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즐겁게 사유하기(한 가지의 단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비판은 에너지를 창조해낸다. 비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창조적 행위인 것이다.

Gille Deleuze. “니체와 철학”, 그리고 약간의 나의 기록.

내 학부생활의 절반은 지적인 수행에 대해서만 이야길 하자면, 어떤 정해진 길도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치를 확인하고, 결국 악다구니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던 시간들이었다.

그에 반해 3학년의 생활은 과도기였다.

나름의 점차 명료해지는 인식들, 세계관들이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나는 어쩌면 그 때에 “얼치기 철학자” 흉내를 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들은, 몇가지의 말들로 떠들고 다녔고, 그 얼치기의 모습으로 후배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심어주려 했었다.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지적 빈곤함이었고, 다시금 남는 갈증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제 점차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를 가다듬을 수 있었고, 비판을 통해서 내가 설 입지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에 많은 몰입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씩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물론 절대 그 것은 완성도를 본다면, 또 한 번의 실수라고 할 정도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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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회 장안민국국회**

정말 하고 싶어서, 학과의 약간의 금기를 깨고 군대도 안갔다온 非예비역인 내가 연구분과장을 맡았다.

주제는 노사관계법 개정. 당시 노동자 5명이 자살을 했다.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법안(이번에 환노위에서 통과된)을 포함한 포괄적인 노동관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분명히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규정할 만큼 ‘친자본 반노동’의 구상이었다.

물론 추상적으로 노사관계법 개정에 대해서 언급한다면, 그것과 삶의 문제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분명히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살했던 노동자들의 유서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여준 르포를 통해서 뭔가 어렴풋이라도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인식들을 토대로 장안민국국회에 대한 기획을 시작했다.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 나는, 현안의 사실관계의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이면에 있는 힘의 관계, 그리고 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점들은 정치철학적인, 경제철학에 관련된 논의들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만 해도 나는 얼치기 맑스주의자였고, 그람시에 대한 논의, 슘페터/하이에크에 대한 논의들을 발제/토론을 통해서 전개해 보려 했지만, 그것은 많은 후배들의 얼굴에 주름살만 만들고, 끊임없는 담배만 유발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다시금 튜터 부재에 대한 한스러움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의 어설픔이 서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스러운 내용들의 점검은, 결국 많은 반발에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여차저차해서 장안민국국회는 시행이 되었고, 한보따리의 책과, 한보따리의 A4 용지의 자료의 압박은 결국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는 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주었다.

그것은, 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과 이론과의 연관, 그리고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 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하는 학문이 바로 정치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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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의 단서**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도처에 권력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권력과 힘의 불균형, 그리고 그 접점들에서의 마찰이 존재하는 한, 그 원리를 공부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내 삶에서의 해방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내가 정치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정치학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어졌다. 내 삶과 연관된 학문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내 나름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정치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그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천에 대해서 참 많이 왈가왈부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실천성에 대해서 규정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어떤 실천의 한 형태만을 가지고 실천으로 규정하고, 그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딱지를 붙이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었고, 그러한 비판은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아직 새로운 가능성은 완성되지 않았었고, 그 가능성들에 대해서 탐구를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는 그 이후에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