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하나의 세계에서 교육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 살만 칸,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칸 아카데미으로 수학을 공부하는 중이다. 진짜 ‘산수arithmetic’부터 시작해 이제 대학교 이과수학을 듣는다. 오롯이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출발해 문제를 풀고 이해가 되지 않을 경우 10분 남짓의 동영상 강의를 통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음 스텝으로 차근차근 나갈 수 있다. 그게  칸 아카데미의 특징이다. 수학으로 시작했지만 물리학, 경제학, 역사 등 다양한 지식도 ‘각자의 속도’에 맞춰 ‘mastery’를 습득할 때까지 익힐 수 있다. 정확하게 익히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칸의 지론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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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아카데미의 창시자 살만 칸의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the one world schoolhouse라는 원제목에 비해 아주 후진 제목이다.)는 칸 아카데미를 만들게 된 배경, 그리고 칸이 갖고 있는 교육에 대한 생각, 칸 아카데미가 어떻게 비영리 기관이면서 망하지 않고 수백만명 수천만명이 매일 접속해서 수학을 공부하는 사이트가 되었는 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빌 게이츠와의 대담이나 포브스 기사를 통해서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지만 일단 한글이 접근성이 좋으니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것은 살만 칸이  ‘기술’이 어떻게 교육의 ‘진보’를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진보 교육운동이 정체되어버린 어떤 종류의 ‘덫’을 뚫고 나간 느낌이다.

한국의 교육 운동하면, 대안교육(창의성 교육/탈자본주의 교육), 입시의 일원화(수능 일원화) 또는 평준화 강화론 등이 곧바로 생각난다. 생태주의적 감수성을 기르자는 운동도 있다. ‘참교육’을 기치로 내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있다. 진보 교육운동이 말하는 대로 민주주의적 시민성도 높이며 폭력 재생산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보다는 협동하는 자아를 길러야 한다. 교실도 살려내야 한다.생태적 감수성도 길러야 한다. 당위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교육은 사회에서 ‘한 몫’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즉 직업적 성취도 이룰 수 있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직업적 성취’는 특정한 입장에 따라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가능성’을 주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교육운동에서 나는 매번 ‘고장난 시계’의 인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교육운동의 문제설정이 변화한 기술과 ‘연결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낀다. 매번 당위에 짓눌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헷갈렸다.

그런 면에서 살만 칸은 한국의 진보 교육운동보다 훨씬 더 ‘기술적’ 차원에서 볼 때 진보적이며 ‘가능성’의 측면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란 문제는 늘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에 대해 예민한 내게 적확한 문제제기였다.

 

“왜 숙제는 집에서 하도록 만들어졌을까? (..)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1950년대의 텔레비전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완전한 핵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낡은 개념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 9시에서 5시까지 직장에서 일하고 방금 집에 돌아온 아빠는 (..) 거의 모든 과목에 막힘없이 지혜로운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청소하고 쿠키를 구운 엄마는 아빠가 잘 모르는 문제가 나타나면 신중하게 조언해줄 것이다. (..)

많은 가족에게 같이 있는 시간은 점점 더 드물고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엄마들이 일을 한다. 남녀 성인 모두 더 오랜 시간 일하고, 더 오랜 통근과 사업상 이동을 견딘다. (..) 또한 가르치는 양식이 진화하고 K-12 커리큘럼에 더 어려운 주제들이 포함되면서 정말로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줄 역량이 있는 부모들은 줄어들었다. (..)

전통적인 숙제는 불평등의 요인이며 이 점에서 공교육이 공언한 목표와 공정성에 대한 감각에 바로 어긋난다. 부모들이 숙제를 도와주는 한, 잘 교육받은 엄마와 아빠에게 분명 커다란 이점이 있다. 직접 가르치지 않고 숙제를 간접적으로 도와줄 때조차 책이 있는 가정과 잘 교육받은 전통이 있는 가족은 불공평한 경쟁을 한다. 더 부유한 아이들은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할 일도 없고, 엄마나 아빠 또는 지친 부모가 해줄 수 없는 집안일을 해야 하는 부담을 안을 가능성도 적다. 요약하면, 숙제는 교육적으로 말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불평등한 경쟁의 장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살만 칸,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138-140)

나는 살만 칸이 언급한 위의 딜레마를 안지 15년이 넘었는데, 이 문제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스스로 사유하고 타자에게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 폭력에 대면하면서도 폭력적이지 않게 되는 방식.” 등 인문학이 강조하는 개념을 잘 알고 있고 동의하지만, 사실 어떨 때는 ‘한가한 소리’로 느껴질 때가 있다.

‘기초 소양’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의 변화는 있더라도, 배우고 안 배우고, 익히고 안 익히고에 따라 사회에서의 인간의 ‘위치’가 변한다. 일차적으로 ‘시민성’과 ‘common sense’. 어느 집에서 자라더라도 다행히 ‘공공 환경’에 의해서 그걸 익히면 다행이고, 못 익히면 사회에서 약간 밀리거나 나쁘면 도태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들은 주폭이거나 혐오분자거나 하여간 민주주의 사회의 1인분 하는 주체가 되기 힘들다. 다른 한 편 점차 확장될 수밖에 없는 ‘지식노동’. 최근에는 STEM 등. 평생학습은 필요하지만, 어느 시점을 놓치면 따라잡을 때마다 지수법칙에 저항해야 한다. 지수법칙을 이길 환경과 의지와 자질이 없다면 그냥 누락되는 것이다. 결국 지식이 성장해야 할 ‘제 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은 중요하다. 공부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

자신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잘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게 아마 성찰적 인문학의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타자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잘 아는 것은 사회과학의 기본이 될 것이다. 내가 똑똑한 거 말고, 남들이 “왜 저 수준인지?”에 대해서 구조적 접근을 할 수 있어야 그들에 대해 ‘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공분의 정치학이 무섭다. 다른 한 편, 나는 특정 주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학교보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똑같이 ‘기초소양’을 기술적 차원이든 시민성의 차원이든 잘 익힐 수 있게 ‘환경-인프라’로 제공될 수 있는 정책과 프로그램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난한 환경의 아이에게 자긍심과 자존감을 높이는 언어를 주는 건 좋은데, 한국어와 외국어도 ‘제대로’ 쓸 수 있게, 수학과 과학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대학에 가서도 ‘개천’에서 자랐기에 ‘누락’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잘 보완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학위가 없어도 코데카데미를 통해 돈과 상관 없이 코딩을 배우고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의 파워는 대단할 것이다. STEM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기계에 대치되지 않는 직업’의 기본이 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의 기술은 제빵과 타이핑이 아니라 과학과 수학과 엔지니어링과 기술이 될 것이다. 예컨대 농촌 아빠와 캄보디아 출신 이주민 엄마 사이에서 자란 수학 영재랄지. 칸을 통해 나는 그걸 봤다. 그리고 나는 그게 ‘연결된 하나의 세계’에서 교육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새로운 움직임이라고 봤다.

당신은 커리큘럼을 표준화할 수 있지만 배움을 표준화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뇌도 똑같지 않다. 지식의 대단히 미묘한 망을 거쳐가는 그 어떤 길도 같지 않다. 가장 철저하게 표준화된 시험조차 생각들의 어떤 부분집합을 학생들이 나름대로 파악한 이해 정도의 근사치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학습의 개인적 책임은 사람 각각의 독특함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124).

내가 가장 맘에 든 부분은 이 부분. 각자에게 가장 맞는 방식의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 늘 “어떻게 일일이 다 맞추냐?”라는 방식의 공립교육이 갖는 평등성은 존중받아야 했지만, 기술을 통해서 평등성이 강화되면서도 on demand가 가능하다면 이제 다른 차원의 교육이 열리는 거 아닌가? 칸은 교사들을 소외시키기 보다는, 외려 강의를 듣고온 아이들의 어려움을 풀어주고, 함께 고민하며 토론하고, 혼자 아이들의 수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이 연합해 대형 교실에서 벌이는 공동수업 등을 제안하며 새로운 교사의 이미지를 만들려고도 한다.

최근 칸이 갖고 있는 교육법. 동영상을 통해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 연속적인 정답을 달성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에 대한 교육공학자들의 논쟁이 좀 있는 것 같다. 물론 논쟁은 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되면서 보강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건 칸과 칸 아카데미가 ‘운동가’보다는 ‘혁신가’의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칸 아카데미로 수학을 공부해본 입장에서 보면 일단 잊어 먹었던 수학 감각을 살리는 것까지는 탁월하다고 본다. 그리고 새로 익히는 것들도 머리에 쏙쏙 탑재되는 걸 느낀다. 장기기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할 만큼.

불평등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교육에 대한 혁신가의 인식. 지금 전세계의 교육소외계층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것은 프레이리처럼 ‘의식화’를 시켜줄 ‘운동가’가 아니라 빌게이츠나 살만 칸 같은 ‘혁신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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