아요. 그래서 많은 책을 읽었어요. 베트남에 대해서…

유시민 / 사회자
저~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 싶은데요.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지명, 호치민이죠. 예를 들어서 이 사람이 어떤 정치가 또는 혁명가였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뭐, 제가 전투할 때에는 말하자면 적군 사령관으로 생각하고 나쁜 사람으로 생각했었고, 그 뒤로 호치민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그 민족의 지도자였구나, 그리고 이제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보면은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가 불란서의 식민지였는데 미국이 불란서를 도와서 식민지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우선 어떤 이념 문제를 떠나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고, 우리 독립군이 청산리나 이런데서 싸운 것처럼 결국 중국 땅에서 도움을 받고 싸웠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어떤 그 이념적인 문제보다는 내셔널리즘의 문제가 강한 것이고, 그래서 그 호치민이 민족주의자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구요. 또 호치민이라는 사람이 결국은 79세의 총각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역시 베트남 민족을 위해서 오직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간 표상입니다. 하노이의 그분의 기념관에 가보면은 역시 이 사람은 남북을 통털은 베트남 민족으로부터 역시 존경을 받을 만하다 하는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저도 그래서 그분을 아주 존경을 하게 됐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역사의 과정에 없는 것이지만 만약 지금 30년 전, 30여 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라면 다시 베트남에 가시겠습니다.

김진선 / 前 주월 맹호부대장
제가 이제 군인의 신분이라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군인은 명령에 의해서 죽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가죠. 그런데 싸우는 방법상에 있어서는 과거와 좀 다른 방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은 베트남의 그 실상을 안 다음에 과거의 몰랐던 때와 같은 형태의 전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유시민 / 사회자
오늘 말씀 대단히 고맙습니다.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분만…, 우리가 베트남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철저히 이해한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미국에 6.25의 신세를 졌기 때문에 간다는 이 보은의 사상, 이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이라는 것이 미국의 청년들이 징집을 그렇게 기피했다는 것인데 미군 자신이, 장병들이 이 기간 동안에 얼마나 베트남 전쟁에서 기피했냐 하면은 월남 기간 중 병력이 757만 5천 명이 연 미군 병력이 갔습니다. 그 가운데 탈영자가 무장탈영한 자가 150만입니다. 탈주병이 55만 명입니다. 불명예 제대가 56만 3천 건입니다. 그리고 대 민간 범죄가 1만 천3백 건입니다. 그리고 탈영이 10만입니다. 그밖에 사건이 45만 2천7백 명입니다. 즉, 베트남의 국민들과 장병들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거부하는데 이렇게 까지, 더러운 전쟁이라는 걸 알고, 식민지와 제국주의전쟁이라는 거를… 우리가 이걸 똑바로 알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보태면은 우리가 미국의 신세를 졌기 때문에 간다고 그랬는데, 신세를 진 걸로 말하면은 영국이야말로 미국의 신세를 진 최고의 나라입니다. 영국은 미국과 형제지간이고 혈육의 나라, 형제지간입니다. 1차 대전, 2차 대전 때 영국은 그대로 국가가 망하는 것을 미국의 덕으로 미국덕으로 살려주었고, 마샬플랜 회의에서 경제적으로 그야말로 5등 국가가 되는 영국을 그 후로 미국이 영국을 다 살려준 겁니다. 근데 영국이 그러면은 베트남 전쟁에 무엇을 파병했는가, 6명의 의장대 밖에 파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의료품 같은 건 물론… 담요라던가.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요구해도 불란서도 독일도 독일은 뭐… 이탈리아도 세계의 국가들이 베트남 전쟁의 왜 미국을 지원하지 않고 겨우 우리나, 필리핀이나 태국, 타일랜드나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하고 뉴질랜드만 하더라도 미국이 없으면 2차 대전 때 일본한테 그대로 다 없어졌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은 영국같은 나라가 아무리 미국이 요구해도 할 수 없이 마지막에 탄서루트 공항에 외국 귀빈들이 올 때 마치 영국도 미국의 돕고 있다는 외형적인 장식을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의장대 6명을 파견해서 그 의장대, 우리와 필리핀, 대만, 타일랜드, 베트남, 미국들의 의장대에 섰어요. 이 영국이 왜 이랬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면은 베트남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두 분 이제 발언을 하시려고 하는데요. 제가 바로 발언권을 드릴텐데 그 전에요 한 가지만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지금 전쟁의 성격에 관해서 엇갈리는 견해들이 있고, 그 연장선에서 월남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의 지위에 관한 논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 우리가 여러 해전에 어떤 장관이 월남전 파병이 말하면 용병이었다, 이런 발언을 해서 장관직에서 쫓겨난 적도 있고 그렇게 됐는데, 지금 잠깐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월남전의 성격에 대한 그런 말씀을 좀 매듭을 지으면서요, 방청석 의견을 잠깐 듣고 두 분께서 말씀하시도록 제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누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방청석
대한해병 참전위원회 사무총장입니다. 아까 명예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는데 호치민이 자기의 기질을 발휘해 가지고 제1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중요한 한 분과 함께 월맹으로다가 귀국을 했습니다. 그때 그 월맹에 있는 모든 국민들은 미군하고 같이 이렇게 이제 귀국을 하니까 미군이 자기네들 지원하는 구나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를 상당히 지지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은 하게 되니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좀 생각을 하면서 그와 같은 그 위기를 또, 그와 같은 기회를 적절히 이용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분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뒤에 것은 모르지만 그와 같은 그 기회를, 월남의 월남전쟁 기회를 우리 한국의 안보나 또는 이 경제적인 이와 같은 문제 여러 가지를 전략적으로 아마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것이 결정이 됐을 거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그 쪽에 참전을 했다는 것은 상호주의, 호의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도 6.25때 16개국이 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 말씀은 아까 충분히 했습니다.

방청석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를 도왔던 그와 같은 우방국에 또한 위기에 처했을 때는 우리는 당연히 거기에 보은의 이런 답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그러한 그 동방예의지국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 이와 같은 생각에서 저는 참전의 배경이 정당했다고 당당했다고 이렇게 좀 생각을 합니다.

유시민 / 사회자
정당한 이유에 의한 파병이었다, 이런 생각이시죠? 고맙습니다. 다른 분 또 말씀하실 분, 안 계십니까? 그러면 다시 토론으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나는 여기 이 교수님 표현에 난 공감합니다. 그 참, 학자다운 책도 상당히 정독을 했습니다마는 아주 학자다운 날카로운 분석력과 판단력을 갖고 정확하게 진단하셨는데, 나는 거기에 다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냐 하면은 그 1차 베트남 전쟁, 그 100% 공감하고, 2차 베트남 전쟁, 거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대체적으로는 공감하지만 월남군이 부패했다, 미국이 잘못 개입했다 하는 거기엔 공감하지만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우리 한국군이 개입하는 것은 이런 전쟁을 한다던가, 뭘 한다면 이건 어디까지 나 국가이익 추구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이제 그런 안보적인 차원에서 했다는 거 하나만 말씀드렸는데 이제 우리 리 총장이 말씀을 잠깐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월남참전을 기해서 우리의 그 역사가 아주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지금까지 고구려시대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우리 한번도 해외 나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 가지고 우리 민족성이 전부 내향적이었습니다. 내향적인 집안에서 싸우는 내정형이었었는데 이 월남파병을 계기로 해 가지고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건 박사님이 항상 어디 가서 말씀하십니다마는 월남참전을 계기로 해서 우리 민족이 밖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경제가 뻗어나가고 사람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 우리 민족성이 내향적에서 외향적으로 바뀌었다 하는 그 말씀을 저는 항상 관심있게 듣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월남참전 전에 해외 나가있던 사람 누구 있습니까? 손꼽을 정도인데 해외 유학생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활동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MADE IN KOREA의 딱지가 붙은 상품이 손톱깎기 하나 해외에 나간 것 없습니다. 이 모두가 다 월남에 처음 나오기 시작을 해 가지고 미군 피해액수하고 한국군 피해액수의 군납으로부터 시작이 돼 가지고 퍼져나간 겁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경제적인 발전의 도약을 만든 것은 우리 장병들이 보내는 봉급, 몇 푼 되지도 않습니마는 그 통계상으로 88.5%를 보냈습니다. 뭐, 내가 난 80%만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20%는 너희가 쓰라고 그랬는데 그것도 전부 저희 나라로 보냈어요. 왜냐 하면 고국에 한푼이라도 더 보내 가지고 농촌을 개발하겠다는 우리 장병들의 그와 같은 집념이 돈 한푼도 안 쓰고 술 한잔 안 마시고 밖에 외출한번 안하고 그 돈을 꼬박꼬박 보냈다 그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다 초석이 되어서 오늘날의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70년도부터는 월남에 우리 따라 들어 간 그 수십, 수백의 기업과 용역과 그 다음에 심지어 딴따라패들까지 월남에서 시작을 해 가지고 해외에 뻗어 나갔는데, 중동에 20만 명이 나갔습니다. 지금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수천 억 달라 공사하고 있을 거예요. 그 모든 것을 월남을 기초로 해서 뻗어나간 거다.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당시의 표현을 쓰자면 이 월남전 참전이라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전환점, 혹은 전기였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이 지금까지 내향적이고, 내정형의 이것이 해외로 뻗어나갔고…

유시민 / 사회자
지 박사, 보충하실 거…

지만원 / 군사평론가
저는 아까 한 교수님 말씀하고는 리영희 교수님 말씀하고는 조금 좀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요새 세상에서의 최고의 가치가 뭐냐, 삶의 질입니다. 그러면 냉전시대의 최고의 가치관은 뭐였느냐, 이데올로기입니다. 무슨 얘기냐, 민주주의 사회에 공산주의자가 있으면 죽여도 됩니다. 또 공산주의 사회에 민주주의 신봉자가 가면 죽여도 됩니다. 그게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때 당시에 우리는 지금의 잣대로 그때 당시를 재단하면 안됩니다. 그때 당시 정말로 저희가 믿기를 미국이 제국주의라고는 생각을 꿈에도 안 했습니다. 미국은 그때 당시에 뭐냐, 냉전의 미국은 소위 그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에서 자유진영의 보스다. 그래서 한 이 지구상에 조금이라도 더 우리 자유진영을 확보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자꾸 여기 한 교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그때 당시에 그럼 우리가 안 가도 주한미군은 과연 철수했겠느냐, 그때 당시에 정부 판단으로는 미국이 다급한데 여기 병력 끌어간다고 그러는 건 누구도 아는 겁니다. 여기 병력 끌어가면은 당장 우리가 큰일나는데 우리가 대신 가서 싸워주면은 우리 현대화도 되고 전쟁경험도 하고 생활도 윤택해지고 그러는데 왜 안 갑니까? 가야죠. 그 다음에 바로 그 다음에 뭐가 있었느냐, 1968년도 제가 닉슨 닥트린이 선포된 줄 압니다. 맞습니까? 70년입니까? 72년이요. 72년, 그럼 그때 뭐냐 소위 그때 이제 닉슨 닥트린은 그때 나왔지만은 그 이전에 1968년 그때서부터 북한의 대남 기습, 이런 게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뭐, 김신조라든지 굉장했는데 그때 이런 것들이, 이런 것들북한하고 미국하고 부딪칠 때마다 항상 미국이 졌어요. 미국이 항상 양보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여기부터 이제 발을 빼고 싶은 거예요.

유시민 / 사회자
그 배경에 대해선 아까도 여러 번 얘기가 나왔는데요. 지금 토론시간이 굉장히 많이 지났는데 좀 핵심으로 들어가 보죠. 그러면 우리 한국군의 월남에 파견되었던 한국군의 지위와 관련해서 이것이 미국의 용병이었다,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용병치고도 좀 대접을 잘 못 받는 것이 아니냐 하는 냉소적인 반응도 없지 않구요. 이게 또 이제 참전 군인들의 명예와 굉장히 깊이 관련되는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어떻게 해석하고 넘어 가야 될까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용병에 대해서 아까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가 보낸 게 무슨 용병이냐 그거이고, 그 다음 또 하나는 가서 모든 작전과 전략 전술에 모든 기본방침과 명령지시는 내가 결정해서 내려간 겁니다. 나는 웨스모린 대장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웨스모린 대장의 그 작전하고 정반대 작전을 썼습니다. 그 뭐냐 하면 웨스모린 대장의 작전은 탐색해 섬멸한다. 난 대먹지 않은 소리하지 말라 이거예요. 왜냐 하면 어떻게 미군이 형태도 없는 어린애 업고 다니는 그 안에 수류탄에 들어가 있는 베트공을 어떻게 찾아내겠다는 거냐. 계급장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장화신고 다니지도 않는 그런 베트공을 어떻게 찾아내겠다는 거냐, 못 한다, 월남군도 못하고 너희는 우리 더욱이나 못 한다, 그럼 어떻게 할거냐, 우리는 모택동이의 그 전력인 물과 고기의 관계를 베드공과 양민을 분리시키겠다. 분리시켜 가지고 양민 보호하는데 최우선을 두겠다. 그건 무슨 얘기냐 하면은 물과 고기에서 물은 우리편에 끌어들여야겠다, 이것이 성공하면은 월남전이 성공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 B-52를 갖다가 전 월남인을 다 전멸시키지 않는 한 월남전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게…

유시민 / 사회자
지금 말씀은 독자적인 작전을 하셨고… 또 미군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군사전략을 쓰셨기 때문에 용병이라 하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이런 말씀이신데…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용병문제에서는 제일 그 핵심이되는 게 결국 그러면은 전쟁에서, 용병이라는 게 누가 고용을 했느냐 거든요. 결국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 월급이 누구의 주머니에서부터 나온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 되는 겁니다. 물론 국제법상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용병을 얘기할 때는 개인이 사익을 위해서 전투에 지원을 한 그런 경우, 우리가 흔히 외인부대라고 하는 그런 경우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친다면 적어도 이건 한국 정부가 파견을 한 거니까 용병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저거에 누구한테 고용돼서 누구 돈 받고 대신 싸워주고 있느냐 하는 식으로 따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미국을 대신해서 싸우고 미국이 흘린 피를 우리가 대신 흘린 겁니다. 그리고 아까 지금 사회자께서 냉소적인 견해가 있다라고 했는데, 그건 제가 조금 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요. 그건 뭐냐 하면은 결국 그런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간의 또 나름대로의 교섭이 있어서 그러면 한국군의 대우를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미국이 얼마나 지불을 할 것이냐 그리고 다른 뭐, 군함이라든지 한국군의 현대화라든지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지원을 할 것이냐 뭐, 그런 상세한 다각도의 교섭이 오갔습니다만 그것을 그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오늘날 현대사적 입장에서 본다면은 너무 터무니없이 우리가 불리하게 적용이 됐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채명신 장군께서 여기 나와 계십니다만 그 당시에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5만 병력을 그 책임지는 장군으로 뽑혔다는 건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자나 저희 또래 국민학교 때 채명신 장군은 우리 또래 그 어린애들한테는 영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나중에 그 월남전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가 깜짝 놀란 사실은 뭐냐 하면 한국군 사단장의 월급이 필리핀이나 태국군의 소위 월급보다 적다 이겁니다. 소대장 월급보다… 그건 사실 아닙니까? 한국군 월급이 360불 받을 때 태국군, 필리핀군 소대장이 400불을 받았어요. 우리 사단장 별 두 개 보다 밥풀 하나가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저는 지금 현재 그 고엽제 피해나 그런 양민학살에 대해서 자꾸 얘기를 하는 그 진실을 밝히려는 한겨레 신문사나 그런 쪽에 자꾸 공격을 하시는데요. 저 참전용사들이 정말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부분이 이런 현실이라는 겁니다. 왜 그러면은 한국군이 그렇게 싼값에 갈 수밖에 없었는가, 그렇다면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하나 저는 분명히 우리 경제가 이 만큼 살게 된 것 중에 우리의 참전용사분들의 피땀이 어린 그 성금, 정말 그러니까 우리 또 하나 참 말하기 싫습니다만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는 배가 불러서… 남의 나라에 전쟁을 하러갔습니다. 남의 나라전쟁을 하러갔는데 우리 일등병이 받는 월급이 베트남 일등병 전투 수당보다 작았어요. 같거나 작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남의 나라 전투에 가서 왜 우리가 피를 흘리면서 그것을 우리가 미국만큼 받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미국, 우리 경제 사정상 뭐 미국 대령이 받는 월급을 한국대령이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지만원 / 군사평론가
그 말이에요? 조금 전에 이야기한 건 월남군은 전투수당…달러로 받는 거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조금 이제 잘못….

유시민 / 사회자
여하튼 분명한 것은 한국군이 실제로 가서 피를 흘리고 죽고 다치고 했던…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제가 더 보충을 하면은요. 사실 우리 경제부분에서 우리가 장병여러분들이 애써 벌어온 외화가 우리한테 도움이 된 건 사실입니다만 저는 이것을 좀더 크게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은 그 시대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외화가 필요했던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외화를 얻었어야 할 것은 한일협상이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 문제는 지금 말이 너무 번잡하니까…

지만원 / 군사평론가
가만있어, 가만있어… 하나 물어 봅니까? 돈을 많이 받으면은 용병이 아니고, 돈을 조금 받으면 용병인가요?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그게 아니라 용병이라는 저는 불행하게 갔는데 더 가슴 아픈 것은 뭐냐 하면은 가서도 대접을 못 받았다는 겁니다.

지만원 / 군사평론가
또 하나 있어요. 미군이 유럽에 파견되고 일본에 파견되고 한국에 파견됐어요. 유럽에서도 주둔병 내놓으라고 그러고, 일본에서도 주둔병, 한국에서도 주둔병 내라고 그래요. 그걸 가지고 많은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멀시널이라고 그래요. 용병이라고 그래요. 미국 용병입니까? 그 다음에 채명신 장군 여기 계십니다. 여기 파월 장병 다 계십니다. 저도 파월됐습니다. 전 3년 반 가 있었어요. 저 3년 반 가 있으면서 용병이라는 생각 들었으면은 거기 안 갑니다. 왜 그거를 지금의 잣대로 얘기를 합니까? 그것도 보편타당화 된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용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용병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전 밝혔으면 좋겠어요, 왜 용병인지.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용병이라면 안 갔을 거라고 그러는데, 아마 나부터 안 갔을 거야.

유시민 / 사회자
자~ 이제 그러니까 적어도 참전군인들이 주관적으로 자기 스스로 용병이라고 생각하는 분 한 분도 없었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이것이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인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부도덕한 전쟁에 우리가 대신 싸워주러 가서 무지하게 많은 피를 흘린 것, 그리고 전쟁비용은 미국이 됐다는 것 때문에 말하자면 용병이 나온건데요. 이것이 참전군인 개개인을 흠잡기 위해서 이렇게 나온 말은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물론 아니예요.

지만원 / 군사평론가
그러면은 왜 더티한 전쟁에 갔느냐 그렇게로 끝내야지 거기 간 사람보고 용병이다…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그거는 간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는 정말 베트남 전쟁을 우리가 25년만에 꺼내는 이유는 양민학살 얘기가 나올 때 또 얘기가 나오겠습니다만은…

지만원 / 군사평론가
정책이 잘됐느냐 못했느냐 이건만 얘기를 해야지..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양민학살 문제에서도 결국 초점을 대상은 그 불행한 순간에서 그 의혹이 일어나는 그곳에 있었던 병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그런 민간인 학살이라는 그 현장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 누가 과연 그 이 땅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딸이었던 젊은이들을 누가 몰아넣었느냐 그 점에서 저희가…

지만원 / 군사평론가
용병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은 지금 하신 말씀대로 하면은 한국군의 파병 결정이 잘된 거냐, 못된 거냐 이걸로 끝내라 그거예요. 왜 거기 간 사람의 명예를 대변하냔 말이죠. 그런 그 용병이라는 말을 꺼내냐 하는 거지,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잘못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간 사람들의 지위가 이렇게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이었다가 되는 겁니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용병이라는 말을 할 때 참전 군인 개개인이 돈을 벌기 위해서 갔다, 이런 뜻이 아니고 우리 군인들을 거기서 월남으로 보내게 된 그 결정이 말하자면 우리가 꼭 갈 필요가 없는 남의 전쟁에…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그렇지만 국가가 돈을 필요로 했었던 건 사실이니까 국가가 팔아먹은 용병인거죠. 그건 개인이 참전한 그런 용병으로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러니까 아까 내가 얘기 했지만은 국가가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안보와 또 그 다음에 경제문제도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 대의명분상은 안보를 위해서 간 건데…

유시민 / 사회자
그건 아까 충분히 토론이 됐구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했던 이 모든 문제를 떠나서, 예컨대 베트남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었다. 우리가 거기 파병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든 또는 베트남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우리가 거기서 간 것은 안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든 실제 그 전투현장에서 벌어졌던 일,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같은 경우에는 그와 별개로 말하자면 없어야 될 사태라고 봅니다. 이것이 아직 의혹단계인데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거는 내가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 갔던 군인들이 뭐, 양민학살이 사실이다 어쩌다 개별적으로 얘기하는데 그래서 난 내가 그걸 텔레비젼에서 보면서 일개 소총병이 불과 그 월남에 있는 기간은 짧았는데 내가 그 4년 초창기 때부터 내가 4년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양민학살 했다, 안 했다는 얘기는 나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 소총병의 얘기할 적에 내가 죽였습니다, 소대장이 우리 소대가 죽였습니다, 하는 얘기할 수 있지만은 한국군이 양민학살 행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얘기는 나만이 할 수가 있는데, 양민학살 문제는 우선 전쟁이라는 건 몰라요. 전쟁이라는 게 뭐냐, 여기 우리 대학생들 많이 나와 있습니다마는 전쟁이라는 것은 이것은 전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와 소원은 뭐냐 하면 사람을 전부 죽어야 돼요. 죽이고 내가 사는 겁니다. 그리고 최대 파견을 해 가지고 굴복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그래야 승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얼핏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러니까 잔인하지 않냐 하지만은 전쟁이야 한없이 잔인한 겁니다. 그리고 사람을 머리를 써 가지고 모든 노력을 죽이는 겁니다. 파괴하는 겁니다. 그리고 적을 갖다가 아주 쓰러뜨려 가지고 내가 승리하는 것, 이게 전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다, 승리다 그겁니다. 그렇다면는 그런 전쟁에 그 적을 안될 것 같으면 월남에서 지금 하는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제전쟁 법규상에 어떤 것이 있냐 하면 전투하는 상대는 반드시 그 4가지, 그러니까 국제전쟁 조항에 제네바 협정에 그게 나와있는데, 반드시 표시를 해야 되요. 반드시 표시를 해야 되고, 만약에 표시를 하지 않거나 이래 가지고 민간인의 복장을 하고 가장을 하고 수류탄을 들고 총을 쐈다면은 이건 전쟁 법규상 배신행위로 규정이 돼있습니다. 그런 배신행위로 규정된 집단에 대해서는 배신의 보복을 할 수 있는 원칙이 적용되게 돼 있어요.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채 장군 말씀은 혹시 전투를 하는 중에 민간인이 사상당하는 수는 있었겠지만, 의적으로 우리 군인들이 민간임을 알면서 베트남 민간인들을 죽인 일은 없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없다고, 그건 있을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러면은 히로시마의 원자탄이 떨어져 가지고 한 25만 명이 날아갔는데 이거 양민학살입니까? 폭격에 어린애, 남자들, 어린애들 노인네들 죽어도 양민학살입니까? 이건 전쟁피해자입니다. 전쟁간에 있어서는 양민학살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어요. 이건 마치 전쟁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까 우리 이 교수님말씀에 제1차 인도전쟁에 관한 것은 백번 내가 공감을 하고 2차 인도전에 대해서는 내가 부분적으로 베트남이 부패했다는 것만은 동의를 하지만은 그러나 이것도 총체적으로 볼 때에는 잘못된 겁니다. 뭐냐 하면 월남전에서 베트공을 얘기했는데 나도 베트공과 싸웠지만은 난 베트공, 훌륭한 전투요원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정말 베트공을 내가 높이 평가를 하는 거예요. 베트공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베트공을 창설하고 베트공을 이끌고 대미관계, 국제관계, 외교관계, 심리전관계 총 책임졌던 게 누구입니까? 월남 임시혁명 정국의… 이 사람이며 지금 어디가 있는 줄 아십니까? 그 사람이 쓴 증언록이 있습니다. 이걸 갖다가 여러분께 책자로서 우리 국민들한테 돌리겠습니다만 거기에 볼 것 같으면은 이 챈유탄이 보트 피플이예요. 배타고 62명의 가족 일가 친척을 놔두고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가서 지금 파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월남전쟁에 끝난… 가만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월남전의 성격은 여기에서 나오는 깁니다. 75년 4월 30일 공산화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양민을 죽였느냐, 이건 전쟁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자국민을 죽인 겁니다. 베트공들 다 쓰러졌습니다. 심지어 챈유탄의 친형인 의약박사인데 불란서가 공부한, 그리고 둘째형은 외환 과장을 했는데 이것도 베트공이였습니다. 공을 많이 세웠으니, 그러나 없어졌습니다. 얼마가 없어 졌느냐 80만 명이 지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베트남 자체에서도 자기들끼리 동족상잔이 있었구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동족상잔 문제가 아니에요. 정도가 아니에요. 그리고 560만 명이 들어갔는데 몇 명 살아남았습니까?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데 있어서 그 사람들 갖다가 은근히 협박했어요. 너는 간다, 너는 신병제국에 간다, 그래가지고 도망가도록 유혹을 한 겁니다. 공산당이… 그러니까 이 교수님 말씀은 전적으로 내 공감하고 다 맞는데 호지명이 돌아가신 69년 이후에는 완전히 북월맹 공산당이 갈라졌습니다. 아주 썩을 데로 썩고, 월남의 티유정권 관리보다 더 썩었습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 챈유탄의 얘기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그 문제는 좀 이제 별개의 문제인데요. 우선 베트남의 양민학살 의혹과 관련해서 이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당사자가 지금 전화로 연결돼있습니다. 한겨레 21일 구수정 베트남 통신원입니다. 구수정 통신원 안녕하세요?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안녕하세요. 구수정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수고 많으십니다. 지금 베트남이시죠?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네, 그렇죠,

유시민 / 사회자
한국군에 의한 이른바 양민학살의 경우가 베트남 정부의 공식보고서에 의하면 약 5천명 정도라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는데 구수정씨가 조사한 바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9천여 명이다, 이런 견해까지 내놓으셨는데요. 어떤 근거에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그런 조사를 하셨습니까?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네, 베트남 정치국에서 발행한 바 있는 그 전쟁범죄 조사보고서에는 한국군에 의해서 희생된 양민의 숫자가 5천 여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그 80년대에 작성됐던 것으로 여전히 미흡하고 불안정한 통계라는 그런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직접 양민학살 현장을 방문했을 때 많은 지역들이 자료에 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장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지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수치가 자료에 나와있는 수치보다 곱절을 넘어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9천여 명이라고 조사를 해서 주장하는 그런 근거들은 일단은 제가 베트남 양민학살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했던 내용하고, 그리고 미국 민간인 보고서에 나와 있는 자료, 그리고 베트남 측의 자료를 종합해서 정산한 것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네, 그렇군요. 근데 구수정 통신원의 보도에 대해서요. 베트남 정부의 공식문서라는 것은 말하자면 그쪽 자료 아니냐, 일방적으로 한쪽의 자료만을 보고 우리 군인들이 그렇게 많은 베트남 양민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그런 특히 전우회 쪽의 비판이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제가 처음 그 한겨레21에 베트남 양민학살 관련기사를 썼던 것은 작년 5월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 베트남 측의 자료를 입수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거든요. 사실 그만큼 이 자료를 입수를 하고도 바로 기사화 하지 못했다는 데는 저로서도 굉장히 신중한 고민을 했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그 기간동안에 베트남 정부측의 자료하고 파월전사 1집에서 5집, 그리고 파월 한국군 전사, 주월 한국군 전사 등의 자료하고 대조작업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유시민 / 사회자
나름대로 관련자료를 우리 쪽에서 나온 자료도 충분히 검토를 하셨다는 말씀인데요.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그러니까 사실은 제가 지금 그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연구라고 하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이 논문에도 이러한 검토가 필요했거든요.

유시민 / 사회자
자~ 그런데 지금 베트남과 한국이 수교를 하고 우호협력 관계를 만들고 있긴 하지만 베트남 정부도 이 문제가 붉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공식입장 아닙니까? 근데 구수정 통신원이 이 문제를 제기해서 양국간의 우호관계에 위해를 될 수 있다, 이런 지적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실제로 베트남 정부가 그 동안 과거를 닦고 미래로 가자라고 하는 그런 입장을 견지해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베트남 정부에 여러 가지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 지난 4월 베트남 외무부에서는 그 동안 베트남민들의 상처하기 위한 한국의 개인과 단체들의 활동과 물질적 지원에 대단히 감사한다 라고 하는 그런 공식 환영입장을 밝힌 적도 있구요.

유시민 / 사회자
우호관계를 해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요.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그렇죠. 그리고 최근에는 종전 25주년을 기념을 해서 그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전 참전 당사국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그런 보상방법을 제시해야 된다라고 까지 입장을 책임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끝으로요. 그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 대해서 실제 그 현장을 취재하고 다니신 분으로서 혹시 묻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저는 제가 그 한국군 양민학살 문제를 최초로 제기를 했는데요. 그 사실상 한국군 양민학살이 있었다. 아니면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쟁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한테 그 문제 제기를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한국군 고엽제 피해를 아느냐, 아니면 한국군들의 희생과 고통을 이해하느냐 이런데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거든요. 저는 오히려 아니면은 베트남전에서 제기됐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뭐 이런 것들이 이제 그 논쟁의 쟁점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양민학살이 없었다, 아니면 있었다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시민 / 사회자
이미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구수정 /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그렇죠.

유시민 / 사회자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대단히 고맙습니다. 우선 리영희 선생님 잠깐 말씀하시구요. 방청석에서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조금 있다 하시겠습니다. 그러면…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그러죠.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월남 참전 전우회 이사장 김문구입니다. 방금 구수정 기자님의 인터뷰를 듣고 제가 먼저 이를 반박하기 전에 우리 한홍구 교수님한테 한 가지 묻겠습니다. 혹시 군대를 다녀오셨습니까?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갔다왔습니다.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어디서 어떻게 재대하셨죠?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화천군 사청리 옆의 용답리에서 현역으로 27개월 복무하고 예비역 육군 병장입니다.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그때 육군 명령으로 우리 교수님이 월남을 참전했습니다.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한국에 돌아와서 지금 30년이 지났을 때 용병이라고 교수님한테… 교수님 심정 어떻겠습니까?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억울하죠.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
억울하죠? 더 이상 용병에 대해서는 논하지 마시고요.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그리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 한 가지만…

유시민 / 사회자
조금 있다 하시고…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저는 베트남을 아마 우리 한국에서 제일 많이 다녔다고 자신합니다. 89년도 수교도 하기 전에 저는 베트남 현지에 가서 제가 사이공에 도착할 적에 도착하자마저 호텔에서 나온 노래가 아리랑 노래하고, 새마을 노래가 나왔습니다. 기절초풍했어요. 과거 적대국가였는데 우리방문단이 도착하니까 아리랑하고 새마을 노래 나오면서 너무나 따뜻하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적전지 부대를 다 돌 적에 약 300명 인민위원들이 우리 경호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어요. 왜 우리를 전체경호를 하느냐? 과거 우리 따이한, 죄송합니다. 따이한이 월남 참전에서 베트남을 침범했다는 적대국가지만은 우리 따이한은 우리나라를 침범 안 했다. 그 다음에 베트남 전쟁은 지하 3층 땅굴 전쟁입니다. 이거 처음 보실 겁니다. 이 사진을 지금까지 본 사람이 없어요. 89년도에 저한테 제시한 땅굴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잠깐만… 지금 초점이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혹은 어떤식으로 했느냐 하는 문제인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두 번째는 바로 우리는 치열한 전쟁을 할 적에 이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총을 들면 적군이에요. 이분들이 총을 놓고 학교를 갈 때에는 바로 우방국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전쟁을 하셨다는 말씀인데…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네, 치열한 전쟁할 적에 종교인, 정치인들은 데모를 했습니다. 이렇게… 이 데모하는 학생들이 총을 들 때는 우리는 적군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알겠습니다. 거기서 거기까지… 그러니까 지금 베트남 전쟁은 이른바 베트공과 양민을 구분할 수 없는 전쟁이었고, 그런 어려운 조건에서 싸우는 과정에서 일부 의도하지 않는 불상사는 있었지만…

방청객 / 김문구 (월남참전 전우회 이사장) 
마지막 한 마디만 보태주십시오. 대한민국 국민 및 우리 학생, 여기 계신 분들한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경부고속도로를 한번쯤은 밟았을 겁니다. 그 경부고속도로는 5천 명의 죽은 전사자와 우리 참전용사의 피와 땀과 목숨을 바쳐 경부고속도로입니다.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좀 가지세요. 월남참전 전우들한테…

유시민 / 사회자
자, 알겠습니다. 다음 시청자 전화가 한 통 연결이 돼있습니다. 여보세요?

시청자 전화연결 / 김영삼 (군포시)
네.

유시민 / 사회자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시청자 전화연결 / 김영삼 (군포시)
저는 군포에 살고 있는 김영삼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네, 말씀해주시죠.

시청자 전화연결 / 김영삼 (군포시)
저는 68년도 7월 달에 해병대로 파병이 돼서 69년 4월 15일 전상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파병한 쪽에서는 그것은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라고 하고, 그 다음에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월남에 파병돼서 갔을 때는 두려운지 모르고 말 그대로 우리 우방을 위해서 싸우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하고 갔었는데 그러다가 전상을 당하고 나의 전우도 어깨에다 전하기도 하고 처참한 그런 상처를 입고 전사한 전우도 매장시키고 했던 일이 있어요. 그리고 나서 저는 이제 돌아와서 굉장히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나는 이제 병신이 됐다 라는 그런 인식 때문에…

유시민 / 사회자
네, 지금 상이 말하자면 부상을 입으신 분이군요.

시청자 전화연결 / 김영삼 (군포시)
예,

유시민 / 사회자
그러니까 지금이 되고 있는 양민학살 문제와 관련해서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시청자 전화연결 / 김영삼 (군포시)
네, 양민학살 문제는 그때 저희가 갔을 때 100명의 적군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라는 그런 슬로건이었습니다. 사실상 그 슬로건이 지켜지기는 정말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까도 채명신 장군께서 물과 고기를 분리한다라는 그런 점에서 전략촌의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근데 그 전략촌의 폭이 주민들이 생활할 수 있는 폭에 비해서 너무 넓습니다. 그러다보면 생계를 위해서 농사를 짓고 등등 이분들이 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베트공이 아닌 일반주민들이 전략촌 속에 많이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죠. 그런 상태에서 그 작전을 나가게 되면은 본이 아니게 양민이 희생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합니다. 그 전쟁이…

유시민 / 사회자
네, 알겠습니다. 직접 경험에서 나오신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리영희 선생님께서…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이 용병의 문제라든가 학살의 문제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불행하지만 국가가 파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전쟁에 군인을 파견했다니까 그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6.25때 7년 동안을 6.25전쟁 첫날부터 만 3년5개월을 최전방 부대에서, 나머지 3년5개월을 후방부대에서 근무한 사람으로 유명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부대, 보병 11사단 제9연대에 장교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 군대가 그 당시에 971명의 그 양민을 거기서 학살해야 하는 것이냐, 물론 처음에는 171명 학살했다고 UN에서 하도 문제가 커지니까 발뺌을 하다가 영국에서 그것을 발표한 뒤에 그런 한국군의 그런 잔악행위가 계속된다면 영국군은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는 하는 이런 문제로 해서 드디어 문제가 일어났죠.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그렇지만 베트남에 갔었던 경우는 나는 학살의 문제를 불가피한 경우가 절반이 있었을 거고 채명신 제가 존경하는 참, 대한민국 국인으로서는 가장 존경하는 채명신 장군입니다. 할 것을 다 할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할 것 다했고, 그러나 절반은 전쟁터라는 그런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쪽으로 그렇게 이건 학살 쪽으로 지나치게 문제를 추궁할려고 하지 않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성 했을 학살을 좀 더 회피했거나 하는 노력을 안 했으리라고 확신하고, 난 우리 한국사람이라는 게 한국인이, 한국군이 공산주의자, 빨갱이 그러면 동물심리학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라이온하고 사자하고 다른 것, 이 먹이의 사슬에서 일체의 동질감을 안 갖거든요. 죽이는 것, 무조건 죽여도 좋다하는 이 동물심리학에 있어서의 적개념을 우리 국민에게 주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런 일이 적지않은…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현장에서는 죽여도 좋다가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고 까지 그 확산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학살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런 얘기도 많이 들어요. 나 같으면 어땠을 것이냐. 그랬을 때 저도 역시 그러면은 그 순간에서 다른 지금 의혹을 받고 있는 다른 병사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행태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내 옆의 동료가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를 그 수류탄에 아니면 조그마한 애가 던진 수류탄에 죽었다면 저 역시 그런데 가담을 해서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이것이 현대전의 특징은 뭡니까? 1차 대전, 2차 대전 그걸 거치면서 민간인의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는 전쟁이거든요. 우리 병사개개인의 엄청난 살상무기가 쥐어져있는 상황에서…

유시민 / 사회자
지금 그게 현대전의 상황입니다. 한 가지 만 제가 좀 여쭙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군이 전체적으로 30여만 명이 가서 정말 양민학살을 했으면은 몇 십만을 죽였겠습니까? 지금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 5천, 9천, 이렇게 설이 있는데 제가 두 분께 짧게 한번 여쭤 보고 싶어요. 한국군이 그와 같이 불필요하게 베트남의 양민을 죽인 그런 사례가 없었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 있습니까?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NO, 그건 할 수 없어요.

유시민 / 사회자
그건 못하죠? 지 박사는 어떠십니까?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가만있어… 내가 결론이 아니라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은 양민학살이라는 말이 부당합니다. 싸움터에서. 지금 전쟁하고 있는데 이 자리 우리 한 교수님 말씀하셨지만은 당장 자꾸 옆에 있는 전우가 소대장이 쓰러지면 수류탄 던진… 그건 총을 갈기게 되는 건 이건 인간심리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과정에서 이것이 양민학살이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유시민 / 사회자
민간인 피해다, 이렇게 말씀…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민간인 피해다는 할 수 있지만은 양민학살이라는 이 말 자체가…

지만원 / 군사평론가
여기 마을이 있어요. 우리 한국군이 제 옆에 부대였었어요.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개울을 가운데 두고, 논을 가운데 두고, 이렇게 지나는데 공중묘지 있는데 총알이 날아왔어요. 제 당번병이 무전병의 메고있던 무전기가 망가졌어요. 총알이 뚫고 나가서 전부 엎드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게 그쪽으로 총 나오는 데로 해 가지고 전 1개 소대가 들어갔어요. 들어가다가 다 1개 소대 전멸했습니다. 그럼 그 마을 가만두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폭격을 하고 보면은 민간인 죽었을 거라고 결론, 결과적로 우리는 얼마 죽였는지는 모르지만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게 그럴 경우에 그 마을 가만두시겠습니까?

유시민 / 사회자
자~ 그러면은 그 전투의 상황, 이런 것들은 월남전 직접 가보지 않아서도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나 소설을 통해서나 경험담을 통해서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우리 젊은이들을 집어넣은 그런 전쟁이었는데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봐야 될 것은 우리 입장에선 그렇게 말이 가능한데 역지사지해서 우리로서는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데 베트남 피해자들 입장에서 보면 어떨 까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건 말이요. 베트남 측에서 볼 적에 그렇죠. 베트남 측에서 볼 적엔 정말 고통스럽고 정말 우리가 생각해도 참 답답한 얘기죠. 그러나 전쟁상황이라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것 같으면은 감수해야되는 거죠.

지만원 / 군사평론가
6.25때도요. 군인보다 민간인이 배 이상 죽었어요. 군인보다…

유시민 / 사회자
지금 이제 결론을 맺어야 되기 때문에 조금씩 말씀하시고 지금 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가 고엽제 피해, 우리가 당한 피해, 또 그쪽에서의 민간인 피해, 또는 양민학살 그쪽 피해자들의 문제 이런 것이 얽혀있는데요.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래서 난 한마디만 딱 마지막 말씀 드리고 싶은데 양민학살이라는 말은 월남전 상황에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고엽제 피해환자, 이건 국가에서도 제대로 지금 대우를 못 받고 있는데 거기 가서 지금 3만여 명이 고통을 받고 있다구… 이건 난 이런 얘기 공개석상에서 하고 싶지 않지만은 저 자신도 고엽제 피해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하나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전우들의 그 고통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제가 느끼고 있는 겁니다. 정말 이거 아프고 쑤시고 그럴 땐 밤에 잠 못 잡니다. 그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떤 자기의 소속하고 있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한 건데 그걸 갖다가 양민학살로 몰아붙인다 할 것 같으면 군인은 명예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는데 이걸 밟아버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그러는데 이건 우리 30만과 500만의…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지금 현재 말이죠. 저희가 양민학살 그 민간인 학살 그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것이 모든 한국군이 다 그랬을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정말, 근데 그것은 장군님께서 아마 선언문 5개에 보면은 김 이병이 잘못한 일도 박 대위가 잘 한 일도 다 따이한 잘하고 못한 일이 된다라고 그 당시에 장군님께서 그렇게 분명히 명령을 내리신 걸로 저는 그 자료에서 봤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장군님께서는 분명하게 가령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지만 아까 전화하신 참전용사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상황에서 지켜지지 않았을 거고…

유시민 / 사회자
이렇게 맺어야 할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여기서 잠깐 끊을 게요. 우리가 31만 명이 그 전투를 하면서 모두가 다 그 훈령을 100% 지킨 것도 아닐 것이고, 그죠? 그 모든 사람이 그걸 다 어긴 것도 아닐 겁니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디에 있을 텐데 지금 이 문제, 우리가 일종의 가해자로서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가한 피해, 또 우리가 참전 용사들이 입었던 고엽제 피해,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넘어가면 좋을지 그 문제에 관해서 좀 한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리영희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지금 고엽제 문제라던가 이런 문제는 사실 나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중요시하고 싶지 않아요. 이거보다는 우리 국민이 문제의식, 역사의식, 이런 것을 좀 높여주고 싶어서 베트남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 싶어요. 대국적인 역사의식이 이것이 펜타곤 테이퍼라고 베트남 전쟁의 극비문서입니다. 대통령과 장관과 군사령에게만 돌아갔던… 이것이 여기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정부가 거의가 내용이 발표한 것이 날조하고 위조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왜곡한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전쟁에…

지만원 / 군사평론가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 하나만 짚고 넘어갑시다. 용병이라고 그랬어요. 왜 용병이냐 했더니 결국은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니까 참전, 월남참전에 대한 의사결정 정책이 잘됐느냐 못됐느냐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런 얘기예요. 그런 얘기라면은 그렇게 표현을 하라 이거예요. 왜 용병이라고 그러느냐 이거예요. 모든 사람의 명예를 짓밟는…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의미라고 하면은 용병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그런 증거가 있으면은 그걸로 하고 논리가 있으면 그렇게 하지만은 아까 그 논리대로 라면은…

유시민 / 사회자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채명신 장군님하고 그리고 한홍구 박사한테 한번씩 제가 드리겠습니다. 이 고엽제 피해, 어디서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되고 우리가 가했으리라고 지금 상당부분 근거가 드러나고 있는 베트남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 우리가 국가적으로 보상하거나 배상해야 할 필요는 없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만 좀 간략히 좀 말씀해 주시죠.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우리 장병들의 피해는 국가가 마땅히 보상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해 나간 국가가 감싸주지 않으면 국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그렇게 안 하면은 이 다음에 국가 위기에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자기 희생할 사람 안나옵니다. 미군이 뼈대기를 갖다 주어가려고 하는 것도 그 뼈대기가 중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세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서 희생당한 사람 뼈 하나라도 모셔야 된다 그걸 보여주는 애국심을 키워주자는 건데, 우리는 뼈대기는 고사하고 산 사람 고통받고있는 거를…

유시민 / 사회자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 다음에 월남의 그런 상황은 만약에 그 사람들이 양민이었다면 그건 월남 정부가 조사를 해서 우리한테 통보를 해온 다음에 그 다음에 문제입니다.

유시민 / 사회자
네, 지금 진상조사를 하고 우리에게 통보해오면 우리가 적절한 어떤 대응을 하는 것은…

채명신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그건 그 다음 문제에요.

유시민 / 사회자
마지막입니다.

한홍구 / 성공대학 교수
저는 진상조사 문제에 관해서는 좀더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진상조사를 저는 우리 정부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군님 동감하시죠? 그 길만이 정말 전체 그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 될 것이고, 그래서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고엽제 피해같은 경우는 물론 궁극적인 책임은 미국 정부와 그 미국 제조회사에 있겠습니다만, 먼저 한국 정부가 고엽제 참전 그 피해자들한테 충분한 보상을 해주고 그 쪽에다가 그 보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의… 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시민 / 사회자
알겠습니다. 자, 그럼 우선 우리 정부가 고엽제피해자들에게 우선 보상을 해주고 나중에 보상권을 청구하고, 베트남 민간인학살, 또는 피해문제에 대해서는 양국정부가 적극 나서서 진상조사를 해야 된다는 걸로 일단 매듭을 짓겠습니다. 오늘 뭐, 여러 가지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 토론 어떻게 보셨습니까? 보신 바와 같이 팽팽하게 입장이 맞서지만 일정 부분에서는 서로 견해가 접근되고 대목도 많이 있습니다. 100분 동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토론이 시청자 여러분께서 여러분 자신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저희 MBC 100분 토론은 다음 주에 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시청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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