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세상을 읽고, 분석하고, 의미를 만들 것인가? – 나심 탈레브, 블랙스완

블랙 스완10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동녘사이언스

 

사회과학도가 할 일은 세상을 읽고(data gathering / reading / investigating), 그것을 분석하고(analysing), 예측하거나 통찰을 주는 것(understanding)이다. 세상을 읽는 방법론으로 질적연구(인터뷰, 현장조사), 양적연구(통계 및 센서스 조사)의 양대 입장(?) 속에서 문헌연구가 뒤따라 왔다. 각자 읽어낸 자료를 분석하는 방식은 읽어내는 방법을 따라왔다. 읽어내고 분석한 것은 예측과 통찰을 도출해내야 했다. 나는 질적연구와 양적연구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공부를 했다. 질적연구를 통해 석사학위를 마쳤지만 ‘숫자’에 대한 강박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또한 다른 시야를 갖추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와 이른바 ‘정치철학’ 모두를 내려놓고 인류학 방법까지 내려놓고 ‘통계’, ‘경제학’, ‘재무이론’, ‘산업공학’과 ‘컴퓨터 사고’, ‘데이터 과학’에 시간을 들이던 와중이다.

나심 탈레브는 마르크스주의적이거나 역사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공부할 지를 제공해준다. 문학적인 철학이 아닌, 칼 포퍼의 반증과 가설과 검증을 통한 과학적 이해 방법과 만델브로의 프랙털 이론 등을 활용한다. 2008년 경제위기라는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이 어려웠던 ‘검정백조’를 찾은 것보다, 이제 다른 방식의 방법론으로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싶은 내게는 그 방법론이 더 크게 느껴진다.

첫째, 검은 백조는 ‘극단값‘이다. 극단값은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대 영역 바깥에 놓여 있는 관측값을 가리키는 통계학 용어다. 극단값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검은 백조는 극심한 충격을 안겨 준다. 셋째, 검은 백조가 극단값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존재가 사실로 드러나면, 인간은 적절한 설명을 시도하여 이 검은 백조를 설명과 예견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희귀성, 극도의 충격, 예견의 소급 적용, 이 세가지가 검은 백조의 속성이다(22).

비단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도 사회과학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들에 대한 명쾌한 지적이다. 나 역시 스토리를 늘 만들어서 나름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손쉽게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이 역시 모두 검증되지 않은 오류라는 점에 대해서 뼈저린 공감을 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미 도래할 상황에 대해서 보여주는 ‘말 없는 증거’들을 놓치지 않는 철저한 의사결정과정을 거치는 것. 이른바 ‘시스템2’를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 준다. 만델브로든 포퍼든 이미 알려진 요인에 대한 과대평가/잘 알지 못하는 요인에 대한 과소평가는 불확실성이 재앙이 되게 만들 수 있다. 나 스스로의 의사결정이든 조직의 의사결정이든.

얼마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던 학자와 경제학 박사/금융공학 박사과정 등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경제학과 금융공학 모두에 문외한이고 고작 정치경제학을 조금 읽었던 처지에서 코멘트 할 순 없지만 논쟁에서 느껴지는 어떤 불편함이 있었다.  바로 ‘정상과학’에 대한 무비판적인 확신이었다.

“그건 전혀 다른 게임이었다니까요.”“극단점이 터져 나오는 통에…” (..) 나 같은 과학자가 다루는 영역 밖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이다. (..) 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홍수처럼 극히 낮은 확률에 따른 사건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그저 우리가 운이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렇게 게임판을 축소시키고 주어진 조건에만 자신의 능력을 한정시키는 변명은 헛똑똑이들이 사회적 현상을 수학적으로 읽지 못했을 때 내놓는 단골메뉴다. 분석틀은 옳았고, 잘 작동하고 있었다. 다만 상황 자체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260-261)

본인들이 배워온 ‘정상과학’의 진단력에는 크게 문제가 없고, 다만 정부의 개입 등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방식의 반박. 2008년 위기 이전 주류 경제학과 금융공학이 과연 위기를 진단 해낼 수 있었나? ‘정상성’의 범주를 기초로 정규분포를 통해 추론하는 입장에서 위기는 언제나 분포 바깥에서 벌어지는 ‘예외’일 따름 아닌가? ‘극단점’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탈레브는 그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며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계산 가능한 위험이란 실험실에서만 포착되는 것이다!“(225) 규모 가변성의 세계에서 그것들은 통하지 않는다.

탈레브의 이후 저작 [안티프레질]을 쟁여놓고 읽지는 않았다. ‘바벨 전략’ 등 이미 투자 차원에서 많이 언급되는 이론들이 있다. 이것들을 따져보는 것도 중요할 테지만 [블랙 스완]을 통해서 지금 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들은 아무래도 어떻게 세계를 읽고 분석하고 이해할 것이냐의 방법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들이다. 작은 실수들은 상관 없지만 큰 실수가 패착을 만들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탈레브는 책에서 언급하는데 중요한 선택이 도래할 시점에서 곱씹고 또 곱씹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마지막으로 박식함과 공부의 방법에 대한 언급이 재미 있었다. 번역문임에도 귀기울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걸 보면 실제로 보았을 때 탈레브가 얼마나 재미난 사람일까 싶긴 했다. 이제 되도록 짤막한 뉴스는 끊고 더 많은 책을 읽겠다. 손쉬운 서사와 개념으로의 환원보다는 디테일 하나 하나 결을 잘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선 서울대 학생들의 공부법이 옳다? 토시 하나 놓치지 마라!

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233).

박식함은 진정한 지적 호기심의 징표다. 자연히 열린 마음과 타인의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딸려 나온다. 무엇보다도 박식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러한 불만족은 플라톤적 태도, ‘5분 경영학’의 단순화, 또는 과도하게 축소된 특정 분야 학자의 속물성을 차단해 주는 방패 구실을 해준다. 단언하건대, 소양 없는 학위는 재앙을 낳는다(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