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도시를 볼 때 대학과 WLB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 – 조형제, 산업과 도시, 후마니타스, 2009

산업과 도시6점
조형제 지음/후마니타스

내생적 지역발전은 가능한가? 지속가능한 산업도시는 가능한가?

이 책은 울산대학교 사회학과 조형제 교수의 저작이다. 책의 질문은 표지에 써 있는 것과 같다. “내생적 지역발전은 가능한가?” 달리 말하면, “세계화와 산업 순환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산업도시는 가능한가?”가 그의 질문이다. 책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와 이탈리아 토리노에 대한 연구, 한국의 오래된 산업도시(부산, 인천, 대구, 울산) 등의 지역 산업정책의 변화, 산업도시에서의 거버넌스 모델 비교(부산과 울산) 등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각 장은 하나하나 발표된 논문인데, 유기적으로 엮여 “내생적 지역발전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름대로 보여주려 하고 있다.

지역에 위치한 산업의 성숙도와 지역 시민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라 2 X 2 사이즈로 대응모델이 나오고, 인천-대구-부산-울산을 각각의 위치에 대응시켜 어떠한 방식으로 지역 산업정책을 만들어 나갔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깨나 흥미롭게 보인다. 시민사회가 발전하고 제조업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울산, 시민사회가 발달했지만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부산, 시민사회가 약하고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대구, 시민사회가 약한채 여전히 제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천은 각각의 대응을 보이는데, 그에 대한 평가도 2014년 입장에서 다시 따져볼만 할 것이다. (아무래도 좀 시의성이 떨어지는 느낌은 있다.)

조형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의 다임러-벤츠와 협력업체와의 관계인 듯하다. 고숙련의 노동자들이 다임러-벤츠와 각 협력업체에 고용되어 있고, 협력업체는 지자체와 지역 인프라의 힘을 받아 연구개발(RnD) 역량을 강화하고 다임러-벤츠 뿐만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 기업에 부품들을 공급한다. 젖을 떼는 아이처럼 1990년대 이후 세계화 국면에서 다임러-벤츠는 협력업체와의 ‘종신계약’을 파기했다. 하이엔드 엔지니어링에 걸맞은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와만 계약하겠다는 방침을 수립했고, 많은 협력업체들이 구조조정에 노출되었다. 이 지점에서 ‘복원탄력성resilient’하게 지역 산업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 지자체 안에서의 기업-노동조합-시민사회의 ‘거버넌스’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버넌스는 ‘혁신주도’로 향했다. 피아트와 협력업체 사이에서도 1990년대 이후 비슷한 구조조정의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슈투트가르트와의 차이는 완성차업체 피아트와 다임러-벤츠의 전략 차이다. 피아트는 ‘원가 절감’의 관점에서 협력업체와의 관계를 개편했고, 이는 한국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경우다. 다시 돌아가 슈투트가르트는 ‘하이-테크’, ‘하이-엔드’ 자동차 산업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도시 전환의 과정에서 예전의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노동조합원들은 직무교육을 등한시하는 ‘인지적 잠금cognitive lock-in’상태에 있는 50대 노동자들을 해고해야 상황이 더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도 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면 조형제는 울산을 슈투트가르트의 경우처럼 협력적 거버넌스가 잘 발달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비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책의 관점으로 접근하자면 울산은 자본과 노동관계가 슈투트가르트와 달리 여전히 ‘갈등적’이고, 시민사회가 여전히 ‘협력 모델’을 잘 못 만들어내고 있다. (2014년 가을까지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는 단협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 협력업체들은 여전히 ‘원가절감’ 압박을 받고 있고, 연구개발과 연동된 업체들은 남양 연구소 근처로 이전하기도 한다. 여전히 울산은 ‘산업 혁신 클러스터’로 전환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잘 나가던 울산이 위태위태할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울산에 위치한 4년제 대학이 울산대, 영산대 밖에 없고, 노동조합이 ‘지역내 산업발전’보다는 매년 벌어지는 ‘임금 및 복지이슈’에만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 것, 지역내 산업 전문가가 부족한 것 등이 지적된다. 거기다가 완성차 업체 현대자동차가 생산직들을 ‘장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직무교육 보다는 노무적 관점에서의 ‘의식교육’ 위주로 교육을 운영하는 것도 지적된다. 다 맞는 말이다.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수도권으로만 가려는 이유 – Work and Life Balance는 함께 고려되어야 하지 않나?

그래야 할 것이다. 대기업의 조직이든, 중소기업의 협력업체 조직이든 학습조직으로 거듭나고, 지자체는 혁신을 추동할 수 있도록 학계와 시민사회를 엮어서 인프라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대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차원에서 협력업체들에 대한 연구개발비 지원을 더 늘여야 할 것이며, 동시에 협력업체들이 만들어내는 부품에 대한 인증제를 채택하여 혁신하려는 업체들이 더 성장할 수 있게 터전을 닦아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어딘가 시시하다.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나?”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사회적 신뢰’를 기업-정부(중앙/지방)-시민사회가 만들어나가면 된다는 거고, 그걸 ‘제도적 역량’ 혹은 ‘협력의 정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데, 그럼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건가? 나는 뭔가 ‘유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컨대 노동자이 ‘직무교육’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짜라짜라짜짜짜”하며 웃기는 강사가 진행하는 ‘의식교육’을 더 선호한다면? 그저 대기업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장치’의 결과라고만 해석할 건가? 그럼 답은 ‘직무교육’을 강화하고 고과에 평가를 반영하자는 식으로 답을 낼 건가? 연구자는 ‘노동계급’에 대한 판타지를 실제 노동자들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한 편, 지역내 대학과의 컨소시움을 강화하여 산업도시 인근에서 더 많은 ‘연구개발’ 활동을 하게끔 하면 ‘수도권’ 출신의 연구인력들은 더 직무만족을 하게될 것인가? 왜 현대자동차는 울산에서 경기도로 연구소를 이전시켰나? 조선3사는 왜 엔지니어링 센터를 수도권으로 짓고 있게 된 건가? 거기에는 ‘수도권 중심’의 사고로 가득찬 경영진과 연구인력들의 몰상식함만 있는 것인가? 물론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향 평준화’의 관점에서 지역균형발전의 방침을 잡은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산업의 발전이 지속됨으로써 도시가 발전하고 인프라가 더 확충되면서 선순환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저자의 입장일 것이다. 크게는 나도 동의한다.

이런 종류의 오해와 짜증이 자꾸만 발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존 산업연구, 산업사회학이 갖고 있는 ‘Life’ 즉 일터 바깥에서의 삶에 대한 무시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성 인력의 노동시장내 위치에 대한 질문이 있고, 산업도시가 빚어내는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고, 산업도시가 조형하는 소비문화에 대한 질문이 있으며, 산업도시가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개인과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이 조형제의 [산업과 도시]에는 누락되어 있다. 물론 주제를 좁히고 각 이슈별로 대답하고 그것들을 종합하다보니 놓쳤을 수는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남성) 산업연구자들의 관점이 보통 그렇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관점으로 질문을 해 보자. “산업도시는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도시인가?” “산업도시는 여성이 일하기에 좋은 도시인가?” “산업도시는 문화적 인프라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나?” “산업도시는 다양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가지고 있나?”

예컨대 도시 자체에 대학이 많다는 것, [산업과 도시]에서 2개 밖에 없어 안타까워하는 4년제 대학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똑똑한 인재들을 기업체로 유치할 수 있고, 산학연계 작업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텍 정도의 역량을 갖춘 공대를 많이 갖고 있다면 그 자체로 산업에 이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인가? 대학의 다수 입지가 말하는 것은 ‘문화의 전화’과 맞물려 있다. 쉽게 말해 젊은 애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 도시들이 갖고 있는 ‘공동체 문화’와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문화’와의 공존이 말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대략 떠올려보면 대학가 주위에 까페가 생기고, 혼자 밥을 먹는 카페테리아 풍의 식당이 발생하고, 커다란 도서관이 하나 들어서는 것이며, 대학생들의 놀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방대에 지역의 똑똑한 수험생들이 지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보’와 ‘인프라’의 부족 아닌가? 그것은 학교 커리큘럼과는 다른 결의 문제다. 그렇다고 한국의 대학이 미국의 ‘대학도시’ 같은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나? KAIST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낙관적인 답이 나오질 않는다. 많은 산업도시의 지자체들이 4년제 대학의 분교를 부랴부랴 유치하려고 하는 데 그냥 유치한다고 될 일인가? 고용보장만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문제나 여성의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구태여 더 보태지 않겠다. 수 많은 장거리 부부, 기러기 아빠들이 그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호시탐탐 ‘수도권’에서의 가족상봉을 바라는 이유에 대해서 산업도시가 나름의 솔루션을 주지 않는 이상, 도시의 혁신구상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많은 산업도시들의 평균적인 가족과 개인에 대한 문화적 인지는 수도권에 비해 한참 지체되어 있다. (아무래도 Male-Bread Winner 시스템이 여전히 잘 깨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협력사 비정규직들이 그 모델을 깨부수고 있는 중이긴 하다.)

이미 Work-Life Balance는 산업의 관점에서 생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각 회사가 인사제도 혹은 조직문화의 관점에서 WLB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삼성이 회식문화에 철퇴를 들고,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이유가 있고, 많은 청년들이 공기업과 공무원을 선호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직업의 ‘안정성’에 대한 고려 이면에는 “가족과의 삶”,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태도 변화가 있다. 세대 문제는 비단 사무직의 문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산직들이 직무교육에 대해서 회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Life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될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 살피는 내 입장에서 [산업과 도시] 만을 가지고 현재의 산업연구에 대해서 ‘단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른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 정도는 확인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