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방에서 섹스 못하는 청년에서, 결혼 못하는 청년으로? 무슨 차이인가?- 우석훈, [솔로 계급의 경제학]

솔로 계급의 경제학8점
우석훈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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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박권일)의 히트작 [88만원 세대]의 처음 기획 당시 제목은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고 했었다. 우석훈은 한국에서 청(소)년이 첫 섹스를 언제 할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한 기반은 무엇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었다고 전한바 있다. 그러한 주제의식은 서문에서 10대 여학생이 임신을 했다고 가족에게 말했을 때의 한국과 프랑스 가족의 반응 이야기를 통해서 풀어져 나온 바 있다. 우석훈이 가지고 있는 생태(경제)학적 백그라운드에 ‘세대 착취’라는 말과 ‘세대간 경쟁’이라는 개념들이 어우러져 2007년 그는 사회과학 히트 저자가 되었다. (그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서평이 이 블로그에 있으나 구태여 링크 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때의 내 생각과 지금의 생각에 변화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읽은 책(사실은 2주 전쯤 읽었지만) [솔로 계급의 경제학]에서 떠오른 게 바로 그 ‘첫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 “맘 놓고 섹스할 수 없는 상황(비혼 청년의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지니 ‘결혼’ 안 하고 못 하게 생겼다는 거 아냐?” 정도 짧게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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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잘 만지는 사람들이 있다. 말과 글을 잘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숫자를 잘 만지면서 말과 글을 잘 풀어내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말과 글을 잘 풀어내면서 숫자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꽤 된다. 인문학 글쟁이들이 경제 현상에 대해서 담론 수준에서의 비평에 그치면 좋았을 것을 괜히 데이터에 대해서 엉성하게 접근하다가 병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숫자는 잘 만지지만 그걸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지 못해서 아주 드라이한 글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다.

우석훈의 장기라면 숫자가 주는 현실에서의 ‘스케일’을 말로서 잘 풀어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방식.

“지금 부모들이 지불하는 베이비시터 임금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현실성 있는 수치는 월 160만 원 정도이다. 자신의 부모에게 육아 도움을 받는다고 할 때, 딸이 어머니에게 용돈 명목으로 지불하는 돈은 80~100만 원 정도 된다. 적게 잡아도 월 150-200만 원이 육아에 들어간다.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할 경우에는 본인의 임금 손해분이 100만 원 이상 추가로 발생한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초등교육까지 평균적으로 지불되는 돈이 다시 대략 1억 원이다. (….)  여기에 한국 주택의 평균 비용인 2억 5,000만 원을 더해보자. 5억 5,000만 원이 나온다. 그리고 그 비용은 어지간한 회사원이 평생 모을 수 있는 최대 예금치인 6억 원에 거의 근접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평생 일하는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배우자만을 위해서 온전히 쓸 수 있는 돈이 평생 5,000만 원인 셈이다. (….)  이런 비용 구조 등을 고려하면 지금 한국의 중산층 자녀가 중산층으로 재생산될 가능성은 없다. 중산층들도 출산을 미루기 위해서 결혼을 뒤로 미루는 상황, 그것이 이기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어 보인다. 결혼과 출산을 둘러싼 세대 간 갈등은 점점 더 ‘세대전쟁’의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50-52).

요 몇 년 선대인이 쓰는 글쓰기와 우석훈의 글쓰기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일단 글쓰기 스타일에서 선대인은 보고서형 글쓰기를 쓰고 우석훈은 보고서형 글쓰기 대신 에세이나 에스노그라피의 형식으로 ‘내용적’으로만 보고서처럼 쓴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프레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이 ‘나꼽살’을 했다는 점 말고는 특별히 비슷한 지점이랄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러한 스타일 때문에 우석훈의 글쓰기는 직장인들을 포함하여 누가 읽어도 쉽게 읽힌다고 말할 수 있다. 찬찬히 뜯어보면 굉장히 따져볼 게 많은 내용이긴 한데 그건 아무래도 ‘읽기의 방식’에 따라서 큰 편차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깊이 따져볼 지점을 공지영의 소설처럼 속도감 있게 쓰다보니(본인의 표현으로는 ‘한 붓 글쓰기’) 논리의 ‘비약’이랄 게 많다는 것 정도를 지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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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골자는 취업하여 독립하고 결혼하여 출산하는 1960~2000년대를 지탱해왔던 가족의 형상이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솔로 계급이 탄생하고 있다. 결혼을 택하지 않거나, 못 하거나. 결혼을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출산과 육아-교육으로 이어지는 ‘계급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테크트리를 모조리 밟다보면 거의 적자운영에 가까워지고 그러다보면 결혼을 포기하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 실제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를 위해서 산아제안을 요청했던 맬서스의 우울한 전망이 21세기에 자발적으로 한국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 편 그러한 상황에서 강제되기도 하지만 ‘선택’하기도 하는 싱글턴(singleton)들의 라이프 스타일 등에 대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왜 서울 중심부 오피스텔에서의 삶을 젊은 전문직이 원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솔로계급의 경제학]에는 여러가지 데이터들이 잘 녹아 있기 때문에 그 데이터 나름대로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88만원 세대] 이후 대부분의 우석훈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일이지만 뒤로 갈수록 “늘 듣던 이야기”의 ‘미세한’ 변주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된다. 사실 책이 호명하는 ‘솔로계급’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는 ‘저출산 사회’ 그리고 ‘고령화 사회’에 대한 기사나 책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글들에서 정부의 노인 장년만 고려하는 정책의 실패와 맞벌이를 힘들게 하는 기업의 조직문화와 제도 등에 대한 규탄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쓴 것인가? 그럴 때는 결론을 보게 되는 건데.

내가 한 가지를 바란다면, 지독할 정도의 지금의 중앙형 시스템이 이런 충격과 혼동 속에서 분산형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솔로가 아니라 비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 아니라 비혼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이 아닌 곳, 대기업이 아닌 곳, 공무원이 아닌 곳, 그렇지만 자기의 꿈이 있는 곳으로 분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위기를 지난 이 시스템에 희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혼이 아니라 ‘비자발적 솔로’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며 중앙형 시스템의 코어, 그 핵심으로 모두 들어가려고 하면 이 중앙형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진다. 서울만 남고, 맨 앞의 대기업들만 살고, 공무원만 살아남는다. 원심력은 사라지고 구심력만 남은 시스템은 결국 붕괴한다(297).

동의하지 않을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특히나 지방 산업도시에서 1년의 5/7을 보내는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우석훈의 거의 모든 책을 읽는 입장에서 보면 ‘솔로계급’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이것 뿐”인가 싶다는 것이다. 늘 하는 생태학의 ‘다양성’과 ‘돌연변이’ 타령 그리고 ‘복원탄력성resilience’, 리차드 플로리다의 ‘창의도시’, 귀농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냐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계급’의 사회나 ‘섹스리스 youth’나 무슨 큰 차이가 있다고? 독립을 못 하거나 안 하거나 / 결혼을 못 하거나 안 하거나. 제도적 선택 하나 빼고 크게 뭐가 다른가?

[솔로계급의 경제학]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나온 [불황 10년]은 차라리 개개인들에게 필요한 ‘솔루션’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유용성’을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난 사실 똑같은 프레임으로 약간의 변주를 줘서 던진 이 책에 대한 별 감흥을 느끼기가 어렵다. ‘노인’ 우대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빡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고, 지난 정부부터 발생한 청년층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 온당하겠지만 이건 그냥 별 이야기가 아닌 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게 불만이다. 한 때 우석훈의 동료였던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만약 지금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텍스트북이라면 [디버블링]으로 충분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