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논문, 책

<A href=”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952a49a6500d73b199068110e85&name=1276018877145111498317372.jpg” target=_blank><IMG id=64221952a49a6500d73b199068110e85@10.20.100.105 style=”BORDER-RIGHT: medium none; BORDER-TOP: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BORDER-BOTTOM: medium none” height=608 src=”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952a49a6500d73b199068110e85&name=1276018877145111498317372.jpg” width=400 name=image swaf:cywrite:file_seq=”” swaf:cywrite:object_id=”3080428230” swaf:cywrite:info=”image|1276018877145111498317372.jpg|/download?fid=64221952a49a6500d73b199068110e85&name=1276018877145111498317372.jpg|108529|64221952a49a6500d73b199068110e85@10.20.100.105”></A>
Walter Benjamin

사실 2년전만 해도 내 글쓰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논문투였고, 감상이 없었던 적은 없었지만 먹물의 느낌이 훨씬 더 강한 글쓰기였다.
언제나 정확한 문단나누기에 집착했고, 대화하기보다는 썼다. 물론 지금도 주로 말하기 보다는 쓴다.
사회과학을 한 탓인데. 95:5의 비율로 사회과학과 문학을 읽을 때다.

지금은 좀 확실히 잡글로 돌아선 듯하다. 블로그에 쓰는 글쓰기의 양이 많아지다보니, 분석력이라는 건 이제 슬슬 없어지는 것 같고. 주로 감상과 단상들이 가득찬 글을 쓴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의 글쓰기에 만족한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17살에 유니텔에 접속하기 시작한 이래로 썼던 글들을 엮어서 책을 만들면 몇명이나 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것을 팔아서 한 1년 놀다올 만큼의 인세를 챙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요즘 20대 저자 몇명이 등장하고 있는데, 김현진이나 한윤형(아흐리만) 정도가 좀 두드러지는 듯하다.

일단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이야기해보자면, 둘이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써내는 컨텐츠를 보자면, 김현진은 ‘위안’의 글을 자신의 생활의 빡빡함과 자신이 처하는 세상에 대한 까칠한 비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고, 한윤형은 약간의 철학적 지식과 약간의 사회과학적 지식을 ‘상식’이라는 틀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려 하고 있다.

김현진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공감’과 ‘경청’의 태도로 대하게 된다. 난 그에 비하면 ‘먹물티’를 너무 내고, 그의 생활조건에 비하면 ’88만원 세대’ 외곽에 이탈해 있는 쁘띠부르주아이고, 그의 메시지의 ‘진정성’에 비하면 훨씬 더 ‘허영기’가 가득차 있는 글을 쓴다.

하지만 한윤형의 글쓰기에 대해선 글쎄? ‘잘 모르겠다’적 태도인 것 같다. 그는 ‘상식적 차원’이라는 진중권이 한국의 좌파 담론체계에 도입한 하나의 발명품을 굉장히 쉽게 휙휙 휘두르면서 정치적 판단을 한다. 하지만 그 덕택에 언제나 그 ‘상식적 차원’에서 조금 더 나아간 좌파들에 대해서 ‘상식적 폭력’을 선사하곤 한다. 담론체계에서 ‘다수자’의 배치체계를 놓지 않으면서 헤게모니에 투항하지 않는 전략이라. 얼마나 더 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미친 척 해야할 필요 있을 때 너무 점잖다는 거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주류’에 콜하면 들어갈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너무 많다.

어쩌면 한윤형에 대한 내 판단은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학벌 컴플렉스’에 기인했을 확률이 높다. 뭐 어쨌든, 좀 고까운 시선이 있다.

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내가 내년 중반을 넘기면서 하고 싶은 일이 바로 ‘대중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난 좀 한윤형보다는 정교한 날끝을 가지고 싶고, 김현진보다 더 밑바닥 여론이라는 것을 가지고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해보니, 난 ‘창조적 인간’은 확실히 아니고 ‘비평가적 기질’은 좀 있다는 생각이다. ‘창조적’일 수는 있겠으나 난 주어진 컨텍스트가 없으면 뭐가 빵빵터지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고, 뭔가 조질 수 있는 타겟이 있어야 좀 몸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스타일이다. 황량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벤야민처럼 남의 텍스트를 엮어서 뭔가 말을 한다는 것. 충분히 창조적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생활 그 자체를 통해서 느끼는 바보다, 남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내 생활을 반추해보는 것이 보통 내가 사는 방식이니까. 뭐 들뢰즈도 변명을 해주긴 했다. ‘비판은 그 자체로 창조적 에너지를 갖는다’라고 말야.

잡글을 좀 더 잘 쓰고 싶다. 나에게 하이브리드는 선택이 아니고, 존재 그 자체다. 논증적 글쓰기의 빡빡한 양식을 넘어서, 춤을 추듯이 논쟁하고 싶고, 논쟁하는 척하면서 노래하고 싶다. 마치 광대가 신랄한 풍자로 리듬을 타면서 양반을 경멸하듯 말이다. ‘음악적 글쓰기’라고 해야하나?

그래. ‘음악적 글쓰기’. 한동안은 그걸 좀 꿈꿔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엮어서 하나의 책을 20대가 지나가기 전에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가능한 내 또래와 대화하되, 다른 세대가 섬뜩해할 그런 시도들을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