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로 쓰는 글쓰기와 영감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실제로 해보면 아마 아실 텐데, 날마다 대여섯 시간씩 책상의 컴퓨터 화면 앞에(물론 귤 박스 위 원고지 앞이라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혼자 앉아 의식을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면 웬만한 체력으로는 도저히 당해내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182)

나는 전업 작가가 되면서부터 달리기를 시작해 삼십 년 넘게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달리기나 수영을 생활 습관처럼 해왔습니다. 몸이 애초에 튼튼하게 생겼는지, 그동안에 컨디션이 크게 무너진 일도 없고 팔다리를 다친 일도 없이, 거의 빠짐없이 날마다 달렸습니다. 일 년에 한 번은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고 철인레이스에도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184)

날마다 달리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 자신은 오래도록 뭔가 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달리다 보면 물론 몸은 건강해집니다. 지방은 줄고 균형 잡힌 근육이 붙고 몸무게도 조절됩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니다, 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좀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 라고. 하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나도 확실히 알지 못했었고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186)

강고한 의지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가 문제가 됩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198)

 

15년도 전에 휴대폰 TV 광고(걸리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은 찾으셨나요?”라는 말 때매 [상실의 시대]를 읽고나서 하루키는 늘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떠오르는 김영하의 ‘네이티브 한국어’ 문장을 읽을 때보다 하루키의 일본어를 번역한 문장이 더 눈에 쩍쩍 붙곤했다. 에세이는 아마 안 읽은 지 5년은 됐을 거다. 오랜만에 김동조의 트윗을 보고 하루키를 집었다. 잡자마자 오랜만에 ‘읽는 재미’를 느꼈다. 하루키의 구어체 문장이 좋기도 했지만, 어떤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피지컬로 쓰는 글쓰기.’

20대 시절에 짧은 글(칼럼)을 몇 년간 규칙적으로 써봤고, 긴 글(논문)을 1년간 붙들고 썼다. 피곤하지 않았고 따라서 지치지 않았다. 글감이 풍성했고, 앉으면 한번에 글을 털었다. 논문도 불같은 속도로 쓰고, 또 불같이 고쳐썼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선, 오승환이 등판 했을 때 이닝이 지워지듯이, 퇴근해서 회식하면 하루 종일 새겨둔 글감이 사라졌고, 주말에 쓰려고 간신히 모아둔 글감은 막상 주말이 되면 트윗으로 잘게 쪼개지거나 페이스북에서 약간 더 두툼하게 썰릴 뿐이었다. 긴 글을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지점에서 피지컬이 떠오르는 것이다. 앉아서 결심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어떤 몸의 상태.

‘달리면서 샘솟는 그 ‘뭔가”

10km 달리기를 일주일에 두 번 한다. 읽는 내내 하루키가 말하는 그 ‘뭔가’가 알 것 같아 신났다. ‘runner’s high’라는 게 비단 근육에서만 오는 상태는 아니다. 멘탈로 느껴 완성된다. 고민과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은 당연히 그러하고, 사실 내가 느끼는 쾌감이란 건 바로 ‘영감’이다. 뛰고 났을 때 뭔가 퐁퐁하고 샘솟는 느낌. 바로 그거.

하루키를 읽으면서 공감 받는 느낌에 맘이 포근했다. 최근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달리기가 정착되면서 지킬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든다. 더불어 ‘글감’도 샘솟는다. 내가 글을 써야 가장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역시 인정하게 됐다. ‘직업’은 아직 모르겠지만 ‘생활인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서 걸으며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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