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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음과 다름 그리고 이름 붙이기 – 아마르티아 센 : 정체성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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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폭력 – ![]()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지현, 이상환 옮김/바이북스 |
사람은 모두 같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다르다. 이 말은 이율배반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은 모두 ‘동등’하다는 점에서 같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이 두 가지 명제는 한 가지의 포괄적인 주장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서로 다르다고 차별, 즉 동등하지 않게 대하면 안 된다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 명제가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건 순전히 착각이다.
또 하나 이야기할 게 있다. 바로 이름 붙이기의 힘이다. 김춘수의 시 <꽃>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심상만을 기억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시인이 그 ‘꽃’을 ‘꽃’이 아니라 ‘총’이라고 불렀다면 그는 곧 이어 ‘총’이 되고 우리의 인상에 남는 것은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이었을 것이다. 질문은 계속될 수 있다. 이를테면 왜 ‘내’가 이름을 붙이냐는 것이다. 그 꽃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까? 달리 묻는다면 흑인은 자신들을 ‘흑인’이라고 먼저 불렀을까? 또 그 ‘흑인’에게는 ‘흑인’ 말고 다른 이름들은 없었을까? 이름 붙이기는 그를 부르는 하나의 이름만을 주고, 또 달리 불러야 할 것들을 생략하게도 만든다는 것이다. </p>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은 그 문제에 대해 짚으려 한다. ‘정체성’. 즉 어떤 집단을 하나로 이름 붙이는 것과 폭력은 어떻게 연관되는 가의 문제를 살펴본다. 우리는 종종 9.11 테러를 ‘이슬람 문명’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한 습관은 무슬림들을 볼 때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보려는 습관을 몸에 새기곤 한다. 덩달아 새뮤얼 헌팅턴 같은 학자들은 그러한 습관을 이론으로 만들어 <문명의 충돌="">같은 논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습관일 뿐 센이 말하는 ‘이성적 사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를테면 ‘힌두교 문명’으로 분류되는 인도는 세계에서 단일국가로는 가장 많은 무슬림들이 사는 나라이다. </p>
“그럼에도 이론은 사회사상과 정치 활동,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을 단일 정체성 속으로 인위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세계를 편 가르는 결과를 낳고 세계를 잠재적으로 훨씬 더 선동적이게끔 만들 수 있다.”(p.282)
새뮤얼 헌팅턴의 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비판만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순전히 그 헌팅턴 같은 ‘문명’이나 ‘종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이 세상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동남아시아를 여행 다니면서 그들을 ‘가난’과 그들의 ‘게으름’을 쉽게 짝지어 생각하지 않는가. ‘열대기후’=‘게으름’이라는 편리한 연결을 생각하는 습관 덕택이다. 생각해보면 100년 전에 조선을 찾은 서구의 선교사들도 조선인들의 농한기를 보면서 ‘게으름’을 지적했고 그것을 ‘문명’의 도태와 직결해서 생각하곤 했다. 지금 우리는 게으른가? 그런 습관들은 하나의 믿음을 만들고 그들의 실천을 만든다. 사회과학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말이 있다. 이론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이론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종 그것들은 우리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복잡다단하고 각 사람들은, 그리고 각 집단들은 각자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할 때가 많다. 나는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데 내가 ‘기독교’라고 종교 란에 쓴다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과 나는 동일할까? 나는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비판에 공감하고 또 동성애자에게도 성직을 수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 어렸을 적, 엄마와 남산타워에 올라가는 길 엄마가 사줬던 빵빠레의 달콤한 맛과 빵빠레를 흘려 옷에 범벅을 했을 때 엄마가 손수건을 꺼내서 닦아주었던 그 순간의 강렬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같을까? 개개인의 구체적 경험들은 다른 개인들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 집단의 구체적인 상이한 경험들은 마찬가지로 다른 집단들을 구성한다. 이론은 명쾌함을 위해 구체적 맥락들을 단순화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같은 ‘정체성’이라는 말로 묶어대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우연찮게 하나로 지금 묶일 수 있는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늘 개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은 다른 다양한 정체성들과 부딪혀 가면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물론 개인도 집단도 이 세계도 계속 변한다.
한 가지 더 센의 이야기에서 맘에 드는 이야기.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나온다. 나도 종종은 그 말들에 혹하곤 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 이를테면 요즘 부쩍 많아진 베트남 엄마들의 아이들과 다문화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들에게 베트남어를 배울 수 있는 ‘베트남 학교’를 지어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그들이 학교에서 한국인 부모의 아이들과 잘 지내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다문화주의’라는 말은 첫 번째 맥락에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이어 ‘게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 ‘베트남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그렇게 한국 아이들과 지내지 않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겉돌게 될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그냥 그렇게 다양한 정체성들이 ‘분리되어’ 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섞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트남 출신’이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순간은 아닐까. 피부색도 성별도 종교도 상관없이 그것들이 ‘같은 인간’임에 비추어 별 게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세계화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종종 우리는 자꾸만 어떤 사람에게 ‘이름 붙이기’를 통해 자신들과 구분하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마주대하며 대화하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센의 이야기는 하나의 참고 지점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