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 & 후각 vs 시각 / 묘사 vs 서사

<A href=”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65d8159eceb6a46f&name=1133715412159031345312697.jpg” target=_blank><IMG id=6422144535b5970065d8159eceb6a46f@10.20.100.103 style=”BORDER-RIGHT: medium none; BORDER-TOP: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BORDER-BOTTOM: medium none” height=913 src=”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65d8159eceb6a46f&name=1133715412159031345312697.jpg” width=544 name=image swaf:cywrite:object_id=”1071014610” swaf:cywrite:info=”image 1133715412159031345312697.jpg /download?fid=6422144535b5970065d8159eceb6a46f&name=1133715412159031345312697.jpg 250330 6422144535b5970065d8159eceb6a46f@10.20.100.103” swaf:cywrite:file_seq=””></A>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 가장 끔찍했던 시간은 아무래도 미술시간이었다.

뭔가 그려내야만 하고, 게다가 그것에 대해서 일률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그러면서도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꼽아서 수량화된 잣대로 평가하는

미술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끔찍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왼손잡이를 기어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게 강요하여 훈육한 당시 ‘국민학교’ 체제는 나와 연필과의

익숙함 마저  차단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덜덜 떠는 손으로 그려내는 그림이라는 건, 정말 내 의도와 상관없는 케이오스(chaos)였고, 그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폭력적인 언사로 나에게 퍼부어 대는 선생의 지랄은 미술시간과 나 사이에 건널수 없는 강을 만들어 냈다. 다리를 만들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26이 된 지금도, 그림을 그리라거나, 심지어 어떤 단순한 그래픽 작업을 하라는 것은 나에게 굉장한 고문이다.

내가 그려내는 건 기껏해야, 동그라미, 세모, 네모, 별 정도의 유치원쯤 배웠을 법한 방식으로의 표현이다. 모방 수준에서 그치고 만 나의 회화표현은, 곧바로

나의 시각적 묘사의 부재에서 그 장애의 심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뉘앙스의 차이를 읽어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라는 것에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그냥 서사로 마무리를 하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비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적절한 형용사나 관형사를 끄집어 내지는 못한다. 속성에 대해서 디테일을 말하기에 곤란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묘사의 차원이 시각을 벗어나게 된다면, 자신이 있다. 청각적 차원에 관해서는 말이다. 제도권을 벗어난 나의 음악적 편력은 (피아노 교습과, 기타 독학, 드럼 독학, 잠시나마였지만 cakewalk를 통한 작곡) 은 확실히 나에게 리듬을 타는 일과 음정을 통해서 말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이후로 득의양양하게 음악시간을 기다려서 ‘재수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발성’ 자체는 내 기대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엉망진창이었고, 지금도 별 변화는 없다. 다만 정확한 음정으로 정확한 박자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오로지 음악시간이 나에게 ‘유희’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을리라.

이런 편력덕분에 나에겐 “칠흙같은 밤” 정도 수준의 상투적인 시각적 묘사도 어렵지만, “김반장 목소리 같은 텁텁하면서도 구성진 사운드”같은 수준의 청각의 묘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내가 묘사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건 후각의 부분일 거다. 난 여전히 사계절을 냄새로 기억하고, 요즘은 가을 냄새에 마취되는 중이다. 지독한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장애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냄새를 통한 하루의 기억, 그리고 계절과 국면들(momentum)에 대한 기억은 냄새인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서, 정규교육이 아닌 어떤 회화교육의 멘토를 찾아낼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말은 길되 강한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화법을 좀 개선하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음악과 냄새에 도취되지 않은 이에게 나의 말은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들뢰즈의 리토르델로를 이해한다면 내 말의 리듬과 씨닉하게 웃기는 지점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해본다.

내 글은 여전히 어떤 일들에게는 어렵기만 하지만, 사실 평이한 구조하에 비교적 짜임새가 단순하게 펼쳐져 있다. 누군가의 소통을 절실히 요구하는 지금인데, 항상 이 글들은 일기장의 기록들처럼 내면으로만 침잠해가기만 한다..

요즘 NQ(Entertainment Quality)가 유행이라는데, 나도 좀 웃기는 방법을 개발해야 할 런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그러기 전에 좀 회화교육을 어디에선가 좀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