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부자라야 건강하게 산다! –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
|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 – ![]() 이창곤 지음/밈 |
|
관련 글</p>
2008/10/08 – [Reviews/Films] – 부산 여행기 ⑤ – <농민 약국="">, <검은 명찰=""> 관람기</a> Sicko – 도래할 미래?
마이클 무어의 <식코 Sicko="">를 본 적이 있다. 손가락이 절단 되었는 데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수천만원의 돈을 내야했던 어떤 로맨티스트 아저씨의 이야기. 자기도 몰랐던 질병 때문에 의료보험에서 해지되어 죽음에 맞이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p>
그와 대척점에 있었던 유럽의 의료보험제도. ‘무상의료’와 ‘필요에 의해 공급되는 의료행위’. 모든 것이 별천지로 보였다. 이건 단순히 잘살고 못 사는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정의'(Justice)의 문제였다. 한미FTA 협정이 체결되고 비준을 기다리는 지금. 다시 Sicko의 악몽이 떠오르곤 했는데, 과연 ‘민영보험’들에게 제소당하지 않고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지켜내거나, 그것에 공공성을 추가할 수 있을까? 항상 답은 부정적이다. 삼성생명을 과연 보건복지가족부가 완벽하게 디펜스해서 ‘민영건강보험’을 차단할 수 있을까? 그럴 의지는 있을까? 불현듯, 제주도의 ‘영리병원’이 떠올랐다. 일단 거시적 맥락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는 데, 항상 회의적인 결론들이 나왔다. 그리고 한 달전 부산국제영화제PIFF에서 독립영화 <농민약국>을 봤을 때 펼쳐져 있었던, 농촌에서 병원에 찾아가는 것조차 꺼리고 있는 농민들의 실상. </p> 그 때는 그냥 아팠다. 마음이 아팠다.
생각해 보니, 이게 꼭 남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에 만약 누구든 내일 당장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보자. 이건 그냥 ‘질병’의 고통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건 ‘풍비박산’이 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으레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을 굳이 조사하는 이유는 뭘까? 그 ‘으레’ 그렇게 벌어지는 일들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p>
</strong>저자들 또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반향도 매우 크고 다양했다. ‘가장 한겨레다운 기획’이란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극찬에서부터, ‘당연한 걸 굳이 왜 보도했냐’는 신문사 안팎의 냉소에 이르기까지. 보도 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의 계급시리즈에 버금가는 훌륭한 기획’이란 전자우편을 보내 왔고, 노동계로부터는 ‘오랜만에 한겨레가 멋진 기획보도를 해 신문 볼 맛이 났다’는 찬사를 들었다.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하지만, 반론과 냉소도 있었다. ‘돈 많은 이가 건강하다는 것 누가 모르냐’며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새삼 기획보도를 하느냐’, 또, 일부 독자들은 ‘굳이 계급갈등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pp.8-9).
아침 7시부터 TV를 켠다고 생각해 보자. 아침 7시의 정보프로그램부터 주부들이 죽치고 보는 12시까지의 TV프로그램들에서 ‘건강’ 주제의 아이템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타민> 등의 정보성 예능프로그램 역시 항상 ‘건강’이라는 화두를 빼놓지 않고 가져간다.
</p>
잘생긴 양의사, 한의사들이 마구 나와 어떤 음식이 좋고, 어떤 식습관이 좋으며, 흡연의 폐해는 무엇이며,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한 ‘처방’들이 판을 친다.
잘 생각해보자. 그들의 말들을 다 합쳐놓고 보면, 패스트푸드를 제외한 음식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효능이 있고(한 주는 ‘돼지고기’가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주는 ‘쇠고기’가 좋다고 말하며, 또 다른 한 주에는 ‘오리고기’가 좋다고 말한다. 결국 결론은 ‘그때 그때 달라요’ 밖에 없다), 운동은 하면 좋은 것 같고…. 결국은 몸에 안좋아 보일 것 같은 행위는 하지 말고, 좋은 것 먹으며, 잘 자라는 ‘훈계’만 남을 따름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잠을 못자고, 왜 두통약을 먹으며, 수면제를 먹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합의가 되어있는 듯하다. 그런 이야기는 종종 ‘질병’으로서의 ‘자살’ 그리고 ‘우울증’을 진단할 때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다시 ‘희희낙락’하면서 개개인의 건강관리 강연이 쏟아질 것이다.
TV 정보프로그램에 나오는 잘 빠진 연예인들의 덜덜 떠는 모습으로 ‘노란 신호등’을 바라보는 모습과 우리가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못하는 것. 대학병원은 비싸고, 오래걸린다하여 잘 이용하지 못하는 괴리 사이에 지금 한국의 ‘의료제도’라는 것의 모순이 담겨있다.
이 책은 그것을 진단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현재의 건강 상태의 관련성만을 눈여겨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활약상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조건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거치면서 인체의 건강에 집요하게 영향을 미친다. 다만 유전, 체질이나 건강 습관과 같은 개인적 특성이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이들 개인적 특성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요인의 영향이 미처 밝혀져 있지 않아 일반인들이 그것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p.29).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빈부격차가 건강불평등을 만든다!”
하지만 흡연의 행태는 물론 금연 정책에 따른 효과도 학력과 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고학력층에겐 흡연의 폐해를 강조한 금연캠페인 등이 상당히 효과적이었지만 저소득층에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p.45).
사회계층 간 흡연율의 격차는 되레 늘고 있다. 소득계층별 남성 흡연율 변화를 5분위로 나눠 살펴보면, 1분위(저소득층)의 경우 1998년 흡연율이 73.28%였는데 2001년에는 73.92%로 되레 늘었다. 그러나 5분위(고소득층)의 경우에는 1998년 66.04%에서 2001년에는 58.66%로 떨어졌다. 교육수준에 따른 흡연율에서도 시간에 따라 교육수준이 높고 낮음에 따라 불평등이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p.46).
흡연은 일례로 좋을 듯하다. 담배 나쁜 줄은 모두다 안다. 하지만, 못 끊는 건 금연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고, 보건소까지 근무시간에도 잠시 나가서 다닐 수 있으려면 직군이 나온다. 놀아도 되거나, 여유있게 다닐 수 있는 직업. 공장에서 교대근무 도는 현장 노동자라고 생각해 봐라, 이것이 언제나 가능할까? (물론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를 해줄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다가 가장 섬뜩했던 이야기는 아이들의 건강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 저체중아로 태어난 아이는 초반의 보호와 예방이 중요하고 그것이 잘 되지 않을 경우 성인기의 ‘건강’. 그러니 곧 성인기의 ‘가능성’ 중 큰 부분이 안 좋아 질 수 있다고 한다.
저체중아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서 어떤 ‘가능성’을 갇게 되는 지의 실례는 너무 아프다. 저체중아를 낳고도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줄 환경을 제공하기는 커녕, 망막검사에 들어갈 15만원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이야기. 야근과 잔업 때문에 몸이 좋지 않아서 저체중아를 출산한 엄마의 이야기. 반례로 잘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아이를 키워서 튼튼한 아이로 키운 ‘강남’엄마의 이야기는 너무나 슬펐다.
기대 여명(Life Expectancy)의 경우도 소득 수준별로 정확하게 갈리고 있었다.
조사 결과,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초, 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과 나이가 똑같을 경우 전국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곳은 서울 서초구이며 가장 높은 곳은 경남 합천군으로, 두 지역의 격차는 갑절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p.74).
그 문제들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 ‘아동’, 그리고 ‘비정규직’의 결을 타고 정확하게 사회적 불평등의 균절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
하버드 대학의 이치로 가와치 교수와 김명희 교수의 인터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치로 : 몇 년 전 하버드 교수 중 한 분이 왜 시민들이 하루 30분 운동도 못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심지어 자기처럼 바쁜 사람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데 말이다. (운음) 이 양반 같은 경우, 먹고 살기 위해 두세 가지 직업을 매일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전혀 생각조차 않고 있는 것이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고, 마땅히 씻을 곳도 없는 일터에서 점심시간 30분 운동이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이나 한 일인가?(p.151)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즉 개인주의, 큰 정부를 싫어하는 반-국가주의, 심지어 세금을 통해 혜택을 얻고 있는 빈곤층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는 세금 혐오, 그리고 도덕주의가 그 기반이 되고 있다. 미국은 매우 도덕주의적인 국가다. (웃음) 그래서 건강문제도 바로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 아니겠나? …… 미국의 경우, 소위 진보성향이라고 분류되어야 마땅할 노조 지도자들의 의견이 유럽의 기업가들보다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p.152).
건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보건의료비에 대한 지출을 늘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예산을 획기적으로 확충하여 현재 보험이 없는 사람들한테 모두 의료보험을 제공한다고 해도, 사회경제적 불평등 자체를 줄일 수 있는 사회 정책, 이를테면 누진적 조세제도나 최저임금의 인상 같은 것이 병행되지 않는 한 건강불평등은 해결될 수 없다(p.155).
결국 이 건강불평등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의료정책’과 ‘건강보험’의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실행되는 것은 총체적인 국가 시스템 차원에서이며, 이것이 해결되는 것은 결국 사회적 합의 -> 즉 ‘정치’의 영역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건강불평등의 감소’ 프로젝트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의 양상이다.
보고서(에치슨리포트)는 결론적으로 3가지 사항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첫째, 건강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정책들은 단지 건강상태의 개선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불평등을 일으키는지도 평가해야 한다. 둘째, 어린이를 부양하고 있는 가족들의 건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셋째, 소득불평등을 줄이고 빈곤가구의 표준생계를 향상시키는 조처가 취해져야 한다(p.164).
쉴러 국장은 건강불평등에 대한 정부기관들의 개입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부처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으며, 정부의 여러 곳에서 기금이 지원된다. 예를 들어 빈곤아동에 대한 지원은 단지 학교 급식의 개선(보건부)에 그치지 않고, 빈곤아동이 일정한 교육수준을 달성하는 것이 유리하도록 지원(교육부)되며,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우선적인 고용의 기회(노동부)가 제공되며, 만약 편부모의 경우에는 더욱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단일 부처가 아닌 초정부적인 지휘 아래 펼쳐진다(p.165).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냥 당장 보건복지가족부의 수장이 명령을 하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국처럼 총체적으로 당장 덤빈다해도 되지 않을 일이다. 일단은 실태파악이 먼저이며, 그것들에 대한 인식전환이 또한 우선이다.
여전히 우리는 ‘운’ 좋게 오래 살거나, ‘재수가 없어’ 병걸려 일찍 죽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만 할 뿐, 그것들에 대해서 문제제기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소박한 차원의 문제일 뿐. 곧 다가올 끔찍한 미래는 그렇게 ‘우발적’으로 우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영리병원’으로 펼쳐질 미래는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음으로 ‘배제당할’ 속박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윤추구’로 환원될 법한 대한민국의 2008년.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하는가?
의료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수준이 부자들에 비해 유의하게 낮으므로 당연히 이들의 의료이용량이 절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가 이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보편적 의료복지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의료필요가 많은 저소득층보다 상위 소득계층이 의료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한다. 이러한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구조화된 나라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다. 그런데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오로지 의료시장주의로 가자고 끊임없이 ‘의료산업화’를 주장하고 있다. 삼성생명을 필두로 금용자본이 위압적으로 우리나라의 미약한 국가보건의료체계와 의료의 공공성을 압살하고자 덮쳐오고 있다(p.242).
이들을 이겨내고, 의료상업화의 길, 미국식 의료제도를 거부하며, 국가보건의료체계 공공성과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위한 길, 유럽식 의료제도로 나아가는 길, 이 길로 우리는 가야 한다. 이 길은 올바른 길이고 정의로운 길이나, 결코 소수만으로는 갈 방도가 없는, 그래서 중산층을 포함한 온 국민이 함께 어깨 겯고 가야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p.243).
다만 한가지만 보태고 싶다. 최장집이 지적하지만, 요사이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혐오’ 그 자체이다. 그래서 투표를 하지 않고, ‘정치’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갖지 않기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결정하는 차원은 ‘국회의원’들의 몸값 책정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사회적 아젠다’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정치를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혐오’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당신들의, 그리고 우리들의 집합적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정치(政治)를 정치(正治)로 정의하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때까지 한겨레 기사가 참 좋았다”라는 회상을 해본다. 이런 기획,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발로 뛸 때가 되지 않았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