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와 살인 – 예측과 사후조치

며칠 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을 다룰 때 주로 사회학적으로 여성혐오misogyny와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됐다.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한 명의 대등한 사람이 아니며 또한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깔려 있는 상황에서, 전형적인 증오에 기초해 저지른 범죄. 이에 대해 범죄학, 심리학적으로 미시적으로 동기를 살펴 보는 이야기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 한 편에 구조조정과 해고 이야기가 있다. 경기 침체와, 내부 경쟁력의 한계에 선 조선업과 해운업에 대해 채권자인 국책은행과 민간은행들은 ‘명예퇴직’(이라도 쓰고 해고라고 읽는)을 포함한 강력한 자구안을 내놓느라 강제하고 있다. 물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은 진행될 예정이다. (구조조정의 산업에 미치는 효과는 일단 이 글에선 논외로 하자.)

두 이야기는 어찌 보면 별개 차원의 이슈를 다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진보진영이나 노동계에서 주로 말하는 방식을 들어보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주장되기에, 그들의 범주를 가져 온다면 어쩌면 함께 엮어 볼수 있을 것 같다. 여성혐오 가부장 체제는 여성을 증오범죄로 살인하고,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자를 해고로 살인한다. 이건 유형적으로 거의 일치하는 방식의 유추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를 엮을 수 있다. 바로 정책의 관점이다. 형사정책과 성평등정책, 그리고 노동정책과 산업정책을 건드리게 된다. 키워드는 예방과 사후조치다.

살인사건은 사후조치 관점에서 보면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망자를 어떻게 예우할지 문제, 이런 범주의 살인자에게 어떤 형량을 줄 것인지 문제만 남게 된다. 여론에 환기를 시킬 순 있지만 ‘죽음’이라는 상황을 원상복귀시키지 못하기에 사후조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살인’이라 부르는 ‘해고’는 사후조치가 가능하다. ‘이번 일터에서의 일자리’는 죽었지만 정책이 적절한 조치만 한다면 일자리를 만들어 해고당한 개개인을 다른 직장에 취업시키거나 다른 직업을 갖게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해고가 ‘살인’으로 불린 것은 순전히 퇴직자의 재교육,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생애주기 재설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소득을 보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롯이 정책실패다. 물론 한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계속 다니고 싶은 맘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전세계가 점점더 단일시장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그건 포기해야 살 수 있다. 그게 싫다면 저개발국가 임금수준으로의 평가절하를 받아들이면 된다.

‘예방’의 관점으로 볼 때 살인사건은 평균율 통제만 가능하다. 여성혐오misogyny는 성평등정책(고용, 출산, 육아 등)과 성인지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살인자 개개인의 살인동기라는 ‘우발성’은 통제할 수 없다. 평균은 떨어트릴 수 있지만, 극단적 성향의 ‘이상성향outlier’인 사람들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헌법 정신을 어기는 일이다. 안타깝지만 우생학과 통제 테크놀로지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 한, 살인사건 숫자는 줄일 수 있되 살인소지를 없앨 순 없다.

해고는 ‘예방’이라는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할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다. ‘경영상의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든 자본가든, 바지사장이든 ‘자구계획’이라는 말로 해고를 포함한 패키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고용창출에 주는 인센티브는 가능하지만, 경영위기 상황에서 해고한다고 패널티를 줄 순 없다. 기업의 고용규모가 커서 죽일 수 없는 경우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미봉책에 그친다. 경기순환 이슈가 아니고 ‘진짜 한계’에 치달았을 경우 도산하지 않으려면 고정비를 절감해 BEP를 낮추고 공헌이익을 확보해야 하나. 이 때는 정책은 도리가 없다. 향후 산업의 강건함을 보전하게 위한 일련의 조치가 나갈 뿐, 해고를 막을 순 없다.

2×2 매트릭스를 그릴 수 있다. 예방 차원과 사후조치 라는 정책의 차원, 살인과 해고라는 사태의 차원.

정리하자면, 혐오에 근거한 증오 범죄에 따른 살인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통계적으로 예방시킬 순 있지만 온전히 막을 순 없다. 온전히 막으려면 우리는 우생학과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통제를 용인해야 한다. CCTV와 전자 발찌, 화학적 거세, 무기징역 모두를 동원해도 효과가 크지 않을 뿐더러, 그 이상의 수단을 동원하려 할 때도 전국민적인 합의가 가능한지다 의문이고 그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 그걸 배제한다면 결국 지루하지만 한땀한땀 고용-출산-육아 등 어역에서 성평등정책을 정착시키고, 여성혐오에 노출된 남자들을 교육해내고 문화를 바꾸는 일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래야 한다. 왜냐면 사후조치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해고는 약한 수준에서만 예방이 가능할 따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최종적으론 기업의 도산을 예방할 수 없고 기업의 쇠퇴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하게 될 따름이다. *하지만 해고는 ‘살인’이 되지 않게 만들 수 많는 방법이 있다. 정책이 할 일은 일터에서 나온 이들을 다시금 사회적으로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본소득이라는 견지도 꼭 동의하진 않지만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해고’가 재충전의 기회이자 인생 2모작 3모작의 기회가 되게 하는 게 정책,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라 본다.

이런 프레임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효과’적이며 ‘민주적’인 정책을 집행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할 일들이 생각보다 간명하다. 근데 운동과 정치 모두 군힘을 많이 쓰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