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지식시대를 넘어서! – 천정환, <대중지성의 시대>

대중지성의 시대10점
천정환 지음/푸른역사

 2008/12/05 – [Book Reviews/Literature] – 모던 뽀이 구보 성장기 in 서울 – 1
2008/12/05 – [Book Reviews/Literature] – 모던 뽀이 구보 성장기 in 서울 – 2
2007/12/03 – [Reasoning] – 지식인론 – Intro.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2007/12/06 – [Book Reviews/Social Science] – 이 시대를 그나마 버티게 하는 힘
2008/02/25 – [Book Reviews/Essays] – 희망을 말할 준비를 하자(우석훈 지승호,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시대의창, 2008)
2008/02/26 – [Life Log/A day in the life] – 공부에 대해서 – 넓이와 깊이
2008/12/11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김진송, 현실문화연구

<사회과학의 시대=""> vs <자기계발서의 시대=""></span> </p>

1980년대와 9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다. NLR, PDR이 경합을 붙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소련에서 들어온 맑스주의 원전을 읽거나, 일본에서 번역된 맑스주의 해설서를 읽었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강철서신>을 학생회실 혹은 세미나실에 숨어서 ‘함께’ 읽었다. 대학의 새내기들은 <껍데기를 벗고서="">를 읽거나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으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학습’받았다. </p>

그들의 이념이 굉장히 편협하고, 구태의연했을 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사회과학의 시대는 ‘책 읽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고, 20대는 덕택에 길거리로 나갔다.

IMF 사태 이후, 딱 그 판도는 엎어졌다. 잔인하게 몰아붙이는 경제 위기에서 대량 해고의 경제로 재편이 된 후, 사람들은 ‘생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자기계발서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기는 습관="">, <긍정의 힘="">, <시크릿>, <마시멜로 이야기="">, <공병호의 자기="" 경영="" 노트="">로 대변되는 자기계발서들을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했다. </p>

공병호와 조엘 오스틴

소설과 사회과학/인문학을 읽어대던 젊은이들은 TOEIC/TOEFL 책을 가방에 넣고, 한 손에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정글같은 시대를 버티는 중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이 세계의 구조적인 힘’들에 대한 연구가 자신’들’의 실존에 대한 이해였다면, 2000년대의 쿨한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그건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20:80의 사회, 아니 1:99의 사회가 되어도 자신은 그 ‘20%’에, 그 ‘1%’에 속할 거라는 자신의 최면에 속해서 산다. 이 들을 우매하다 말하고 말 것인가?

어느 순간 ‘지성’이라는 말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엉거주춤한 ‘지식기반사회’의 신기루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음울한 울음들, 그리고 그 표피에 올라와있는 ‘자본’의 욕망만이 ‘지식’이라는 말을 형상화하고 있다.

‘황금’의 지식 시대!

“부자되세요”의 세계. 아이들에게조차 “공부못해도 좋다. 건강하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을 했다가는 똑똑한 ‘대치동 엄마’에게 혼지검이 나는 시대.

자신의 감수성, 윤리, 정체성 모든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을 자신의 ‘몸값’으로 책정을 해야만 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그 ‘몸값’에 관한 것들만 ‘지식’으로 설정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천정환을 만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0점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문학과지성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때문이었다. 천정환을 알게 된 것은. ‘모던뽀이’에 미치다 보니 찾게된 길이었지만. 문지(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 그 편집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영풍문고를 돌아다니다가 <대중지성의 시대="">를 집었다. </p>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뒷켠에 있는 박태원에 대한 천정환의 비평이 주었던 인상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문학의 디테일들이라는 것들(이른바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나오는 ‘내재적 접근’)에 대해 특별히 말할 내용이 없는 나는 그의 박태원이 살던 시대상에 대한 ‘문화사’,’사회사’적 접근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아, 국문과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고, ‘젊은’ 생각을 갖고 있는 천정환을 유념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지성의 시대="">를 집었을 개연성이 크다. </p>

하지만 동시에 2004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크 하트의 <제국>을 가지고 학사논문을 쓰던 시절의 기억도 이 <대중지성의 시대="">를 잡게 하는 데 기여했으리라는 생각이다. 대중Multitude(윤수종의 번역은 Multitude를 대중으로, 우리나라의 ‘네그리 꾼’ 조정환의 번역은 다중(多衆)이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고 다양성으로 묶여있으며 네트워크적인 속성으로 일자The One(一者)로 환원되지 않는 권력에 대항하는 주권합성의 인간들. 언제나 우파 지식인들에게서 ‘무지몽매’하고 ‘저능아’로 판단되고, 엘리트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한다고 설정되는 그들. 그들을 다시 복권하는 ‘대중지성’의 시대라니! 끌릴 수밖에. </p>

그래서 <대중지성의 시대="">를 읽었다. </p>

다시 펼쳐져야할 ‘대중지성의 시대’

‘황금’ 지식의 시대 – ‘지식-돈’, ‘지식-권력’

저자는 처음의 들어가며에서 ‘지식-돈’으로 환원되는 지금의 시대의 스케치를 보여준다. ‘지식경제’, ‘비지니스 프렌들리’라는 말 역시도.

저 지식은 ‘돈 되는’ 지식이며 ‘권력을 낳는’ 지식이다. 그래서 ‘미래’, 곧 ‘돈[富]과 권력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지식이다. 다시 말해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멈추지 않고 성장하며 진화해갈 것인지, 그리고 그 자본주의적 성장의 동력이 중국이나 인도 같은 거대 규모의 시장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말하는 지식이다. 실로 중요한 지식이 아닌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힘’이다. 우리가 ‘먹고 살 길’이 거기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 포럼(세계지식포럼)에 혹시 다녀오셨는지? 안 다녀오셨다면 왜 그러셨는지?(p.9)

‘황금’지식을 쟁취하지 못한 패배자의 울음도 들려온다.

인문,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서의 상황은 좀 더 혼란스러운 듯 보인다. 분명 세계의 실제적 변화가 학문제도의 변화와 지식문화의 갱신을 요청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위상에 대한 반성도 중요한 화두로 만들었다. ‘통섭’, ‘복합학’, ‘횡단 인문학’과 같은 새로운 말을 자주 들을 수 있게 됐으며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명제도 들려온다(p.1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10점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후마니타스

그러면 이 시대에 뭘 하자는 건가?

그럼에도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낡은 틀을 깨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그 노력과 합의의 수준은 초보적이거나 원론적인 수준에 있을 지라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회통을 주장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으며, 새로운 앎의 주체로서 행동할 기본 요령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이 책의 시도는 그 같은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부와 권력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지식의 공유와 통합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p.12).

그리고 ‘대중지성’을 말하잔다. 왜?

대중지성에의 주장은 선도적인 싸움, 고독한 성찰, ‘계몽’의 필요, 개인의 창발성, 예술적 도약을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지금 당장 필요함을, 또한 그것들이 겸허하게 행해지고 새롭게 ‘사회화’할 것을 제의하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전문’, ‘고급’ 그리고 자기와 타자를 동시에 소외에 빠뜨리는 선민의식에서가 아니라, 전쟁과 지배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국가이성이나 근대의 ‘간지奸智’에 맞서서, 삶을 위하여, 연대 속에서 행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p.20).

저자 천정환의 전공을 책을 읽다가 다시 확인했다. 국어국문과 교수라는 데, 사실 그의 세부적인 전공이 ‘문화사’라는 것도.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렇게 폭넓은 범주의 이야기를 동시에 꺼낼 수 있는 것도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이들과의 ‘우정의 연대’ 덕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의 첫 장 <앎의 문화론을="" 위하여="">는 ‘황우석’ 사태로 대표되는 ‘지식-권력’, ‘지식-돈’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단순히 ‘황금’지식의 시대는 실제 ‘지식’이 돈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지식이 돈이 되는 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 지에 대해서 알지 않고서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벗어나야하는 이유도 생각할수 없다. </p>

사실 그보다도 우리가 눈 뜬 봉사처럼 되는 이유는 지금 당장의 불안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세상이 변해갈 것이며 어떤 분야가 더 돈이 될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지만, 지금 당장 대학에 합격해야하고 지금 당장 취직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그러한 앎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개인의 적성이나 공동체의 진정한 필요와는 무관한 공부가 선택된다. 진정한 가치와 ‘돈 되는 것처럼 보이는’ 환금성의 환각을 구분할 수 있는 혜안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p.47)

핵심은 지식의 가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절대 공유되지 않는다. 약간이라도 가치가 있다 싶으면 철저하게 값이 매겨진다.

오히려 싼 지식이 너무 많이 공유된 탓에 진짜 돈 되는 것은 가려져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다. 말도 안 되는 댓글뿐 아니라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올린 정보들도 대부분 매우 빈약한 것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쓰레기성 정보들 때문에 정말 중요한 지식과 정보가 뭔지 헷갈린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나를 지배한다. 심지어 저 많은 허섭스레기들을 잔뜩 늘어놓고 디카나 들고 놀도록 만든 바로 그것이 바로 차별과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당장 인터넷과 TV를 끄고, 책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53)

대안지식 만들기의 원칙

우리는 모두 ‘전문가’가 아니다. 물리학자에게 박태원의 <구보씨>를 물어봐야, 그는 기껏 대입을 위해서 문학 교과서를 들춰본 기억밖에 없을 테고, 나름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해봐야 국문학자보다 나을 수 없다. ‘전문화’가 많은 이들을 ‘전문가’로 만들었지만, 이는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다양한 분야의 절대적 다수인 ‘비전문가’들을 양산했다. “전문가가 말하라”라는 말 뒤에는 “비전문가는 닥쳐라”라는 윽박지름이 있다. 이 ‘전문가’체제의 위계가 어쩌면 문제일 수 있다. </p>

내 전공인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자주 하던 이야기가 있다. “정치학자들은 두가지 편향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도사’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디테일이 없이 일간지 ‘정치면’에 나올법한 이야기에 대한 평론만 하는 ‘도사’들과, 자신의 분야(이를테면 ‘정당수와 이념적 성향’)은 디테일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그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혀 몰라 그냥 듣고만 있는 ‘기술자’들. (결국 ‘기술자’들이 책을 안보기 시작하고 늙고 노쇠하면 곧 ‘도사’가 되긴 한다.)

세계는 복잡해지고, 우리는 각자의 ‘영역 너머’를 보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지성은 상반되는 속성을 지닌다. 첫째, 대중지성과 집합적 지성은 이론이나 ‘학문’에서 요구되는 과학성과 엄밀성의 눈으로 보면 ‘결여된 앎’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필연적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 자율적으로 발전해가는 세공화되고 극도로 전문화된 모든 개별 지식 앞에서, 다른 모든 지식은 표상적 지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불완전성은 전문적, 이론적 지식 스스로의 불완전함과 거울 관계다. 전문성, 이론성은 세계를 실험과 이론 내부로 축소하고, 다른 영역의 사유방식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이다. 둘째, 대중지성은 집합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전문지식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일, 곧 사회세계를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상식이나 교양과 같은 앎은 일종의 집합적 지성이다.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여기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요소이다. 대중지성은 서로 소통되지 않는 지식의 경계와 격자를 넘어 공통적 삶과의 교통을 가능하게 한다(p.123).

아까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보자. 한 분야의 이론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한명의 과학자에게 어떻게 한 사회전체가 당하는 지. 우리이게 중요한 것은 ‘전문가’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들을 엮어서 ‘집합적’으로 사회 전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다시 역으로 그 것들이 어떻게 개개의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들을 통해서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일상’의 층위와 ‘지식 세계’의 층위를 나누는 경계와 격자를 넘어 다니는 것이 왜 필요한 지. ‘지식-돈’, ‘지식-권력’이라는 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축물이다. (물론 헤겔주의자들은 이것을 ‘완성’이라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처럼 떠들 수도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대중들의 ‘설익은 지식’들이 상호보완하면서 경계를 허물면, 기존의 헤게모니 구조는 깨질 수 있게 된다.

다시 쉽게 말하자.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이 ‘정글’에서 ‘각자’ 살아남는 법을 익히는 것은, 결국 ‘지식-권력’, ‘지식-돈’의 위계를 넘나들 수 없으며, 결국 그렇게 겨우 살아남는 이들은 항상 한발 뒤쳐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자신들이 그 위계를 만드는 것에 문제제기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위계를 작동하는 원리는 계속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재의 질서가 규정한 것과 다른 방식의 ‘대중지성’의 흐름이라는 것들은 다른 방향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같이 살아남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거다. </p>

어떤 한국에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는 집에서 태어난’ 대학생이 TOEIC 공부를 열심히 해서 990을 찍었더니, 말하기/쓰기 시험을 보라하고, 영어가 좀 될만하니, 인턴경력을 요구하고, 인턴십좀 하고 났더니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 한다.
반대로 대치동 ‘교수’엄마 아빠의 자식은 어렸을 때 미국에서 자라서 영어는 원래 Native Speaker인데다가, 집의 엄마아빠의 ‘장서’, 그리고 어렸을 때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박물관’에서 놀아서 생긴 문화적 감성과 경험을 가지고 세계 유수의 기업에 철커덕 하고 붙는다.

이러한 문화적 자본의 격차라는 것을 ‘긍정의 힘’으로 뚫어보려 하는 ‘신앙심 가득한’ 2008년의 한국의 20대가 보이지 않는가? 무엇이 필요한 지 이제 말해야 하지 않는가? 특히 먹물 너희 새끼들?

‘오래된’ 현재, ‘오래된’ 미래로서의 앎의 문화사

지금의 이야기였던 1부 <앎의 문화론을="" 위하여="">를 지나면, 그의 ‘전문’분야인 한국 근대 문화사(1900년대초)로 돌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1930년대를 포함하여, 대한제국 말기의 ‘개화파’부터 일제의 ‘모던뽀이’들의 경성까지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p>

그가 ‘한국의 근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모던뽀이’를 주창하는 이유. 그건 그 시절이 ‘오래된’ 현재로써(1930년대의 모던뽀이, 모던껄을 보라 – 2008/12/17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여자들의 ‘오래된 현재’ – 신여성을 읽다 ①
2008/12/17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여자들의 ‘오래된 현재’ – 신여성을 읽다 ②
2008/12/05 – [Book Reviews/Literature] – 모던 뽀이 구보 성장기 in 서울 – 1
2008/12/05 – [Book Reviews/Literature] – 모던 뽀이 구보 성장기 in 서울 – 2
2008/12/11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김진송, 현실문화연구
2008/10/30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20년대엔 모두다 망국의 한에 울었을까? –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 ①</a>
2008/10/30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20년대에는 모두다 망국의 한에 울었을까? –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 ②</a> ) </p>

우리의 응축된 ‘일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타나는 ‘오래된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려 보자. 공교육은 대중지성 형성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보통’ 교육은 가장 기본적인 앎의 도구를 제공하며, 보통교육 수준 이상의 공교육은 민중 내부의 연대와 대중지성 형성의 토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 수행되는 공교육과 제도교육은 정반대의 기능도 수행한다. 권력이 원하는 것만 알고 생각하며 순종하는 인간을 만들려 한다. 교육을 통해 식민권력과 보수주의가 원하는 바는 이것밖에 없다. 그래서 한편, 대중지성은 언제나 제도, 국가와 대립하는 관계에 놓일 수 있다. 식민권력은 언론, 출판을 비롯한 ‘민족사회’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탄압을 통해 앎의 독점을 획책했다. 식민지 시기, 즉 근대 초기의 대중지성이 ‘국가 없이’ 또는 국가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자발성이 근대적 앎의 성립의 주요 특징이다(p.307).

‘함께 읽기’는 일종의 의례ritual이며 사건이다. 그리고 독서회는 그 자체가 조직organ이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변화한다. 같이 읽는 계몽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계급, 젠더, 세대는 (재)구성된다. 그들의 신처마저 변화할 수 있다. 독서회가 지닌 운동으로서의 위력은 여기에 근거한다. ‘운동으로서의 독서’는 삶과 유리된 지적 행위가 아니고 풍속도 아니다. 이는 실천과 앎이 통합되는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주의 독서회에의 참여는 곧 세계와 자기존재에 대한 총체적 ‘의식화’다. 또한 야만적 탄압의 대상이었기 까닭에 그것은 곧 존재의 모험과 실존의 행방이 걸린 문제였다(pp.298-299).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가 생각이 난다. </p>

2008/10/20 – [Book Reviews/Literature] – 구슬픈 밤, 잠들지 못한 눈들을 위한 진혼곡 –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2008

밤은 노래한다10점
김연수 지음/문학과지성사

독서회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이정희의 모습과, 1920년대 함께 모여 함께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갈구하고 또한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 지에 대한 ‘소망’들을 늘어놓으며 ‘희망있음’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모습. 어쩌면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맑스가 이야기했던 낮에는 일하고 점심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평론을 하는 세상. ‘미래’.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보자. ‘운동으로서의 독서’라는 것이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지 않는가? 사실 블로그라는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닌 것 자체도 사실은 이러한 경향-즉 소통의 문제와 ‘대중지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물려있다(이러한 논의들은 종종 민노씨의 블로그, 리카르도의 블로그 를 읽다보면 발견하게 된다).

인디고 서원에서 행복한 책읽기10점
인디고아이들 지음/궁리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10점
고미숙 지음/휴머니스트

처음에는 ‘지식인’들의 운동이었지만, 점차 횡단하는 ‘함께 읽는 모임’으로서의 독서회라는 것들이 요즘에 점차 복권되는 추세이다. 그것은 일단 ‘지식-권력’,’지식-돈’의 흐름에서 배제된 이들의 ‘앎의 욕구'(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운동으로서의 독서’가 주는 ‘치유’의 효과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함께 읽고 그것들을 ‘함께’ 생각하고 해야할 꺼리들에 대해서 나누는 행위 그것은 커다란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석훈의 책을 읽으면서 ‘작은 마을’, ‘작은 공동체’의 다양성이 흩어지지 않는 ‘다안성’이 갖춰진 경제에 대해서, 또 사회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점차 내가 살아야 할 방향,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해야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이들과 공유하는 것. 경쟁보다 ‘협력’에 대해서 먼저 알려주기. 그리고 또 ‘자유’와 ‘다양성’들이 존중되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화이부동'(이건 순전히 전주에 다녀와서 생각한 것이지만 – 2008/11/08 – [Culture/Travel & Play] – 전주여행기 ① – 전주에 도착하다.
2008/11/11 – [Culture/Travel & Play] – 전주여행기 ② – 맛집기행 : 왱이 콩나물 국밥집, 서신동 막걸리 골목에 가다
2008/11/11 – [Culture/Travel & Play] – 전주여행기 ③ – 최명희 문학관
2008/11/14 – [Culture/Travel & Play] – 전주 여행기 ④ – 한옥마을의 간판 바라보기 : 손글씨 Calligraphy in Korea
2008/11/04 – [Book Reviews/Social Science] – 전주가 사무치게 만드는 책 – 강준만, 성재민 외 <재미있는 전주="" 이야기=""></a> )

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회복’이라는 것. ‘사회적인 위안’이라는 것과.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그리고 작은 공동체가 줄수 있는 , 작은 Local 단위의 지자체가 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한다. 또 그것들을 버티게 해줄 ‘대중지성의 시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p>

스마트한 논리와, 동시에 유려한 문체. 국문학을 해서 그럴까? 아니면, 그의 말처럼 ‘횡단적’ 사유의 결과일까? 그의 문투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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