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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시도들과 실패들(2학년)(2006년 글)'
<FONT size=2>2학년 – 시도들과 실패들</FONT>
2학년이 되었지만, 어떠한 문제들도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내 나름의 대답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배와의 관계 맺음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것은 설레임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한가지의 문제가 더 추가되었다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실천적으로 이론적으로 빈곤했던 나는, 선배들이 가르쳐놓은 공식 과정을 다시금 반복하는 앵무새에서 그리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시도를 하려했다. 보통 어울림이 가지 않으려했던 메이데이 4.30 문화제에 후배들을 데려 가려했고, 어떻게 해서든 다른 방법들로 문제를 제기하려했었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시도들은 어떠한 궤적도 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며 생각하건데, 각각의 사상(정확히는 이데올로기)과 실천들은 나름의 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맑스-레닌주의적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실천방식은 나름의 계열(예를 들면 전위체에 대한 갈구/혁명조직에 대한 갈구)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을 것이고, 주체사상을 믿고 있는 이들은 그들 나름의 실천양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굳이 여기서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언급하는 것은, 그 특징적인 활동방법을 부각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 실패의 일면에는 내 미숙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보건데, 나는 짝이 안 맞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선배들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 것들(자주-민주-통일)에서 그리 비껴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 걸맞는 실천방식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렇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챙기고, 인간적인 면으로 부각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그 사상과 실천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그러한 이유들과 또한 인간관계의 미숙이 빚어내는 문제들의 연속적인 돌출은 나를 점점 더 괴롭게 만들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을 더욱 더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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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방과 민족해방운동사 – 80년대로의 회귀</FONT>
나비효과라는 물리학의 이론이 있다. 태평양 너머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대양을 넘어 허리케인의 파괴력으로 변환한다는 내용의 이론이다. 사실 지금의 나의 정치적 관점,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총체적인 전환은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2학년 1학기가 마쳐갈 때 즈음에 어떤 선배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주었다. 자신이 볼 때에 나는 어느 정도 그레이드에 올라갔으며, 이제 제대로 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책을 읽고 자신과 이야기하자 했다.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생겨버린 “민족”이라는 언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그 책에 대한 편견을 주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끝까지 주욱 읽었다. 일제하의 해방운동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흥분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거대한 것의 이면이 알고 싶어졌고, 의구심만 쌓여갔다.
인터넷에서 NL/PD를 검색해 보았다. 조희연 교수의 논문이 나왔다. “사회구성체논쟁”에 관한 논문이었다. 거기에 크게 강조되어있는 책이 있었다. 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른바 사사방)이었다. 도서관에서 총서류(080으로 시작되는)에 그 책이 있었다. 낡을 대로 낡은 84년쯤에 나온 그 책은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그 책의 시작은 사회과학 방법론이라는 무엇에서 시작되는 가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로 부터 시작되었고, 어떨 때는 본문보다 더 긴 각주가 덮어버린 그런 책이었다. 그 책의 요점은 정태성과, 자본주의의 일반성을 망각한 NL이론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었다(물론 그 책의 관점은 철저한 맑스-레닌주의 소련 교과서에 입각한 것이다.). 이상한 전율이 느껴졌다. “사사방”이 출간된 후 NL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PD 운동가들의 느낌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나서 이진경의 “주체사상비판 1,2″(1987 : 벼리)도 마저 읽어버렸다. 최소한 나는 NL이 될 수없다는 것이 확실했다.
며칠 후 그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선배가 이야기하는 요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할 수 있었다. 나에게 선배는 “니가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로 피해간 것으로 비추어졌다. 나는 약간의 어설픈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나는 순식간에 맹목적인 맑스-레닌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물질과 관념의 대립에서 물질이 우위를 차지하며(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생산양식의 변형에 있어서 한국의 사회구성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기 때문에, 우리의 변혁과제는 노동계급의 당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2002년에 1987년의 PD 운동가들이 생각했던 것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다시금 부차적인 것으로 나 스스로 인식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87년의 PD적 인식틀로 보기에 세상은 너무나 복잡다단했다. 여러가지가 중층으로 겹쳐있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더더욱 나에게 혼란만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