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프롤로그 : 1학년

<FONT size=2>대학이전</FONT> 

 내가 정치학을 공부한답시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까지 전공하고 있지만, 사실 대학 들어오기 전에 정치학과를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1 때는 잠깐 국사학과를 생각했던 것같고, 방송반 활동 이후 고2  때부터는 신문방송학과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한 5년 간을 프로그래머를 하겠다고 했었다.

 어떠한 것에 연유해서 정치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는 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유니텔 패닉 팬클럽의 한 친구(전옥미 – 잊고 있었지만, 2004년 세종대 부총학생회장)가 건대하면 정치대학이 좋다는 이야기를 흘렸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정치외교학과 다니면서도 PD 시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애시당초 관심없었던 다른 제반 사회과학(예를 들면 나는 법대를 정말 혐오했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주저없이 정치대학에 지원했다.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내가 제일먼저 겪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거리의 정치를 펼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도서관도, 동아리 문화도 아닌, 깃발을 들고 아지(Agitation)를 뜨는 선배들의 모습과, 민중가요를 불러대면서 대동의 장을 만들려는 그러한 모습이었떤 것이다. 그렇다해서 그 이전에 내가 사회과학이나, 사회문제에 대해서 둔감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경험은 확실히 나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 중의 하나였다.

 새내기 새터를 다녀온 이후 학기가 개강했고, 나는 그러한 충격과, OT에서 만났던 선배들과의 관계, 동아리는 하나쯤 들어야 된다는 생각, 그리고 나를 예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잘 알 알 수없는 치기 등등이 복합적으로 섞이면서, 한국근현대사연구회(약칭 한근연), 민중가요패 어울림에 입회하게 되었다.

 <FONT size=2>냉소적 바이러스</FONT>

 사실 나는 기질(氣質)적으로 가만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다가가는 어떠한 집단에서도 그러한 기질에다가, 특유의 씨니컬한 말투로 많은 집단에서 그리 친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나를 얽어맸던 어울림에서도 나는 정말 초창기(아니 1년쯤)부터 한동안을 ‘이방인’으로 지내야 했고, 가장 그나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에 가까운 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나는 입학했을 때부터 거리의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감화’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받은 ‘감전’은 나의 경우 보통 지적 명제들로 다시금 해석되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내 머리속의 회로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멈추지 않고 돌고 돌았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내 갈증을 명확하게 해결해 주지 않았고, 또한 인간적인 감정과 별개로 그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그게 내 대학 1학년 떄의 비극이었음이 확실하다고 지금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그런 비극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감시켜주고 싶었다.). 이분법적 인식으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구도를 상정하며, 모든 세상의 문제를 미제의 작품으로 환원하는 이들은 나를 점차 지치게 만들었고, 점점 더 갈증나게 만들었다.

 난 점점더 냉소적이며, 문제의식만 가득차서 그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과 나의 입장은 분기점을 지나서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두고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사람들이 보는 눈이란, 동기들에게는 ‘목소리 크고 고집센 빨간 바이러스’였을 테고, 선배들에게는 ‘개념은 없고 어이없이 들이대는 놈’이었으리라.

 <FONT size=2>도바리 혹은 탈주</FONT>

<FONT size=2>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가는 도중 훌륭한 선생의 도움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 나는 대학의 정규강의에서도, 그리고 동아리방의 학습에서도 어떠한 감화를 받지 못했다. 점차 제도권 학문이라는 것 자체의 ‘정체되어있는 모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거리의 정치를 꿈꾸는 이들의 지적 빈곤함과, 엄격하다 못해서 퇴보하고 있는 그들의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그것들을 섭취하면서 나를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FONT>

<FONT size=2>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읽고 “역사 에세이”를 읽고 점차 알 수 없는 한보따리의 책을 읽고서 ‘민족혁명전사’가 된다는 데, 나는 그 책들을 5회독을 해도 아무런 감응이 없었다. 따라서 어떠한 실천적 선도성이 나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나는 철저한 주지주의자(主智主議者)이기 때문이다.</FONT>

<FONT size=2> 차라리 Anthony Giddens의 “현대 사회학”이 더 좋았고, 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더 나에게는 납득이 갔다. 세상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너무나 복잡한 것들이 엉켜있었고, 그들의 칼로 썰리는 두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칼로 썰리지 않는 문제들(자본주의의 구조문제 – 신자유주의 -, 여성주의, 생태주의, ……..)에 대해서 점차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FONT>

<FONT size=2> 그래서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인식을 전복하고 싶었으나, 1학년의 나는 아직 그것이 어떠한 함의를 갖는지를 몰랐고, 그것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져야한다는 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정면돌파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FONT>

<FONT size=2> 혼자 도서관에 있기 시작했다. 위에도 언급했던 그러한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또 역사학에 관한 책들, 경제학에 관한 책들을 혼자 탐독하기 시작했다.</FONT>

<FONT size=2> 하지만 연말, 정기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다시금 그들에게 잡힌다. NL총학생회 선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엄밀하게 정립되지 않은 나의 우유부단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물론 예상처럼 거기서 나는 실망밖에 할 수 없었다. 밀실적 의결구조와 새내기의 신체만을 규율짓고 통제하려는 그들의 학생회는 이미 ‘그들만’의 것이었다. 이름은 ‘장한청년’이었지만, 이미 그 학생회 선본의 시작부터 ‘주사파’의 소유물에 다름 아니었다.</FONT>

<FONT size=2> 결국 나는 점차 더더욱 여러면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F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