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사회의 관계 맺음에 대해서 – (이현주, <그리스도의 몸 교회>, 2006)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해서</FONT></STRONG>

이제 두 번째 권이다. 첫권에서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기점으로, 이제 기독교인과 사회에 대한 문제를 건드린다. 항상 말이 많은 부분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에서 병리 현상으로 인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무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비판만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독교가 욕을 먹게 되는 이유는, 교회가 사회에 비추어지는 측면에 있다.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들은, 그러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현주 목사의 ‘지식’에 대한 그리고 ‘신학’에 대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인식이 있다. 중요한 건 인식(episteme)가 아니라, 실천(praxi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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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수의 구원을 믿고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실천을 담보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괜시리 도올 김용옥의 ‘쿵푸’(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의 단련(실천)과의 공부와의 관계.

그럼 우리는 어떤 것들을 실천해야하는가? 교회에 갖가지의 헌금을 내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일?

사실 ‘교회’에 대한 규정자체가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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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특정한 ‘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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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가? 여기에 이현주 목사의 지론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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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과 약함을 통한 기존 강인한 질서의 전복 혹은 변화. 그것이 요체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생에 대한 강요,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들며, 그러한 ‘엄숙함’이 기실 모든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멍에가 되고 억압기제가 되지 않았냐는 생각역시 든다. 그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의 문제를 난 지적하고 싶은 거다.

우리는 엄숙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신학에 대해서 꿈꿔야 하지 않는가?? 해방자라는 것 역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근본적 문제(교회와 사회의 관계, 교인이 사회에서 취해야 할 입장)을 도그마가 아닌 아젠다로 던져준다는 점에서 굉장한 성과를 나는 얻는다. 좀 더 생각과, 실천을 통해서 정리할 것이지만 사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책에서 얻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