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톱아보기 – ‘컴속의 나’의 주장에 대해서

<FONT color=#ff7635 size=3>생태주의와 관련하여</FONT>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1.정치적 생태주의와 생태주의 정치</FON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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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생태주의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창조한 문명은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평등과 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도 그것이 간과하고 있는 여성, 식량, 환경 따위의 사각지대로 말미암아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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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현재 인간 문명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인류는 공멸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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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생태주의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솔직히 늦은 감이 있다. 2040년이 되면 북극의 얼음이 다 사라진다고도 하고 인간의 자원도 고갈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 위기 앞에서 이념 따위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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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따라서 생태주의를 어떻게 인류에게 확산시키고 실천을 도모하는가가 당면한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생태주의 정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다. 후쿠야마가 틀린 것은 생태주의 정치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것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생태주의를 그는 몰랐다고 생각한다.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는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상의 민주주의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그러나 현실적으로 <FONT color=#0000ff>생태주의 정치</FONT> 는 가능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중심적인 역사는 그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그 해체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 정치를 넘어 생태주의 정치로 나아가는 실험을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는 역사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단지 이러한 노력이 가능하려면 <FONT color=#0000ff>정치적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FONT>. 이것이 현실적으로 그 나마 가능한 일이다. 생태주의자들이 정치로 진출하여 부분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생태주의로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녹생당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도 정치로의 진출이 아니더라도 그린피스등의 환경 단체들이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치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결국 생태주의 정치는 소집단에서 실험될 수는 있겠으나 국가 단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다만 정치적 생태주의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이 세상에 인간의 행위가 정치적이 아닌 것은 없다. 아니 좀 더 좁혀서 국가 정책과 관련한 경우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이란 이름을 띠게 된다. 농민의 쌀 수입 시위, 이를테면, 미국의 대량 생산된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한 유기농 쌀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생태주의라 부를 수 있다. 또한 생산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비순환적인 개발 등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생태주의라 부를 만 하다.</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그러나 ‘정치적‘ 이란 단어의 함의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정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대립적인<SPAN id=callbacknestconteworldtistorycom1326601 style="FLOAT: right; WIDTH: 1px; HEIGHT: 1px"><EMBED id=bootstrapperconteworldtistorycom1326601 src=http://conteworld.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 width=1 height=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wmode="transparent" EnableContextMenu="false" FlashVars="&callbackId=conteworldtistorycom1326601&host=http://conteworld.tistory.com&embedCodeSrc=http%3A%2F%2Fconteworld.tistory.com%2Fplugin%2FCallBack_bootstrapper%3F%26src%3Dhttp%3A%2F%2Fcfs.tistory.com%2Fblog%2Fplugins%2FCallBack%2Fcallback%26id%3D132%26callbackId%3Dconteworldtistorycom1326601%26destDocId%3Dcallbacknestconteworldtistorycom1326601%26host%3Dhttp%3A%2F%2Fconteworld.tistory.com%26float%3Dleft" swLiveConnect="true"></SPAN> 존재로 위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생산주의, 자연파괴등을 근거로 존립하고 있는 기존의 정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또한 그러하면 굳이 정치적이란 단어로 생태주의를 수식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치적‘ 이란 단어는 생태주의의 본질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주의, 종교, 문화, 생명과학, 공동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태주의를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다양성의 원리에도 맞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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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2.정치적인 생태주의에서 ‘정치적‘ 이라는 용어의 함의가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까?</FONT>
</p>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정치적‘이란 말의 함의는 기존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기존 정치의 안티테제로 의해서며, 생태주의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성을 협소화시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적인 생태주의, 식량 생태주의, 문화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등 다양한 생태주의를 협소화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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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3.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는 ‘정치적‘ 인 행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FONT>
. </P>
<P class=바탕글>정치적 생태주의가 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그 용어상에서 정치권력을 지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으로의 화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다. 그것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하기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A라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간이 B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생태주의 정치를 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태주의 정치라는 용어 자체가 언어로만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도 리피에츠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 정치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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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4.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FON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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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FONT color=#0000ff>
5.동양정신의 언급은 이분법이 아니라 생태주의로의 진정한 환원을 의미한다.
</FONT> </P>
<P class=바탕글>위대한 정신들은 다 동양에서 존재했다.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노자도, 간디도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생태주의자들이다. 희랍의 철학은 생태 사슬의 순환에서 인간을 독자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이성과 합리성으로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비순환적인 생산주의를 초래했다. 그리고 산업주의의 결과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통해 인간은 풍요 속에서 동시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서구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녹색 혁명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인간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생태주의 이론을 호들갑스럽게 받드는 지식인이 있다면 그것 또한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스스로에게 눈을 돌려보아도 생태주의는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고 있다. 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서 그토록 야단법석을 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서구가 전해준 위대한 유산이다. 산업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생태주의는 동양의 정신에서 찾았으면 한다.</P>

2008/08/17 – [Reviews] – ‘녹색’을 생각해 본다 – (생태주의 읽기 1)
<A href=”http://conteworld.tistory.com/entry/생태주의와-관련하여” target=_blank>생태주의와 관련하여</A>

언제나 비판과 토론을 위해서는 서로의 가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고, 비판을 하려면 같은 선상에서 시작을 해야한다. 아니면 전제부터 비판을 하던가. 그게 아닐 때, 비판과 야유와 비난은 섞이고 결국에는 개싸움 밖에 남지 않는다.

‘컴속의 나’의 주장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와 나의 전제와 개념은 공유가 되고 있지 않고, 같은 선상의 논의가 아닌데, 얼핏 그의 글과 내 글을 읽다보면 난 마치 ‘정치꾼’으로 환원될 소지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목소리’로 소통이 되는 현장이었다면 아마 큰 소리가 몇 번쯤 났겠지?

1. 생태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관계</p>

‘컴속의 나’에게 생태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상호 관계라는 것은 <FONT color=#003366>마구 엉켜있는 개념</FONT>이다.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는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상의 민주주의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FONT color=#0000ff>생태주의 정치</FONT> 는 가능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중심적인 역사는 그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그 해체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 정치를 넘어 생태주의 정치로 나아가는 실험을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는 역사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

‘생태계상의 민주주의’로 확대되야 한다며 같이 엮더니, 바로 뒤의 단락에서는 ‘민주주의 정치를 넘어’야 ‘생태주의 정치로 나아가는 실험’을 할 수 있단다. 도대체 ‘컴속의 나’에게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인가. 모순적 관계인가, 아니면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언제나 ‘민중이 주인되는’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완전한 민주주의로서의 생태주의’라는 말과 ‘인간중심주의’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지 ‘컴속의 나’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하는 ‘생태주의’라는 개념이 무엇인지가 굉장히 궁금하다. 내가 이해하는 생태주의는 ‘인간에게 정복당하는 자연’의 전제를 ‘자연속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사유하는 것이다.

‘여성, 식량, 환경 따위'(왜 ‘따위’라는 말을 쓰는 지 모르겠다. 그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평등과 해방에 있어 사각지대로 노정되고 있다는 것은 전제이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까가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이라고 ‘컴속의 나’는 생각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생태주의’가 뭐냐는 거다. 정확한 개념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욕심을 버리는 것’인가?

2. ‘정치적’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컴속의 나’는 생태주의 정치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현실에서 가능한 생태주의는 ‘정치적 생태주의‘라는 것이다.

일단. ‘컴속의 나’가 가지고 있는 ‘정치’라는 단어는 양면적인데, ‘생태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의 ‘정치’는 ‘正治’의 기능이다. 하지만 ‘정치적 생태주의’라는 것을 말할 때의 ‘정치적’의 함의는 ‘정책’이다. 두가지는 전혀 다른 이름의 ‘정치’이다.

‘컴속의 나’의 다른 글들에서도 나타나지만(이를 테면 청와대와 소맥파티(http://conteworld.tistory.com/entry/청와대와-소맥-파티)) 그가 생각하는 ‘현실정치’에 대한 입장은 굉장히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그가 바라는 이상향의 ‘정치’는 분명 도덕적인 우위를 가져야 한다는, 즉, ‘正治’의 관점이다.

하지만 ‘정치적 생태주의’를 언급할 때, 갑자기 그의 정치에 대한 규정은 순식간에 ‘정책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앞서 서평과 그의 댓글에 대한 덧붙임에 있어서 알랭 리피에츠의 ‘정치’라는 것의 규정이,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정치’라는 것의 규정이 ‘정책적’인 것도 아니고 ‘도덕적 우위로서의 正治’인 것도 아니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속성이 근본적인’ 정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컴속의 나’는 본인의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도덕적인 판단을 가지고 저자가 주자했던 ‘정치’에 대한 준거의 틀을, 그리고 내 ‘정치’에 대한 개념들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란 단어의 함의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정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대립적인<SPAN id=callbacknestconteworldtistorycom1326601 style="FLOAT: right; WIDTH: 1px; HEIGHT: 1px"><EMBED id=bootstrapperconteworldtistorycom1326601 src=http://conteworld.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 width=1 height=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wLiveConnect="true" FlashVars="&callbackId=conteworldtistorycom1326601&host=http://conteworld.tistory.com&embedCodeSrc=http%3A%2F%2Fconteworld.tistory.com%2Fplugin%2FCallBack_bootstrapper%3F%26src%3Dhttp%3A%2F%2Fcfs.tistory.com%2Fblog%2Fplugins%2FCallBack%2Fcallback%26id%3D132%26callbackId%3Dconteworldtistorycom1326601%26destDocId%3Dcallbacknestconteworldtistorycom1326601%26host%3Dhttp%3A%2F%2Fconteworld.tistory.com%26float%3Dleft" EnableContextMenu="false" wmode="transparent" allowscriptaccess="always"></SPAN> 존재로 위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생산주의, 자연파괴등을 근거로 존립하고 있는 기존의 정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

“‘정치적’이란 단어의 함의가 너무 협소”한 것은 내가 댓글에서도 지적했지만, 분명 지금까지 기존의 미국식 사회과학에서 내 놓았던 ‘권력 장악 시나리오’로서의 정치이다.

그리고 ‘인정’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는 ‘인정’하면 바로 ‘수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난 현실의 정치를 인정한다. 그리고 리피에츠도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안’으로 말하지 않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말을 조금씩 비틀다 보면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

마지막으로 ‘다양성의 정치’는 기존의 정치의 틀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정치의 틀을 전복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이다. 기껏해야 1968년 이후에나 ‘정치’라는 것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는 사유가 되었다. 단순히 ‘다원성'(존 로크가 이야기 하는)의 문제가 아니다. <FONT color=#003366>내가 말하는, 그리고 리피에츠의 책에 나온 ‘정치’는 국가와 국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FONT>
‘다양성의 정치’는 소수자들을 업악하는 획일된 권력에 대한 비판이며 전복의 시도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생태주의, 식량 생태주의, 문화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등 다양한 생태주의”가 각자의 인정을 받게 해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생태주의’라는 것이 정책적 수준(그가 말하는 ‘정치적 생태주의’)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생태주의’가 바라는 세상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도덕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무력하다.

리피에츠가 ‘정치적 생태주의’를 말한 이유다. 우리는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을 하면 ‘컴속의 나’는 “거봐. 결국 정치적 투쟁”이잖아 라고 말할 텐데, 그 ‘정치적 투쟁'(소수자들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 장악 시나리오 차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FONT color=#003366>우리의 욕망의 층위를 공격하는 것도 ‘정치적’이라는 것이 ‘다양성의 정치’가 말하는 것이다.</FONT>

<FONT color=#ff0000>즉. 미시적인 부분까지 쳐다보자는 것. 방법의 전환과 주체의 전환이라는 부분이 리피에츠의 책에 생략이 되어있지만, 그가 말하는 그리고 내가 역설하고자 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그것이다!</FONT>

3. 잔여물들…

그는 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가 ‘정치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다. 난 한번도 “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가 ‘정치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적이 었다. ‘정치적’이라는 말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갑자기 ‘허수아비 비판’을 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FONT color=#003366>나는 “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위’라고 본다.</p>

</FONT></STRONG>그리고 ‘역사에 가정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미래’만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역사책을 왜 보는 것인가? ‘역사에서 나쁜 짓했던 놈들’을 기억해다가 단죄만 하자는 것인가? 역사에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말이 나온 것도 이미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굳이 그에 대해서 비판을 할 필요도 없겠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정신들은’ 다 동양에 존재했는데, ‘동양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서구의 사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사유들을 빼놓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말할 것인가?

이야기를 확장하고 싶지는 않고, 한가지만 이야기해보자면, 동양에서만 ‘생태적 사유’를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반지의 제왕=""> 등의 이야기들, 그리고 서양 민중들의 신화에는 수천의 자연과 함께 호흡하던 신화들과 우화들이 존재한다. 서양의 ‘계몽주의’ 신드롬과 데카르트적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이 작동한 지 600년이지만, 동시에 그에 반하는 스피노자와 니체 식의 사유와 민중의 ‘역동성’에 의한 다른 생각은 그보다 더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철학사와 ‘지성사’를 공부하길 감히 권한다.</DIV>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