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vs ‘훈계’ : 지금 ‘젊은 애들’의 연애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 1

2009/02/06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당신이 살아가는 지금의 사랑이야기, 그 드라마 –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2009/01/30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고미숙이 제안하는 연애와 사랑의 ‘초식’ 쌓기 –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010/10/09 – [헨드릭스의 책읽기] – 야성의 사랑학. 성해방과 자유.
2010/01/28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영화를 보다] – 새로운 사랑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 500일의 썸머 (2010)
2010/10/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어느 좌파 인텔리 남자의 연애 판타지 – 그 남자, 영풍문고를 가다.
2010/12/23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영화를 보다] – 김종욱 찾기 (2010)
2010/12/30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음악을 듣다] – 29살의 애도곡 – 2 : 30대에 달기 싫은 노래: ‘걸어가자’, ‘좋은 사람’
2010/12/24 – [헨드릭스의 문화읽기/문화연구의 시선] – 남자로-식별되는-남자men-identified-men로 여성주의 말하기
[경향] 목마른 연인에게 명품백보다 시원한 물을 -김태훈 인터뷰(유인경)
[한겨레- ESC] 열심히 들이대라, 판타지를 버려라 – 김어준, 임경선 외 패널톡
[한겨레-ESC] 모태솔로, 당신은 누구?
* 이건 순전히 chobi님의 아이디어와 몇 명 저희 랩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글은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이므로 재미없을 수 있습니다. 순전히 먹물용일지도.. ;; 그리고 저도 ‘젊은 애’입니다. 저를 제외하고 쓴 말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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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가장 많은 훈계 – 젊은 애들의 연애!

세상에서 가장 많은 훈계가 ‘젊은 애들’에 대한 훈계이고, 두 번째로 많은 훈계가 ‘연애 못하는 애들’에 대한 자칭 ‘연애 박사’들의 훈계인 것 같다. 두 가지를 합치면 ‘젊은 애들의 연애’에 대한 훈계가 되고 이는 가장 강력한 훈계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유사 이래 존재해왔지만, 지금 말하는 ‘훈계’들은 좀 다른 양상에 대한 훈계로 보인다.
그런 징후들이 요 근래 나타나고 있다. 두 달 전쯤 <한겨레-ESC>에 ‘대박기사’가 떴다. 이건 <개그콘서트>에서의 ‘모태솔로’와 관련된 것이었다. 오나미 ‘성녀님’이 우리에게 모태솔로도 괜찮다며 위로하는 이 세상. 이건 무엇인가? 또 다른 한 편 ‘좌파-페미니스트’로 식별되는 여성 논객의 ‘연애’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다. <야성의 사랑학="">. 큰일 났단다. 요즘 애들이 도무지 들이대질 않는단다. 커피 한 잔 마시자며, 전화번호 좀 따자며 들이대는 수컷들이 등장하지를 않는다. 또 다른 한 편 이에 대한 강경한 훈계들이 난무한다. 여기저기 지상파 예능 버라이어티에 출연해서 ‘문화평론가’로 말하고 있는 김태훈이 조금 부드럽게, 그리고 ‘진보매체’에 글을 쓰며 엄숙한 문화에 똥침을 놔주시는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가 조금 더 강경하게 훈계들을 한다. 요는 간단하다. “겁없이 들이대라구!!” </div>
# ‘커리어 우먼’의 ‘자아 찾기’?
후자의 ‘훈계’ 혹은 ‘안타까움’의 이야기는 많이 나온 것 같지만, ‘모태솔로’에 대한 위안들은 좀 새로운 부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연애 말고 다른 걸 하라고 강조하던 이야기들은 존재했다. 90년대의 ‘자아 찾기’ 시리즈가 그러한 부류다. “네가 가장 잘 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며 한 부류의 인간들은 ‘커리어 우먼’ 담론을 퍼뜨렸다. 여기에는 분명한 성별전략이 있었다. 여성=연애하고 결혼하는 존재라는 성역할을 부여해놓고 이걸 깨자는 방식의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지금 잘 통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을 개척하기에 전체적인 시장의 문은 너무나 좁아져버리고 있고, 여전히 한국사회의 노동시장은 ‘가부장적’으로 돌아간다. ‘취집'(취업+시집)이 하나의 전략이 되는 것도 요즘의 현상이다. “연애를 안 할 테니, 일을 주어요!”라는 반발에 여성의 동기부여를 했었던 ‘일군’의 여성주의자들도 힘을 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커리어우먼 담론’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으로 박살났다.
하지만 이게 순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자들도 그렇다. 남자들도 수컷의 꼿꼿한 남근을 자랑하기에는 힘이 너무 없어졌다. 이제 마다할 ‘연애’를 제안하는 남성들도 점차 사그라든다. 박력있는 남자들이 줄어들고 있다. 목수정이 긴장했듯이.. 어떤 친구가 요즘에 ‘멀쩡한 남자’ 찾기가 관건이라는 질문은 점점 타당해지고 있다. 차라리 페미니즘이고 뭐고 몰라도 그냥 착하고 책임감 있고, 잘 들어주는 ‘공대 남자’면 된다는 이야기. 근데 그런 남자들은 몇 가지 조건들 때문에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자리잡은 남자) 여기에 속설이 개입한다. “남자가 바라는 여자는 늘 24살.” 크리스마스 이브(12/24)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반쯤의 진실을 보여준다. 남자가 24살을 택해서 되는 게 아니고, 24살이 보기에 멀쩡한 남자가 ’30대 중반’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연애인들의 띠동갑 언저리 결혼이 완전히 황당하지 않아보이기 시작한다.
‘멀쩡’하기에 힘든 이 세상에 모태솔로들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엔 남녀도 없다. 바쁘고 정신없고, 불안해서 자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게 만드는 게 신자유주의라는 리차드 세넷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자기 앞가림도 힘들고, 뭐든 잘못하면 다 ‘너님 탓’이라는 세상에서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노동시장에서의 ‘생환’과 학생일 경우 ‘스펙쌓기’의 경합 속에서 ‘연애’까지 거기에다가 부과하는 건 아무래도 ‘과로’를 유발한다. 거기에서 회피하려는 심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 텐데, 그것이 위에 언급했던 ‘위로’ vs ‘훈계’의 맥락인 것이다.
# ‘위로’ vs ‘훈계’
‘모태솔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권한다. “이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를 서로에게 납득시킨다. 가장 낙관적으로 ‘연애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데이트 비용이 없고, 관계를 지속시킬 것에 대한 전망이 없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 내 미래가 너무나 불안하다. 조금 비관적으로 가서 ‘연애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거절당하기 싫고, 연애에서의 실패가 줄 상처가 너무나 두렵다는 것이다. 나는 연애를 안 해봤다는 불안함이 시도 자체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애당초 포기하게 만든다. ‘모태솔로족’의 오나미 성녀님은 말씀하신다. “요즘 젊은이들은 주말에 드라이브를 다닌다고 합니다. 성녀님은 드라이브를 누구와 같이 가십니까?” “내비게이션~”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직 성질급한 ‘연애박사’님들은 이런 걸 참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알면서도 참아주질 못하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훈계’의 분기탱천이 울려퍼진다. 목수정은 애들을 ‘들이대지’ 못하게 만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서 강경하게 욕을 해댄다. “세상은 점점 우리를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문명사회의 공통된 삶의 조건이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간신히 한 커플이 독립할 수 있는 나이를 서른 안팎으로까지 밀어다 놓았다“(목수정, 2010: p.90).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야 말로 가장 큰 횡포가 아니겠는가, 만국의 솔로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세상에 남기고 싶은 유일한 말,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목수정: p.320) 목수정의 ‘신좌파적 상상력’은 “사랑하라”를 성해방의 구호로 외치게 만든다.

이와는 달리 김태훈과 김어준은 좀 더 ‘테크니컬’하고 개인화되어 있다. 강경함은 김어준이 더 강경하고, 성차별주의를 단단히 몸에 지고 말하는 스타일(“네 고추가 쪽팔리지 않니?”)인데 반해 김태훈은 조금 더 온화한 전략을 택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전략적 선택’을 강조한다. 다만 이들의 전략은 리스크를 최소하하는 게 아니라 다 지고 한 번 들이받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또 다시 한 번 다 지고 들이받아보라는 것이라는 게 ‘합리적 인간’들의 말하기 방법과 좀 다르다. 예컨대 에스콰이어가 제안하는 <남자생활백서>의 논리와 숱한 여성지들의 ‘똑똑한 이기주의자의 연애법’이 ‘합리적 인간’들의 ‘댄디한/시크한 사랑법’일 테니 말이다.</font> </div>

# ‘위로’와 ‘훈계’의 논리가 모든 걸 다 보여주나?

그런데 이러한 ‘위로’와 ‘훈계’의 논리 두 가지 다 온전한 진실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모태솔로에 대한 ‘위로’가 현실에서 연애의 ‘불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의 구체적 맥락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만, 이는 동시에 연애하는 사람들의 ‘다종다기함’에 대해서는 말할 구석이 없다. 물론 이는 모태솔로에 대한 ‘위로’가 목표한 대상에 ‘연애하는 것들’이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 덕택에 ‘모태솔로’들은 그냥 그리고 살게 되었다. 전형적인 ‘게토화’와 ‘고립’을 양산할 수 있다. 그들이 수적 다수가 되거나 말거나와는 상관없다. 그들이 ‘정상’의 범주로 들어가는 게 가장 급진적이긴 한데, ‘위로’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쯤은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위로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정상이니까요! 우리의 슬픔은 정당합니다. 우리가 다수이니까요!” 그런데 그 정도 탄력이 없는 것 같다.

두 번째로 ‘훈계’도 별 쓸모가 없다. 모태솔로들은 이미 ‘의욕’이 감퇴되어 있고, 의욕감퇴의 조건이 구조화되어 있는데, 거기다 대고 “힘내 짜샤”해봐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 결국 ‘훈계’를 전략으로 받아들이든 혹은 신좌파적인 ‘성해방’의 맥락으로 받아들이든 그 대상은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연애 결핍의 세상’에 대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절충적인 방법으로 ‘변증법적 합’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태솔로들’을 위한 ‘전략’을 잘 구상하면 될 것 아닌가? 물론 그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근데 여기서도 두 가지의 문제에 봉착한다. 먼저 “하지 않겠다는 인간을 왜 억지로?”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을 왜 병리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다른 한 편 이것이 극복되었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위로’와 ‘훈계’류의 이야기에는 연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좀 빠져있다. 이들이 말하는 연애는 ‘판타지’ 혹은 ‘현실’의 이분법에 갖혀있다. ‘로맨스’에 대한 판타지를 버리고 ‘현실의 연애’를 택하든지, 아니면 판타지를 포기하지 말고 그냥 연애를 포기하든지.

그런데 ‘현실’과 ‘판타지’는 언제나 동일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역사적 궤적이 있지 않았을까?? 엄마 아빠의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보라. 이게 우리 거랑 같은 거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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