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엄마’, 통계 바깥으로 구출하라!([프레시안 books] 김고연주의 <우리 엄마는 왜?>)

1.

김고연주는 드문 여성학 연구자다. 그녀의 첫 번째 석사학위의 연구는 성매매를 하는 10대 여성들의 이야기였고(<길을 묻는 아이들(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2)>(책세상 펴냄)), ‘아카데미아’에 진입하는 자격증이라 볼 수 있는 박사학위의 논문은 석사학위에서 만났던 10대들의 경험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였다(<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이후 펴냄)). 그런데 여성학자로서 청소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여성학에서 가부장제(혹은 가부장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마다 남성지배와 그 반대로서의 ‘여성’, 소수자를 지칭할 때 등장하는 ‘배역’ 중 하나가 청소년인데, 실제 청소년에 대한 연구는 ‘생물학적 성인 여성’에 비해 많이 된 편은 아니었다. ‘다양한 삶의 맥락’을 소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의 말을 써내려 가자며, 인도 출신의 문화이론가 스피박이 말했듯이 “~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해보자면, 김고연주는 ‘발언권’을 많이 누리지 못한 10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애쓰는 연구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10대’에 대한 연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구 외에도 전문 인터뷰어인 김순천의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동녘 펴냄) 같은 책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김순천의 책 같은 경우 ‘불쌍한’ 10대를 이해하려는 시선과 한국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갇혔고, 그래서 그들을 ‘피해자’로만 묘사한 측면이 있었다. 동시에 절대 다수의 책들이 10대에 대해 말을 했지만, <대한민국 청소년에게="">(강신주 외 지음, 바이북스 펴냄) 시리즈처럼 인생 ‘선생’으로서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내용으로 기울곤 했다.

청소년들로부터 무언가를 듣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며,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책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늘 가르쳐야 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아이는 사실 근대의 부산물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한국에서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보이려는 시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디고 아이들’이나 ‘하자 센터’의 아이들, 그리고 몇몇 탈학교 공동체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정도였을까. 그런데 김고연주는 ‘여성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여성학자’로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 ‘엄마’에 대해 말을 한다.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2.

▲ <우리 엄마는 왜?>(김고연주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우리 엄마는 왜?>(돌베개 펴냄)는 청소년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지식과, 그에 대한 맥락을 사회과학적으로 같은 차원에서 분석하는 글쓰기, 인류학적 글쓰기를 진행한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여성학 교과서’의 진행을 취한다. 가족과 모성에 관한 최근 쟁점이 넓게 녹아 있으면서도, 아이들도 읽을 수 있게 쉽게 쓰여 있다. 낯선 개념이 등장해 “뭘까?” 싶을 때는 반드시 ‘빨간색 상자’가 튀어나오고, 개념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등장한다. ‘엄마’가 없어도 청소년들이 혼자 읽을 수 있다. 늘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한 여성의 눈에 맞춰졌던 여느 여성학 입문서보다 더 많은 쟁점에 다가갈 수 있고 스스로 따져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늘 10대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서도 지금의 쟁점에 대해 고민해온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내용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면, <우리 엄마는 왜?>는 두 가지 목적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목적은 어른들에게 냉정하게 ‘사태 파악’을 시키는 것이다. 김고연주는 이 책을 부모가 아이에게만 쥐어주지 않고 함께 읽으리라고 어느 정도는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줄 메시지가 중요하다. 아이가 잠들었을 때 슬쩍 훔쳐보게 될 어른들에게 줄 메시지. 철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아이들은 이미 한국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간파하고 있다. 아이들 자신도 아빠와 엄마를 통해, 특히 가장 많이 접하는 엄마를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이만큼이나 느끼고 있다는 점. 이 책은 아이들의 말과 그 못지않게 부드러운 말을 통해 독자에게 대화를 건네지만, 내용은 “미친 세상”, ‘난파선’과 같은 가족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만 같다. 한국사회의 가족이 ‘표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얼마나 엄청난 ‘강박’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지를 아이들의 입으로 확인하게 한다.

이 책이 겨냥하는 최종적인 ‘사태 파악’의 목표는 전업맘으로서의 매니저 엄마에 대한 비난이나, 워킹맘의 힘듦에 대한 이해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재하는 아빠를 만들어내는 노동 상황이나, 모성에 대한 신비 깨기, 싱글맘에 대한 편견의 문제점 드러내기 등 다양한 주제가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오가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외려 저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의 엄마들은 아이의 성취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기 때문에 여성 또는 인간이 아니라 ‘아이의 양육자’로 살게 되는 것이죠. 엄마는 기대하고 투자한 만큼 아이가 성취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여러분은 버거운 경쟁에 지쳐 가고 있습니다.”(56쪽)

“타인의 비난과 스스로가 느끼는 죄책감 때문에 워킹맘들은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한계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게 됩니다. 결국 직장일과 집안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서 누구에게도 책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빠지기도 합니다.”(91쪽)

사실 이러한 한국 가족의 현재에 대한 ‘사태 파악’은 최근 어른들이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버전’으로 나오기도 했다.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서해문집 펴냄)이 그렇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경쟁의 메커니즘과 정보통신기술 발전을 통해 손에 쥐게 된 스마트 미디어는 ‘압축적 시공간’의 경험을 엄마들에게 강요한다. ‘프로페셔널’로 일을 하면서도 아이에게 문자를 보내 타이르면서도 훈육하고, 학원비를 실시간으로 정산하고, 커뮤니티를 통해 입시 정보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육아를 완벽하게 관리해야 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학원 셔틀’을 돌리면서 ‘더’ 완벽하게 아이를 통제해서 ‘리스크 관리’의 책임까지 져야 한다.

그런 조주은이 보여주는 ‘정교한 분석’에 익숙한 이들에게, 어쩌면 김고연주의 책은 조금은 덜 분석적이고 무디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가장 궁극적인 이 책의 목표를 고려하면 달리 판단해야만 한다. 아이들에게 던지려는 메시지,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두 번째는 <우리 엄마는 왜?>라는 제목처럼 10대 아이들이 이것을 읽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아니 좀 더 나아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의 입장이라고 쳐보면 어떤 면에서 조금은 일방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계속 엄마를 이해해야 할 것만 같고, 또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각 절마다 있는 ‘빨간색 상자’에 들어있는 자세한 설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엄마 때문에 짜증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그런 엄마를 이해시킨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엄마의 모습’의 디테일이다. 학원에 ‘셔틀’을 돌리고 ‘치맛바람’을 휘날리면서 아이의 성공을 위해, 또는 ‘실패를 막으려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전업주부 매니저 엄마, 직장에서 문자로 잔소리를 해대면서도 일에서는 프로페셔널이기 위해 바쁜 ‘워킹맘’, 아빠 없이도 ‘티 안 나게’ 키우느라고 애쓰는 엄마가 등장하지만, 그녀들은 ‘엄마’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그 엄마들이 ‘엄마’로만 등장했다면 닳고 닳게 들었던 ‘헌신적인 엄마’로서 그녀들을 박제해 놓고 말았을 것이며, 아이들에겐 지긋지긋한 잔소리로 끝났을 것이다.

김고연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들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누이’였다는 사실, 여전히 그 역할과 경험이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그녀들은 ‘엄마’이면서도 다양한 생각과 습관과 성향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여자-사람’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이들과 나눈다. 그렇게 한 ‘사람’으로서 엄마를 대할 때, 서로의 변덕스러움, 취약함, 강함을 알게 되어 협상도 가능하다는 센스 있는 팁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는 일관적일 수가 없고 엄마에 대한 감정도 복잡합니다. 어떨 때는 엄마가 정말 좋고, 어떨 때는 엄마가 너무 미울 테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 엄마와 내가 생각이 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이럴 때는 엄마와의 협상이 필요합니다.”(254쪽)

이쯤에서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신사임당과 같은 엄마에 대한 기대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어리광’을 넘어, ‘어른스러운 협상’에 대해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3.

치명적인 한국 가족의 위기상황과 상관없이 <우리 엄마는 왜?>의 목소리는 비관적이지 않다. 김고연주는 더 이상 탈출구가 없이 실패하고만 있는 가족들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가능성’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고 뭔가를 본 것 같다.

여전히 비관적인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의 이야기와 그에 따르는 설명과, 또 그에 따르는 설득까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고 끄떡거리면서도, 더 많은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떠올린다. ‘구조적 모순’이 깨지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의 인식이 바뀌고 성인이 되었을 때 ‘부조리한’ 상황에서의 ‘협상’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좀 더 잘 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읽는 내내 불안했다.

▲ 윤태호의 웹툰 <미생> 중 한 장면. 완벽한 엄마와 직장에서 제몫을 해내는 사람을 동시에 요구받는 ‘슈퍼 우먼’은 비단 만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DAUM 만화속세상 </td> </tr> </table> 아빠가 가정으로 제 몫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려면, 일단 장시간 노동 체제와 한편으로는 잔인한 성과주의로 아빠들을 쪼아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엮어내기 위한 의례로서 ‘밤문화-회식’을 활용하는 지배적인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슈퍼우먼이 아니어도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걸 지켜낼 수 있으려면, 도대체 몇 개의 공공 탁아소를 짓고, 몇 개의 공동체가 공동육아를 해야 할까. 또 아빠들까지 육아에 책임을 가지게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호모포비아’에 ‘제노포비아’가 만연해버린 한국에서 다양한 가족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길러내고 제도적인 보장을 하려면 또 얼마나 피곤한 대화를 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아차 싶었다. 손쉽게 모두를 ‘피해자’로만 생각하고 절망적인 상황만 생각하다보니, 엄마를 ‘사람’으로 이해하고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성장과 배움을 너무 얕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성급히 굴다보면 아이들이 대화를 통해 얻게 된 성장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덫에 빠지고 있었다. 물론 ‘유의미한 해답’ 같은 게 분명 몇 가지는 있을 것 같다(여성 노동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빨리’ 뭔가를 해결하려는 습관 때문에, 엄마와 가족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서 헝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 <대한민국 부모="">(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td> </tr> </table> 사실 문제의 위치는 멀지는 않다. 언젠가 회사에서 <대한민국 부모="">(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의 저자 중 한 명인 이승욱 박사를 ‘아빠 특강’이라는 명목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아이들과 몇 년간 제대로 대화도 못 했다는 ‘소통에 실패’한 아빠들에게 그는 그렇게 된 구조적인 원인을 구태여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이와 아빠만의 시간을 권했다. 굳이 먼저 말하려하지 말고, 그저 추억이라도 만들라고 권했다. 아이들 스스로가 진단하는 아빠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지점부터 대화를 시작하라고 권했다. 엄마를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를 꼬이게 하는 것은 어쩌면 독단적으로만 구는 태도일 것 같다. 김고연주의 <우리 엄마는 왜?>를 3번 넘게 읽은 서른 살이 넘은 나는, 지금 이 순간 ‘일하는 엄마’이자 ‘밥해주고 과일을 깎아주던 엄마’이자 ‘친구들과 여행 가려고 들떴던 모습의 엄마’를 교차시키며 떠올리게 된다. 내 엄마에 대해 그리 많은 말을 해오던 나도 “엄마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취약한 방벽으로 지탱해온 것만 같다. 같은 위치에 서보는 것, 보이는 것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 매번 말로만 할뿐 잘 안 하게 된다. 더 내밀하게, 그러면서도 객관적으로 엄마를 잘 보지 않아왔으니, 어쩌면 그게 한국에서 자란 ‘남자애’로서의 내 지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