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윗홈과 싸우기 – 명절을 맞아

비혼의 적적함에 대비되는 기혼자들이 꾸리는 “달콤한 나의 집”, 이른바 스윗홈.

이미 수백 만 비혼자가 명절에 혼자서 밥을 차려먹고 밖에 나가 외식을 하는 이 마당에, 아직 단련되지 않은 느슨한 무의식에는 기름내를 풍기면서 전을 하고 국을 끓이는 아내와 그 옆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판타지가 함께 자리한다.

사실 거창한 가부장제라는 빅브라더와 싸울 필요가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과 싸울 것인지, 목표물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략을 세우고 전술을 세우면 되는 것이다.

스윗홈에 대한 판타지는 이상한 이물감을 만들어낸다. 먼저, 밥. ‘아내가 내주는 밥상’, “한 끼쯤은 차려주는 밥을 얻어먹고 싶다.” 이런 언설로. “엄마가 차려주던 밥상”, “엄마가 늘 내어주던 그런 밥상이 먹고 싶어.”의 발현이랄까. 사실은 밖에서 매일 사먹고 있는 주제이면서 입맛은 외식에 길들여져 있으면서도 그러하다. 물론 한끼 내주는 밥 먹는 게 어떤가? 어느새 “신문보고 스마트폰 만지작 거리며 밥상 맡에서 기다리는 남편”이 되어 “밥 차려주는 아내”를 오매불망 원하게 되는 성역할을 은연중에 떠올리는 게 문제지. 그러면서 딸바보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이 묘하게 교차된다는 것이 함정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차승원처럼 셰프가 되어 칼을 휘두를 요량도 안 갖고 있으면서.

때로는 정돈된 집안에 대한 이상한 이물감도 만든다. 어디 여행갈 때 셔츠, 타이, 외투, 양말, 속옷에 대해서 스스로 꾸리는 것이 뭔가 ‘비루’해보이고 ‘처연’해보이고 ‘남루’해보이며 ‘찌질’해보이기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누군가 잘 다려준 셔츠가 받고 싶어지고, 돌돌 말아서  예쁘게 ‘넣어준’ 캐리어의 가지런한 속옷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삶은 그냥 ‘혼자 사는 찌질한 삶’이 되는 것이다. 결국 ‘받아내는 것’이 ‘스윗홈’의 ‘정상’에 등극하게 되는 순간. 사실 30 넘어서도 그런 거 안 되면 기능장애가 있는 것이니 얼른 배우든가 치료하든가 해야하는 것임에도.

얻어먹는 것에 대한 고마움, 돌봐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 이걸 도무지 탑재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사실은 지금까지 누군가가 ‘지 꺼’를 해줬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

대단한 것과 싸울 필요가 없다. 외려 소소한 것이다. 귀찮음과 익숙하지 않음에 대한 도전이라면 도전일 것이다. 여기에 뭔가 페미니즘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색하다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태여 ‘큰 이름’으로서 가부장제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익숙한 부모 세대의 스윗홈에 대한 판타지와 싸우는 것. 그리고 스윗홈과 연계된 하나하나 상상된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 우렁각시를 원하는 만큼, 우렁총각을 원하는 여성이 있다는 타자성에 대한 자각. 명절에 오염되지 않아야 할 무언가가 아닌가 싶다. 명절음식하는 엄마 돕겠다고 덤볐다가 버벅대서 망칠 것만 같다면, 잠잠히 자기 역할과 자기 파트너에 대한 생각이라도 정리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 고향앞으로 보내놓고 혼자 밥해먹으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