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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2009) – 내 새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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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불문하고 한국의 애들에게 믿을 구석은 엄마다. 엄마는 밥도 주고 도시락도 싸주고 학원비도 주고 용돈도 준다. 엄마는 이기적이다. 엄마에게 ‘정의’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내 새끼’가 잘 되는 것이 정의이고 ‘내 새끼’가 엿먹는 상황에서 엄마는 염치고 나발이고 없다. ‘내 새끼’가 누군가와 싸워서 상처입으면 그 집에 쫓아가서 그 집 엄마와 머리 끄댕이를 잡고라도 결판을 내는 것이 엄마다. ‘내 새끼’가 아프면 엄마는 밤을 새서 간호한다. 결혼을 해도 ‘내 새끼’는 그래도 ‘내 새끼’다.
20대의 독립이라는 꿈들이 멋지게 비추어진 적이 있었다. 90년대 유행했던 청춘 드라마(<질투>, <프로포즈>, <느낌> 등)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취직과 동시에 근사한 오피스텔 원룸에서 살기 시작한다. 전문직으로 일하면서 본인의 개인적 영역을 확보한다. 그 공간에서 사랑하고 또 일을 한다.느낌>프로포즈>질투>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런 ‘독립’의 꿈은 그것이 현실에서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면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완전히 무시되기 시작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의 공유는 혼자 살지만 그건 정말 그가 혼자 살만 한 조건(부자집 아들)이기 때문일 따름이다. 대부분은 ‘내 새끼’만 생각하는 엄마와 같이 산다(아빠의 부재보다 엄마의 부재가 항상 크게 비춰지는 것을 보면 엄마가 확실한 우선성을 갖고 있다). <와니와 준하="">에서 와니와 준하가 밖에 살 수 있는 건, 그들이 ‘지방’에 살기 때문이다.와니와>
취직해도 엄마랑 살고, 결혼해도 엄마랑 살려 한다. 떨어져 살아도 최소한 ‘가깝게’는 살려 한다. 엄마는 해결사다. 애도 키워주고 반찬도 해준다. 애 어린이 집도, 애 학교도 데려다 주는 건 엄마다.
그런 한국 엄마와 엄마 젖을 만져야 잠을 자는 아들이 있다. 아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빚을 내서라도 막을 수밖에 없는 엄마. 그래도 아들이 어디가서 머저리 소리 듣는 게 싫어서 누가 바보라고 하면 반드시 족치라고 가르쳐 준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까라고 ‘합리적’으로 가르쳐 준다. 그런 애지중지 아끼는 애인 같은 아들이 어느 날 집 앞에서 ‘살인 혐의’로 연행되어 경찰서로 간다. 엄마는 아들을 찾으려 달려 간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백방을 향해 뛴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그것이 사회의 윤리에 있어서 어떻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살해된 이의 집에 가서 끝끝내 무죄를 주장하면서 “우리 도준이 미워하지 마세요!”라면서 자기 아들을 옹호한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엄마는 어떻게 행동할까??

예전에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흥미로운 영화가 있었다. 최지우 주연의 <올가미>라는 영화였다. 애지중지 혼자 키운 과부의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에게 그 시어머니가 하는 행위들이 엽기적이었다. 특별한 악의라기 보다는 그 아들에 대한, 새끼에 대한 ‘소유욕’의 문제였다. 거기에 사회 보편적인 윤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인지상정’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다 말같지 않은 소리에 불과하게 된다.올가미>
한국의 만성적인 입시병폐가 치유되지 않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내 새끼’에 대한 애착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애착들이 오히려 사회 윤리를 구축해 나간다.
봉준호는 시골 읍에서 야매 침 놓으며 약재상을 하는 김혜자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원빈(도준)의 역할로 ‘특수성’의 무대를 만들었지만 영화 말미에 불편함이 엄습했던 것은, 어떠한 조건에서든 발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엄마들의 ‘내 새끼즘’(내 새끼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계급적 조건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작동하는 ‘내 새끼즘’.
가부장의 권위라는 것이 명퇴와 감원과 정리해고라는 ‘불안정노동의 시대’의 개막으로 개박살나는 시대에 ‘엄마’라는 존재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권능자가 되었다. 이미 한국의 엄마는 ‘아빠’에게 눌려 찍히는 존재가 아니다. 게임이 끝난 지는 오래다. 엄마는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원하는 모든 욕망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해 주려 한다. 386 배운 엄마들이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는 끝끝내 ‘내 새끼’한테 못 먹이겠다며 나오는 것이 ‘촛불시위’의 ‘유모차 부대’를 견인하며 사회 윤리의 긍정정 방향을 제기했었지만, 다른 한 편 ‘사교육 바람’이나 ‘청담동 엄마의 입시전략’의 경우는 더 잔인한 경쟁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촛불 시위를 하면서도 공정택을 미는 ‘강남 좌파’를 보아라. ‘잘 배운 녀자’가 ‘잘 배운 엄마’로 변할 때 어떤 효과가 나올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또 다른 한편에서 그 ‘내 새끼즘’에 대해서 자식들이 어떻게 대응하는 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은 엄마의 품에서 순전히 ‘내 새끼’로만 키워진 유아적 존재들인가? ‘너드’에 불과한가? <마더>는 유아적 존재의 원빈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 얕은 생각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엄마의 그 ‘내 새끼즘’에 의탁하는 젊은 이들. <커프>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부암동과 홍대의 소소한 젊음의 에너지를 ‘알면서도’ 엄마의 ‘아파트>를 떠나지 않는 그들. 그들은 과연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까? 회의적이다.커프>마더>
그것들이 엮어낸 세계. 2009년의 대한민국. 아이를 위해 뭔가를 해놓고 허벅지에 홀가분하게 침 한대 맞고 기분풀고 떠나는 엄마의 ‘효도관광차’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