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직 노동의 가치와 숙련

캐슬린 쎌렌, <제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신원철 옮김, 모티브북, 201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35464 (품절)

2012년 대우조선에 입사하면서 샀던 책이다. 회식 열심히 할 때라, 회사 개인 책꽂이에 꽂아만 두고 챕터 하나만 읽다 말다 하다가 덮었다. 사실 그 때는 이 책을 읽었어도 전체적인 그림이 전혀 그려질 때가 아니라서, 이제서 빛을 발하는 책.

책은 독일, 영국, 미국, 일본의 ‘숙련체제’를 다룬다. 숙련은 몸에 밴 일머리일 수도 있고, 일에 대한 지식일 수도 있다. 무난하게는 두 가지가 합쳐진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숙련은 개인적인 것일 수 있으나, 사실 숙련은 기업∙산업∙국가의 수준 마다 정의할 수 있다. 공장일을 각자 깜냥으로 익혀다가 할 경우 우리는 이런 걸 ‘주먹구구’라고 표현한다. 회사 단위로 생각해 보면 내가 쉬는 날에는 누군가가 대체할 수 있어야 하고, 내 작업을 누군가다 다음 공정에서 인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논리는 산업, 국가 단위로 확장할 수 있다.

국가별 숙련 체계는 국가 내부적으로 숙련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작게 보면 숙련을 어떻게 형성시킬지(직업교육)의 문제가 있고, 조금 더 넓게 보면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숙련에 국가가 어떠한 방식에서 개입할 수 있냐의 문제(계속교육/평생교육)와 노동자들이 퇴사할 경우의 재교육 쟁점까지도 포괄한다. 저자는 맨 앞의 숙련 형성의 질문만 좁혀서 다룬다.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로 숙련의 대상을 좁힌다. (사실 엔지니어까지 범주를 높이면 고등교육의 문제가 함께 따라온다. 그러면 논의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숙련 형성이 어느 나라나 비슷할 것이라면 이 책은 탄생할 수 없었다. ‘숙련의 (비교)정치경제’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독일, 영국, 미국, 일본의 숙련체제를 다룬다.

쉽게 요약하자면 책이 쓰여진 시점에서 독일은 경영단체들의 연합과 수공업체의 연합 그리고 노동자들의 상급단체가 함께 모여 숙련을 관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숙련이 표준화되어 있고, 그러한 기반에서 10대 청소년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직업학교 진학이 결정되면 앞으로의 진로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 즉 수공업체나 대기업에서 도제교육을 2~3년 정도 이수하고, 근처 기업에 생산직 노동자로 채용이 된다. 도제교육은 숙련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동시에 일하는 작업장인데, 독일에서는 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시스템의 형성은 비스마르크 정권이 노동조합을 억제하기 위해 수공업자들의 도제시스템을 인정해 줬고, 그들로 하여금 초기 도제훈련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서 노동자들의 ‘숙련통제’를 막았던 기원에서 출발한다. 나중에는 노동자들이 우수한 숙련 제공을 할 수 있게 참여하고, 수공업자가 아닌 대기업의 직업훈련소에서도 도제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초기의 셋팅이 많은 것들을 정했다.

숙련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영국은 노동조합과 자본가들이 싸우다가 망한 경우. 영국의 법률은 노동과 자본이 싸울 때 특별한 편을 잘 들지 않은 전통이 있었다(대처 이후 제외). 노동조합이 힘이 세면,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을 방어하기 위해 신규 노동력 공급을 억제했고(크래프트 컨트롤), 이는 도제훈련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와 연결이 됐다. (러다이트 운동과 비슷한 느낌) 반대로 자본가들이 힘이 셀 때는 노동자들의 크래프트 컨트롤을 박살내고, 대규모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뽑아 자신들의 양성 시스템으로 키워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다시 노동조합이 힘이 세지면 다시 크래프트 컨트롤을 강화하고. 무한 반복. 그러다 보니, 작업장 마다, 기업마다 숙련의 편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국가적으로 ‘높은 수준의 숙련’을 균질하게 만들지 못했다. 도제훈련의 기간도 5~7년으로 숙련 형성과 상관없이 비탄력적으로 길었다. 나중에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노동자들의 통제력은 상실되고, 자본가들은 숙련을 절약하는 기계장비를 돌입하고.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숙련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상실했다. 작업장의 역학관계상 노동자들은 싸움에서 많이 이길 수 있었으나, 숙련의 약화로 인해 1970년대 이후 영국 제조업은 파멸적 결과에 이른다.

미국은 우리가 생각한 ‘자동화’의 세계. 도제 시스템은 자본주의 생산 초기부터 별 힘을 쓰지 못했고, 국가는 도제 훈련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선구적인 자본가들은 숙련노동자들을 포섭하여(포어맨foreman) 반장/직장 정도의 관리직 포지션을 주다가 사무직으로 전환했고, 노동자들을 교육하려는 선구적인 몇 개의 기업을 제외하면, 인사관리를 강화하면서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쪽으로 관점을 잡았다. 노동자들의 숙련형성 동기는 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에서 ‘인사고과’를 주는 것처럼 숙련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적 관점에서 고과를 줬다. 국가는 직업교육보다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대학에 가서 관리자가 되라고 했다. (높은 대학 진학률) 그러면서 생산관리 관점에서는 테일러주의 시스템, 포드주의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생산성을 높이는 자동화 설비들을 강화하면서 노동자들의 숙련이 필요없게 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일본. 일본은 수공업자들이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사내하도급을 관할하는 ‘업주’(오야카타)들로 전환됐다. 이들은 숙련된 노동력을 이 업체 저 업체에 제공하면서 옆에서 ‘커미션’을 먹는 체제를 만들었다. 기업과 노동조합은 공동의 이해를 갖고 오야카타의 숙련제공 체제를 와해시킨다. 기업은 회사 내 ‘직업훈련소’를 만들어 숙련 노동자들을 양성했고, 숙련 노동자들을 붙들기 위해 그 유명한 ‘연공서열제’와 ‘정년보장’을 약속한다. 연공서열제는 ‘지속적인 숙련’을 다짐한 노동자들과 자본의 약속 안에서 구성된 합의였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관념보다 ‘회사’에 대한 관념이 많은데, <현대 엔지니어와="" 산업="" 자본주의="">에도 나오듯이 그들 각각은 "나는 배관공이야"가 아니라 "나는 도요타맨이야"라고 말한다. 회사가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노동자는 숙련을 '축적'하면서 상호간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한국의 숙련이라는 것은 어떤지를 좌표를 그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1970~1990년대 기계공고를 나와 대개 회사가 제공하는 직업훈련소를 통해서 초기 숙련을 형성했다. 그리고 연공서열제와 정년보장 체제 안에서 2010년대까지 일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숙련체제는 일본과 비슷한 궤적을 밟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 기업들은 미국식 숙련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아마 1987년 이후였을 것이다. 1)생산설비, 생산기술, 엔지니어 위주의 공정관리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투자를 하게 된다. ‘생산직의 숙련’을 무용하게 만드는 준비를 했던 것이다. 2) 다수의 미숙련 노동자들은 일본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야카타들을 통해서 활용했던 사내하도급을 통해서 충원했다. 오야카타들은 나름의 ‘베테랑’들을 양성하면서 숙련을 관리했지만, 한국에서는 원청이 숙련을 특정한 수준에서 대리인 사내하도급 업체를 두면서 원격관리한다. 사내하도급 업체는 숙련을 관리하는 것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예전 원청 정규직 생산직을 양성했던 대기업의 직업훈련소는 사내 하도급업체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기능으로 변화한다.

한국은 일본의 숙련레짐에서 시작해 미국의 그것을 혼용한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 정규직 생산직에 대한 해고가 미국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사내 하도급이 도입된 것이겠지만, 그렇게 운영되는 동안 사내하도급과 원청 노동자들간의 ‘이중 노동 시장’(신원철, 2001)이 강고해졌다는 점은 모순적인 노동체제를 만들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숙련의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이 숙련을 ‘축적’하기로 한 약속이 만들어 낸 ‘연공서열제’와 ‘정년제’라는 것이 원래 계획한 효과를 전혀 내지 않고 있다. 많은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은 ‘직업 생산 업무’ 대신 ‘생산지원직’을 꿈꾸고 있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해도 호봉만 올라가면 봉급은 같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연공서열제와 정년제를 깨는 대신, 그게 없는 ‘유연한 노동력’의 양성을 외주주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중이다. 즉 약속은 깨졌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구체제(정규직 생산직-연공서열제-정년보장 체제)의 노동자들이 퇴사하고 났을 때 도입될 “미국식 X 초유연성 노동”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많은 노동조합들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처럼 퇴직하는 인원 만큼 정규직 인원을 똑같이 충원하라고 할 생각이지만, 현재 기업들은 내가 볼 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가 푸시하고, 시민사회가 푸시할 때마다 ‘찔끔’ 뽑을 정도의 요량은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귀족 노조’를 규탄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약속’이 맺어지지 않을 경우 돌아올 생산직 노동자들의 ‘파멸적 결론’이 눈에 훤해 입맛이 쓸 따름이다. 이쯤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일자리 나누기’나 ‘무급휴직’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자리를 나눈다는 것은 곧바로 높은 수준의 ‘고정비 부담’을 전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많은 제조업들이 갖고 있는 ‘하루의 공정 관점’에서 볼 때 실효성이 너무나 떨어진다. 아침 8시부터 전력량이 피크가 되는 것으로 최대의 생산성을 뽑아내려는 기업 관점에서 잦은 교대로 인해 벌어지는 ‘낭비 시간idle time’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정 마감이 안 되어 하루에 급하게 평소 인원의 10배 이상을 투입해야 할 때 이러한 정규직에 기반을 둔 ‘일자리 나누기’는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잘 되지도 않을 것 같지만 ‘직무급’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도, 이미 현재의 정규직의 복리후생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을 전제하고 하는 ‘광주형 일자리’를 정부가 모범사례로 확산시키려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전제 안에 있다. 1억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세계는 길어야 10년이 남았다. 그 이후에는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의 인건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를 0명으로 유지하는 사업장들이 늘어날 것이다. 늘 ‘고정비 절감’에 대해서 강박을 갖고 있는 모든 제조업체는 다른 종류의 ‘협약’을 하지 않는 이상, 결국 ‘엔지니어의 숙련’만 필요한 사업장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때 조직화된 노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가?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쟁의와 투쟁을 전개중인 두 개의 사업장이 생각난다. 하나는 대우조선, 또 하나는 부산의 르노삼성이다. 정규직 이상의 연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거나(이념적 지지보다 더 깊어야 할), 기업에게 큰 장악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이기기 힘들다. 그 핵심에 ‘숙련’의 평가가 있다. 무엇을 좀 해야 할까? 결국 단위 기업별 노동조합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노동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숙련’에 대해서 노동계가 더 관심을 갖고 정교한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숙련이 중요하니 정규직 노동자를 뽑아야 한다”는 수준으로 아무리 큰 소리를 내 봐야, 그 말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세계가 됐다. 심지어 ‘숙련의 왕국’ 독일에서도 이제 대학 진학률이 50%를 돌파했고, 청소년들은 생산직 노동자가 되기를 싫어한다. 노동의 시대가 종언된 것은 아니지만, 싸워야 할 장소의 지형은 무지막지하게 변했다.

<제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는 한국을 벗어나 '선진 제조업 강국'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시선을 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저작이다. 저자 슬린 쎌렌은 숙련의 문제를 최근 부상하는 실리콘밸리의 '공유경제' 등의 노동체제에까지 확장시켜 살펴보는 중이다. 이 책과 더불어 국역된 <현대 엔지니어와="" 산업자본주의="">를 살펴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 형성된 산업자본주의라는 것과 그 작업장을 채우는 생산직 노동자 그리고 엔지니어의 일에 대한 구조화된 조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벽돌책은 아니더라도 내용이 촘촘해 빨리 읽히지는 않지만, 기회만 된다면 일독을 권한다. ![how institution evolve](https://images-na.ssl-images-amazon.com/images/I/41UtJ3kP03L._SX331_BO1,204,203,200_.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