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대한 꼬장꼬장한 해설. 그런데 부르디외 선생님, 번역 때문에 욕 보십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맞불』(2004)

맞불 – 8점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동문선
# 가끔씩 번역 때문에 열받을 때가 많다. 일단 ‘사기’를 쳐서 유려하게 만드는 건 둘째 치고, 읽을 수는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이다. 예전에 읽었던 『하위 문화』(

딕 햅디지)가 그런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문장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맞불』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일단 비문이 많이 많은 건 둘째치고, 조사와 명사가 틀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예컨대 이렇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감사하게 된다. 고용주들은 우리가 매일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 주워진(sic! 주어진) 권한을 마음대로 남용한다.(p.124).”</p>

그리고 ‘사회적 기득권'(p.96) 등 어떤 맥락인지 모르고 읽으면 딱 오해하기 좋은 표현들이 즐비하다. </span>일일이 이것들을 다 지적하기에는 손이 아프다. 번역자는 ‘독자의 질책과 정정’을 바란다고 했는데, 제발 그렇게 다시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르디외의 모든 책의 번역이 읽는 데 굉장히 어렵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건 단순히 저자의 ‘장광설’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연체의 독일 책들도 번역해서 다 읽는데 프랑스 책만 안 된다는 건 좀 말이 안 돼 보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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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작다. 기껏해야 120페이지 남짓이다. 『맞불』 은 부르디외의 미간행 원고들과 몇 군데에 발표했던 논문들, 연설문 등을 모아서 출간한 책이다. 2권은 어떤 글들이 모여있는지는 모르나 1권은 그렇다. 만약 번역이 매끄러웠다면 읽는데 2시간이면 족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판형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언급한 이유들로 읽는 데에는 4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어쨌거나.

부르디외가 </font>『맞불』에서 싸우려는 대상은 바로 신자유주의다. 이미 수 십 권, 아니 백 권이 넘게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 이 마당에 부르디외의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지적들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부르디외의 ‘먹물투’ 말하기와 ‘먹물투’ 인식론이 가지고 있는 ‘계몽주의’적 언설이 싫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르디외의 『맞불』의 장점을 꼽아보자면.

여러가지 신자유주의와 맞물리는 기술적 혁신과 세계화의 ‘새로운’ 양상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과, 그것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연관되어있는지에 대해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매끈하게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설명이 아니라 명백히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부르디외가 취하는 전략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저항들을 소거시키지 않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마치 맑스가 『자본론』에서 ‘본원적 과정’ 뒤에 있는 핏자리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젊은 이론가들이 종종 생략하기 쉬운 그 ‘과정’의 폭력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부르디외식 설명의 장점일 것이다. 즉 ‘불안정 취업’의 폭력성이 대두된다. 거기에 촘스키 처럼 ‘프로파간다’의 학습 효과를 드러내는 것도 부르디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안정 취업은 새로운 유형의 지배 양식이다. 이는 항시적이고 전체적인 불안전 상태의 제도 위에 기초한다. 이 제도는 노동자들을 복종하도록 강제하고 착취를 수락하게끔 하는 목표를 가진다. 이는 그 효과에도 불구하고 근원부터 야만적 자본주의와 매우 가깝게 닮아 유례가 없었으며, 이런 지배 양식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이는 탄력적 착취라는 매우 적절하고 표현력 있는 개념을 제시하였다(p.126: 강조는 인용자).


이미 폴라니를 다시 읽는 흐름에 의해 신자유주의 통치가 실제로는 급격한 사회와 경제의 분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다시금 그 목소리를 ‘과학자’로서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의 목소리로 꼬장꼬장하게 듣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하다.</p>

미국에서 진행중이고 유럽에서 시작된 것은 퇴화의 과정이다. 프랑스와 영국처럼 국가가 가장 일찍 건립된 사회에서 국가의 탄생을 연구할 때, 우리는 먼저 물리적 힘과 경제력의 집중을 관찰한다. 두 가지가 함께 동시 진행을 하는데, 즉 전쟁을 하고 치안 유지의 경찰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문화 자본의 집중 다음에 권위의 집중 현상을 보게 된다. 시대가 진행함에 따라 국가는 자율성을 획득하고, 사회와 경제의 지배적 힘으로부터 부분적으로 독립되어 간다. 국가 관료제는 지배층의 의사를 해석하고 왜곡하며, 때로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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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논의가 나오고 있는 지금 부르디외에게 주목할 것은 무엇일까? 그 중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먼저 ‘행복의 경제학’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사상의 숙명론과 단절하려는 의지, 정치화하면서 ‘탈숙명화’하고, 신자유주의로 중립화된 경제”(p.114)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행복의 경제학’이고 이는 새로운 방식의 국제 연대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유럽 단위에서의 최저임금의 결정(노조를 포함하여), 부패와 탈세 재정을 저지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활동간에 사회적 덤핑을 금지하는 것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는 부존 자원과 환경을 보호하고, 교통과 에너지의 유럽간 망(특히 생태학적 도시 교통수단)을 개발하고, 공공 주택을 증설하고, 도시 재개발을 하는 전략을 주로 사용해야 한다(p.114).

두 번째는 국가의 재강조이다. 이미 알만한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가는 그 에토스가 변화하고 자본의 축적 논리를 보조하는 역할로 변화할 뿐, 신자유주의 주창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축소’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부르디외 역시 이러한 면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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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국가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면, 국가가 이행하는 ‘보편적’ 기능들을 옹호해야 한다. 이 기능들은 역시 초민족 국가에 의해 더 잘 이행될 수 있다(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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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적 기득권은 노동 · 공교육 · 대중교통 등 모든 공공의 것과 국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국가라는 제도의 필요성은 우리가 믿기 원하는 바와는 달리 반드시 고리타분하지도, 퇴행적이지도 않다(p.96).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특히 사회 권리의 보호 차원에서 그 스스로 방치된 경제의 냉혹한 메커니즘에 대해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이다(p.107).


여기서 국가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의해서 강화되는 국가가 아니고, 오히려 초국적 맥락으로 ‘공공성’이 침윤되고 있을 때 그 자체의 ‘공공성’을 보편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회-국가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국가를 ‘우회’할 수 없다는 결론을 하는 것을 보면 부르디외는 엄격한 현실주의자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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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이론들로 국가 따위는 별 게 아니라는 설명, 그리고 새로운 주체들의 부상으로 인하여 마치 당장 ‘혁명’이 일어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 따위는 한 방에 날릴 수 있다는 설명들이 ‘유령’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단적으로 관료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이라는 면을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러한 이론들은 전혀 대답을 주지 못한다. 국가를 어떻게 전복하고, 어떻게 다시금 새로운 정체를, 그리고 지금의 행정체계보다 더 ‘민주적’인 체제를 새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은 부재하다. 달리 말하자면 ‘발’을 딛고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 대해 무기력한 이론가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국가는 지금 바로 곁에서 모든 나의 데이터를 어떠한 형태를 통해서건 취합하고 있고, 관료들의 메커니즘은 점차 첨단화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상황에 맞춰가면서 어떻게 싸울까를 구상해야 하며, 부르디외의 현실주의는 다른 고민들을 만들어내게 한다. 아마 부르디외의 논의를 좀 더 유익한 방향의 전장에서 펼치려면 다시금 베버 등이 언급하는 ‘합리성’이 어떻게 국가를 통해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피면서 신자유주의 국가 이후 ‘새로운 국제 연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의 ‘장’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다만 부르디외의 이러한 ‘꼼꼼함’과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집요한 추적 자체는 뭔가 쓰려는 사람에게는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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