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평가와 2008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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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3366 size=3>군생활, 그리고 일상</FONT>

2007년 소위(小位) 시절이 끝났고 중위 진급후 6개월이 지났으며, 앞으로의 군생활 1년 반 중, 1년을 보낼 2008년이 다가오고 있다.

작년 한해, 70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30주 정도의 주간지를 읽었으며, 200일 정도의 일간지를 읽었다.

한겨레 신문을 9월부터 구독하여 보기 시작하였고, 한겨레21과 씨네21, 시사인을 보고 있다.

경향신문을 보고 싶었지만, 부대에서 볼 수 없는 관계로 한겨레를 보고 있고, 우석훈이라는 사람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서였다.

1월~3월까지 싸이트 생활(MIS)을 했고, 그 동안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고, 영어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유부단함과 상황 자체의 객관적 위기로 인해서 심적으로는 많이 불안했다.

4월부터 들어선 ADAS 체계로 진입하면서, 싸이트 생활보다는 조금 더 강도가 세진 근무를 시작했지만, 근본적으로 1MCRC 같은 팍팍함(미드 때에 잘 수 없는 것)은 줄어 들었고, 내 공부를 완전히 놓을 필요는 없었으며, OFF의 적당한 분배로 나름 쉬어가면서 근무할 수 있었다. 7월에는 13일간(-1 => 결과적으로 12일)의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8, 10, 12월에 F-주간조(주5일근무)를 했고, 9, 11, 08/1월초에 크루근무를 돌았다. 임관시 기준으로 12kg이 더 쪘고, 몸의 체지방률은 무지막지하게 증가했을 것이다. 크루를 돌면서 운동하지 않는 타성을 만들었고, 처음엔 활주로 한바퀴를 뛸 수 있었으나, 지금은 1km도 귀찮다고 느끼고 있다. 5월에 있었던 체력장 때까지가 내 maximum 체력이었으리라.

지속적인 F조를 보장받기 위해 한동안 complain을 계속했고, 덕분에 몇가지를 잃고, 한편으로 평판이라는 것에서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생각하고, 이건 어쩔 수 없는 자업자득이다. 계속적으로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데, 내가 지금 독배를 마신건지, 아니면 성배에 따라진 주의 보혈을 마신 건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하지만 한 가지의 변명을 하자면, 내가 원하는 것이 굉장히 소박한 것이고(off나 휴가가 아닌, 주말 보장), 그것 외에 원하는 것이 별로 없는데, 난 공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게 어른이면, 나는 아이가 될래.. 그 편이 나 아이 답답한 세상에.

<FONT color=#003366 size=3>경동교회 – 신학/신앙</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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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교회에 다시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고, 그건 8월, 10월, 12월(그리고 앞으로 한동안) 주간조 근무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동교회에 정착했고, 청년 경동이라는 공동체에 입주하게 되었다.(이제 27세가 되어 청년회로 승급했다. lvl up?)

기실 민중신학을 기대하고 2003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교회이지만, 2007년 내가 발견한 경동교회에는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과, neutral한 교회의 기풍이 좋아서 다니는 다수가 공존해 있었고, 목회자들은 약한 복음주의/약한 에큐메니컬리즘에 가까운 성향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아직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며, 일단 그걸 재단함으로 내가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성찰의 폭이 깊지 않고,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을 읽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 2007년 말이다.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으면서 기독교의 병패를 재확인 했고, 이현주 목사의 성서강의를 읽으면서 다시금 칼을 벼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교회에서 만난 김강기명형은 나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계열들을 버리지 않고 신학을 하는 활로를 만들어주기 시작했고, 교회 공동체에서 만났던 몇몇의 진보적 평신도들은 내가 갖고 있는 신학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까지는 없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 이에 대해서도 유보적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다. 매번 나에게는 똑같은 딜레마가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신학을 볼모로 잡는게 아니냐”는 강박감이 그것이다. 이 것의 해결이 2008년의 내 과제가 될 것이다.

<FONT color=#003366 size=3>사회과학-인문-학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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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이 시작되기 전까지 난, 들뢰즈-노마디즘 계열의 생각을 갖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순적이지만 순혈의 맑스주의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2007년 우석훈을 읽으면서 생태주의를 현실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 맑스주의 전통과 탈근대주의적 입장에 대해 엉거주춤하지 않고 관망할 수 있게 되었다. «88만원 세대»는 내 생각 방향의 전환의 중대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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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잘 나간다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김영하의 소설 등등을 읽을 수도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서 감각적인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고, 한글에 있어서는 최소한 문체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쉽게 쓴다는 것과, 유려하게 쓴다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허술한 번역의 난삽한 읽기 자체에 짜증을 느끼게 되어 한글 저자의 글을 아무래도 선호하게 되었다. 번역을 읽느니, 차라리 원전을 보겠다고 선포했었지만, 기실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정도였으리라.

공부에 대한 계획은 계속 가지고 있고, 조금씩 수정되면서 진행되었지만, 사실 어떤 궤에 따라서 진행되었다고 보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느낌에 따라서 읽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경향을 보자면, 1~3월에는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4월부터는 한동안 정치학 책을 읽었고, 7월~11월까지는 시사상식과 교양에 대한 책을 읽었으며 12월에는 학문론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2007년 200권 가량의 책을 샀으니, 70권 정도의 책을 읽은 것은 1/3 정도, 2/3은 장서용이 되어버렸지만, 별로 아까워 하지는 않는다. 그건 표정훈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올해 가장 끌렸던 저자 중 또 하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였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해박함과 논픽션으로 단련된 지식의 세계는 내가 가야할 길이 궁극적으로는 Generalist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했고, 40살이 되기 전에 “다치바나 다카시, 이제 당신은 집에서 손주나 보시죠.”라고 외치는 것이 나의 하나의 목표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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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는 아무래도 내 공부의 계획이 차기 정부와 목표와 마찬가지로 ‘실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자/PD(아직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지만)를 위해서 한국어능력시험/한자검정/TOEIC/TEPS를 취득해야 하며, 초반부에는 대학원 진학을 위한 TOEIC과 TEPS에, 그리고 후반부에는 한국어능력시험과 한자검정에 응시할 것이다. 2월부터 일단 제대일까지는 최대한 언론사 스터디에 개입하여 공부를 할 계획이며, 그러기 위해서 부대내의 협조가 필요하겠으나,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전속이 길이였으나,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SD와 SWAO1이 그 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전망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올 한해는 언론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닦는 해가 될 것이다. 신문을 매일 같이 볼 것이고, 주간지를 볼 것이고, 휴일에는 스터디와 내 공부를 할 것이며, 담배와 술은 최대한 절제하겠다.

그리고 매주 두권의 책을 볼 계획이다. 시간의 안배가 성패의 관건이 되겠다.

이제 바야흐로 필 준비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거다!!gk040000000001.xlsx</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