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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에 대한 생각
성찰(Self-Reflection)의 원어를 잘 생각해보면 거울을 보는 거다. 거울을 보면서 제 모습을 보다 보면 뭔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찾게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동시에 Reflection은 ‘반영’이 된다. ‘보여줌’이 전제 되어있다. 스스로 보여준다. 거울이 하나 있을 때 제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성찰은 사전적 정의로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고 깊이 생각함; 가톨릭에서, 고백 성사를 받기 전에 먼저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자기 양심을 살피어 지은 죄를 생각해 내는 일을 이르는 말.”이 된다.</p>
그런데 난 성찰이라는 말에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말이 지향하는 벡터가 어느 지점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더 명백히 그 단어에 거리감을 두게 한다. 이를테면 ‘성찰’이라는 말은 분명 과거로 향한 벡터값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성찰의 원어인 Reflection의 동사형인 Reflect를 떠올려 보자. 거울이 하나가 아니라 두개가 되어 무한으로 자신을 바라보려한 인간 시선은 끝없는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는가.
성찰에 대해 가타부타 할 생각은 없지만 종종 성찰의 필요성을 ‘주장’ 혹은 ‘계몽’하려는 시선들을 느낄 때 두 개의 거울을 떠올리게 된다. 무한반복이 시작된다는 느낌이다.
사실 ‘성찰’이라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원죄와 회개에 관한 관념이 떠오른다. 물론 예수의 회개는 atonement를 위한 repent가 아니고 “마음을 고쳐 먹는” 미래 지향의, 실천적 메시지의 repent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성찰’은 과거 지향의 벡터가 내재되어 있고 보수주의 기독교의 ‘회개’ 관념과 맞물린다. 현실은 과거의 누적이 되고 지금을 알기 위해 과거를 바라 본다기보다 과거를 추적하기 위해 지금을 읽는 행위가 발생한다. 누구도 ‘원죄-회개’ 프레임을 추인하는 순간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늘 죄의식이 지배를 한다. 그 프레임에서 최선의 선택은 “믿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외치고 회개하고 누구더러 죽여달라 해서 죽는거다. 죄 짓기 전에 빨리 죽는 게 최고지. 누구도 이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span>차라리 유가의 ‘수신’이 더 나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심신을 닦는다”의 의미의 벡터는 앞으로 향해져 있다. 그리고 늘 ‘현재’의 문제가 내제되어 있다. 또한 맑스를 생각해 본다. 맑스는 ‘역사 유물론’을 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죽은 시대의 망령이 현 시대를 짓 누른다”라고 말하면서도 늘 강조한 것은 ‘실천적 명제’였다. 또한 니체의 ‘긍정’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차라리 난 뭐라고 삽질이라고 벌려보면서 웃다가 지쳐 죽는 게 어떤 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p>
‘성찰’을 나 역시 하고 싶다. 하지만 계속 경계하는 것은 무한반복되는 ‘자격’의 문제. “넌 성찰을 더 해라. 고백하자(사실은 고백하라).” 식의 논리로 순환될 것만 같은. 매주 죄를 회개해야 하는 우파 기독교의 모습이 전이된 형태의 성찰이다. 내가 해야하는 성찰은 어떤 ‘성찰’인가.
나에 대한 기록들을 요 사이 계속 쓰고 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려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고, 지금 나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서 앞으로 향하기 위한, 어느 정도는 ‘도구적인’ 수단이다. 나 역시 ‘도구적 합리성’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순간, 그리고 그 전도를 늘 권력의 작동방식으로 전제하던 근대성에 대해 나 역시 반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도구성’을 완전히 잃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매번 선사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문제는 오히려 어느 방향으로 갈 건지, 어떻게 갈 건지에 대한 거 아닌가. 그 문제를 섞어서 ‘성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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