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렴치: 도가니와 도가니 법을 보면서 생각

2009/07/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들’의 소통법 – 공지영, 도가니, 창비, 2009

영화 <도가니>가 1주일만에 100만을 넘기고, 전사회적으로 ‘도가니 현상’이라는 게 등장하고 있다. 덩달아 정치권에서는 ‘도가니 법’을 입법하려 한다 하고, 동시에 인화학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넓어지고 있다.

그런데 인화학교에 대한 관심, 도가니 법 모두를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예외 찾기’와 ‘파렴치 씻기’다.

도가니를 통하여 국회가 기민하게 대응하는 까닭도, 인화학교에 대한 관심을 넓히고 있는 것도 사실은 모두의 ‘파렴치’를 ‘씻기’ 위함이다. 인화학교의 케이스를 ‘희생양’ 삼아서 비난하고 훨신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벌어지고 있는 우리 ‘내부 안의 폭력’에 대해서는 쌩까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분명 ‘일말의 양심’이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가니를 보고 분개한다. 이건 분명 필요한 파토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화학교를 예외적인 ‘미친 학교’로 취급하거나 ‘도가니법’을 제정하여 장애학교의 ‘몰상식’을 극복하는 것이 영화 <도가니>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하려 했던 궁극적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가카만 추출한다면 모든 게 행복해질 것만 같다는 김어준식 ‘도가니 법’과, 종북주의자만 쫓아내면 좌파가 수권할 수 있다고 믿는 구PD의 문법 모두 이러한 방식일 수 있다.

어디에서든 지금 제2, 제3의 인화학교가 발생하고, 비장애인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조직에는 쌍둥이 이사장과 행정실장이 암약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게 바로 당신이거나 당신 조직의 생리일지도 모른다. 모두의 파렴치에 대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야기 해야 하지 않나.

물론 이것이 ‘죄의식’이라는 개신교적 관념으로만 등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려 좀 더 가볍게 훌훌 털 수 있는 문화적 의례도 필요할 듯 싶다. 덩달아 제도화는 더 깊숙한 곳을 찔러야 하고, 동시에 윤리의 구성 역시 바짝 조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