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30 콘서트] 취업 실패, 내 탓이오!

11월 중순 33살 철학과 대학원생 허생은 하반기 공채에서 50번 서류탈락을 당한 뒤 창가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허생이 취업을 결심한 후에도 아내는 여전히 과외와 학원 강사 알바를 뛰었고, 살림살이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달라진 것은 허생의 하루였다. 논술 시즌이라 바빠진 아내가 과외 하러 간 후 혼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허생은 서재로 향해서 노트북 전원을 켜고, 논문 준비를 한다며 레비나스의 책을 펼쳤다. “타자와 윤리”라는 다섯 글자를 읽다 말고 노트북을 만지기 시작했다. 혹여 메일로 합격을 통보한 회사가 있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 다음 취업사이트에서 날아오는 채용 관련 메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원할 만한 회사가 있는지를 스캔했다. 메일을 다 읽고 “허송세월이다” 말하고 컴퓨터를 덮겠다고 결심했지만 허생은 다시 취업카페를 뒤지고 합격수기, 합격스펙을 확인하며 취업의 조건을 따져보았다. 한참 지나 세살배기 아이가 놀아달라고 채근하자 “아차!” 외친 허생은 아이와 놀아준 뒤 책을 읽으려 했으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가 돌아와 저녁을 먹은 허생은 다시 책을 읽겠노라고 서재에 들어가 취업사이트와 취업카페를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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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박사과정의 허생은 ‘나이 많은 취업준비생’으로 변해 있었다. 그 이후 허생이 경험한 것은 다름 아닌 우울증이었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출근하면 통장 잔액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탈락으로 인해 좌절감, 죄책감, 허무감이 엄습했다.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기 시작했다. 초조함으로 불면증과 소화불량이 이어졌고, 담배와 맥주만이 유일한 치료제였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인기피증까지 가지게 되었다. 동료들의 문자를 씹기 시작했고, 학교 가는 날에도 누군가 안부를 물을까 불안했다. “잘 지내? 요새 뭐해?”라는 일곱 글자가 칠천근의 무게로 다가왔다. 현대철학과 자본주의에 대해 유쾌하게 논하던 허생은 사라졌다.어느 날 허생은 취업카페의 공지를 읽었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캠프의 무료 참가 이벤트였다. 1박2일의 캠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게 하고 진로탐색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철학과 박사과정 허생이라면 멘토링 캠프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며 욕했겠지만, 취업준비생 허생은 10만원이 넘는 프로그램이 공짜라는 말에 혹해 “꼭 참여하고 싶어요”라고 댓글을 달고 있었다.

허생은 산골짜기의 수련원으로 향했다. ‘나’를 찾기 위해 프로그램은 먼저 애니어그램이라는 심리테스트를 진행했다. 허생은 자신이 4번 유형임을 확인했다. 성격 유형상 자기소개서에서 너무 튀는 면만 강조해 취업이 안됐다는 것을 분석해낼 수 있었다. 또한 코칭 멘토 강사는 ‘자기 자신’을 찾으라 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해요!” “문제는 결국 자신에게 있어요!” “쫄지 마세요! 긍정의 힘!” 강사의 지시에 맞춰 박수치고 소리지르던 허생은 철학에서 배운 성찰적 태도를 잘 ‘활용’하면 다음해 상반기에 취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캠프에서 30대 취업준비생들과 모여 실패의 고백을 나누면서 위로를 받았다.

1박2일의 캠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허생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아내에게 말한다. “나 이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감이 생겼어!”

아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여기 또 환자 하나 생겼네. 아예 총기를 잃으셨구만.”

“뭐야? 내가 자신감이 생기고, 진로계획을 세웠다니까.”

“자기 바보야? 자기가 취업이 안되는 게, 내가 취업을 못했던 게 자신감과 진로계획 때문이었던 것 같아? 왜 세상을 보는 눈은 닫아버린 거야?”

“그래도…”라며 말을 이으려던 허생은 결국 말문을 열지 못한다.

(마지막 하편이 12월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