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제2대학 (2학년 - 2)(2006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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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학년의 한 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 나는 지적인 갈증에 너무나 목이 말라있었다. 내 문제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공유되지 않았기에 내 이야기는 선배들에게 물었을 때 ‘술쳐먹었냐?’라는 식의 대답을 유발하기 십상이었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 물어보기에 내 주제는  주류 정치학의 주된 관심에서 빗겨나가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왜 집회 판에서는 모두다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하고, 똑같은 구호를 외쳐야 하는가?”

 “국가를 그렇게도 비판하는 사회운동체들이 왜 관료제적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Rock음악의 메시지는 왜 양키문화의 것으로만 치부되어야 하는가?”

 “왜 사회주의자들은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프리섹스주의자나 동성애자들의 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해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가?”

 그러던 와중 여름방학에 한가지 전환점의 모티브가 될만한 모임이 있었다. ‘제2대학 학회캠프”라는 포스터가 지금은 허물어진 제2학생회관 벽에 붙어 있었다. ‘학회운동’이라는 말이 있었다. 웬지 모를 호기심이 생겼다. 김주원과 함께 서울대로 갔다.

 학회캠프에서 우리 둘이 참여했던 주제는 “공산주의 선언 읽기”, “월드컵과 민족주의” 뭐 이런 것들로 기억된다.

 두가지의 세션은 모두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맑스의 ‘선언’을 그렇게 자유롭게 읽어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철학과의 98학번 김치수라는 사람이 학회교사였는데, 그의 해석은 너무나 맑스를 자유롭게 읽어낸 나머지 너무나 한량한 맑스를 발산하고 있었다.

 내가 사사방에서 읽었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읽어냈던 강경한 혁명의 동지 맑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월드컵과 민족주의” 세션에서 나는 조금 더 강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붉은 악마가 되어 뛰어다니던 나는 단순한 재미와, “대한민국” 구호를 통해서 질러대는 한 목소리 자체에 대해서 별 문제 의식없이 즐기기만 했었다. 사실 그건 어찌보면 내 이론적 태도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모순적 태도기도 했다.

 더 좋았던 것은 뒷풀이의 술자리였다. 내가 지금까지 장담하건데, 어떠한 학생 운동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술자리보다 즐거웠고, 더 얻는 게 많은 술자리였다. 이는 내가 스터디 모임이라던가, 학회를 만들었을 때 진행했던 술자리의 원칙을 만들어줄 정도였다.

 모두다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여기저기에서 토론이 진행되었고, 끝도 없이 지식의 교환과 서로의 변화가 진행되는 그러한 술자리였다. 도그마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강도높은 맑스주의자’라는 사람조차, 모든 문제에 대해서 유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개진했고, 관심있는 이들은 경청했고, 이에 대해 반박과 재반박이 오갔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지식인들의 허무한 논쟁’이라 치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그들을 ‘양아치들’이라고 이야기했던 경우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인텔리’적 기질이 충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병역 대신 감옥행을 택했고, 그들 중 어떤 형은 여전히 지속적으로 빈민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또 한번의 입장의 변동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초반에 ‘문화과학’이라는 계간지가 나왔을 때, 문화를 혁명적으로, 유물론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하나의 혁명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 자체로 많은 좌파들이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더 폭 넓은 인식의 문제들에 대한 접근틀을 가질 수가 있었다.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에 대한 필요한 담론체계 자체를 제공받을 수 없었던 나에게 제2대학 학회캠프에서의 경험은 점차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구성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