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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으로 ‘발견’한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나, 이렌느 페퍼버그, 2009,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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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생물 시간에 척추동물의 진화단계를 배운다. 가장 진화가 ‘덜’된 어류, 그 이후 양서류가 등장하고,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순서로 척추동물은 진화한다.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인간으로 가정된다. 그런데 그렇긴 한걸까?
이러한 ‘배열’과 린네에서 이어진 분류학의 전통은 특별한 논쟁없이 그 힘을 잃지 않아왔다. 교과서가 겨냥하는 것은 인간이 중심에 와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는 관점들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동물하고 사람하고 다른 점은 동물은 ‘의식’하지 않고 ‘언어’가 없이 살기 때문이다.” 같은 명제들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나 역시 그랬다. 서구의 과학주의가 항상 제국주의와 대쌍이 되는 것에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가 바탕에 들어와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이런 상식을 가지고 <알렉스와 나="">를 읽기 시작했다. 나 역시 당연히 인간과 유전자를 99.7% 공유한다는 침팬지나 영장류의 동물들이 가장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돌고래가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는 했다. 어쨌거나 영장류도 아니고 포유류도 아닌 조류가 이 정도의 지능을 가지리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알렉스와>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나만의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많은 언어학자, 심리학자, 동물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총회의 이름은 <영리한 한스 현상, 말, 고래, 유인원과 사람들의 의사소통>이었다. 이 총회는 동물 언어 연구자들의 작업을 비난하기 위해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한데 모인 대대적인 행사였다. 총회의 주도적인 분위기는 “<FONT color=#000000>그들은” 말할 수 없고 오로지 “우리만” 말할 수 있다는 오랜 편견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FONT>(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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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회색 앵무새 알렉스를 만나 언어와 학습 능력을 시험하던 이렌느 페퍼버그가 항상 곤궁에 빠졌던 것도 학계가 이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앵무새가 사람들을 흉내내고 발음을 똑같이 낸다고 하여 그것을 언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앵무새는 언어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앵무새 상호간에 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FONT color=#000000> 이를테면 “앵무새들의 언어를 인간의 것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앵무새에게는 언어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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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렌느 페퍼버그는 그점을 극복한다. 기존의 동물 행동학에서의 동물실험이라는 것은 전제 자체를 동물을 일정 반응을 주면 특정한 결과를 산출하는 ‘로봇’이라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예 동물의 ‘언어’나 ‘사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기에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이론 전개를 해갔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도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반응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FONT color=#f3709b>**우리는 동물들이, 아니 생태계가 보내는 숱한 신호들을 우리의 언어로 즉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하여 다 무시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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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렌느 페퍼버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이해받지 못하고 퍼듀 대학에서 노스 웨스턴으로 또 투싼으로, MIT의 미디어 랩으로 전전하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지켜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 알렉스와의 우정이 있다. <알렉스와 나="">는 알렉스와 이렌느의 페퍼버그의 우정의 기록이다.알렉스와>
1~6까지의 숫자를 이해하고, 0을 이해하고, 수백개의 단어를 기억했던 알렉스. 그것을 그냥 흉내내거나 반응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FONT color=#000000>그는 항상 이렌느 페퍼버그의 감정을 이해했다.</FONT> 정확하게 “인간의 과학적 방법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알렉스에게 너무 정을 붙이지 않도록 항상 조심했기 때문에 알렉스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이전에는 나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알렉스에 대한 내 벅찬 감정을 감추어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다(p.249).</BLOCKQUOTE>
이렌느 페퍼버그는 항상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객관성’과 ‘공정성’ 때문에 정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항상 둘은 ‘미안해’, ‘나 돌아갈래’, ‘사랑해’를 나누며 교감했다. 둘의 친밀감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의 훈련들이 더 빛을 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음 속 깊이의 무언가가 그들을 지켜주는 끈이 되었을리라.
</p>미스터 A 알렉스는 이렌느 페퍼버그가 모처럼 돈 걱정에서 해방될 법했던 2007년 어느날 “착하게 있어. 사랑해”를 말하고 다음날 주검으로 발견된다. 너무 한 것이 많아서였을까?
천재 앵무새를 발견한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말로는 ‘실험 도구’로 여길 앵무새의 잠재력을 극대로 끌어내기 위해서, 아니 오히려 사회적인 소통을 했기에 잠재력을 끌어냈던 이렌느 페퍼버그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FONT color=#c8056a>표지에 딸린 말마따나 교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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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0000>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들려올 세상에서의 옹알이들을 무시하고 그냥 쉽게 선을 긋는 건 아니었던 지 생각해 본다.</FONT></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