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30 콘서트] 2011년판 허생, ‘스펙’에 울다

[경향신문 – 2030 콘서트] 2011년판 허생, ‘스펙’에 울다

33살 허생은 어느 명문대 철학과 박사과정생이었다. 3년 전 어떤 인문학 세미나에서 그의 달변에 반한 문학 석사과정의 대학원생과 사랑에 빠졌고 아이가 생기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벌어둔 돈이 없었던 허생 부부는 양가 부모의 도움으로 뉴타운에 선정되지 않은 서울 변두리 골목길에 있는 두 칸짜리 반지하방에 둥지를 틀었다. 방 한 칸은 서재, 다른 한 칸은 부부의 방으로. 당장 비가 오면 그의 반지하방은 밀려오는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집에는 늘 비린내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허생의 아내는 남편의 학구열을 지원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기혼 여자에게 정규직 일자리는 없었다. 과외를 4건 뛰고, 학원 강사까지 했으나 분유값과 생활비, 월세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외 비수기에는 월세 감당하느라 먹을거리를 사지 못해 친정에서 챙겨오곤 했다. 연애할 때 함께 갔던 독서 카페를 찾는 건 꿈도 못 꾼다. 아이는 아토피를 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생은 서재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뭔가를 썼다.
월세가 밀린 어느 날 허생의 아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논문 안 써? 빨리 끝내야 강사라도 할 거 아냐?”
허생이 미소를 짓는다. “아직 레비나스를 이해 못 했어.”
“레비나스를 1년째 잡고 있잖아. 공부에 적성이 없는 거 아냐? 차라리 유학가자고 말하지 그랬어?”
“학문의 식민지성을 뛰어넘으려면 국내에서 이론을 만들어야 해!”
“토플 따기 싫었던 것은 아니고? 아니면, 창업을 해보든가?”
“종잣돈 없이 창업을 어떻게 해?”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자기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허생은 읽고 있던 책을 덮는다.
“아깝다. 3년간 하이데거까지만 더 읽고 논문 쓰려 했는데….” 담배를 꺼내 문다. “예전에 철학과 선후배들도 대기업 넣으면 다 붙더라. 하여간 내가 대기업 들어가면 되잖아?”
아내가 못미더운 표정으로 말한다.
“거긴 만만해?”
허생은 대기업 하반기 공채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통해 큰일을 도모하려고 결심한 허생은 자신이 사회철학을 전공해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에 기업 전략 정도는 훌륭히 잘 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획·전략’ 부문에 지원했다. 허생은 삼국지의 모사들을 떠올렸다. ‘인문학적 스토리텔링’ 능력을 통해 50개 회사의 자기소개서 항목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100, 300, 500, 1000, 1500자 분량 제한이라는 장애물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글로벌 경제에 대응하는 철학적 통찰력”이 있다는 게 자기소개서의 요점이었다.
결과는 50개 ‘전탈(전부 탈락)’이었다. 황당한 허생은 취업 카페에 질문을 올린다. “도대체 내 문제는 무엇인가요?”
“나이가 너무 많잖아요” “왜 아직도 박사가 아니세요” 같은 ‘무난한’ 지적부터, “기획·전략 부문은 ‘님’ 같은 분이 아니라 재무·회계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원하는 곳이에요” 등 신랄한 ‘지적질’이 쏟아졌다. 친절한 조언도 이어졌다. “하반기는 포기하세요. ‘님’은 영어 자격증, 봉사활동도 없잖아요. 일단 토익을 950, OPIc IH나 토익 스피킹 7등급 이상으로 맞춰요. 그리고 무조건 분야는 영업이나 인사로 쓰세요. 면접에서 지금까지 뭐하며 살았냐고 물으면 대학원에서 정부 프로젝트 했다고 대답하고요.”
아내가 옆에서 같이 게시물을 읽다가 묻는다. “거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허생은 말이 없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