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먹고살기 위해 보는 데이터 북? 그 가치는?

문화로 먹고살기 – 6점
우석훈 지음, 김태권 그림/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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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수 서평: 공지영·박경철 꿈꾸는 20대 찌질이들, 꿈 깨시지!  </p>

# 우석훈 주위의 무리들
언젠가 ghistory가 언급했듯이 나는 우석훈 ‘주변’에 있는 사람이 확실하다. 그의 조교였고, 그의 무리들이 뭉쳐있는 모임에 가담중이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를 읽고 감동·감화되어 우석훈의 이글루스 블로그 때부터 돌아다녔고, 대자보와 한겨레에 나왔던 그의 모든 글을 찾아서 읽었고, 한 때는 그가 썼던 모든 숨겨진 논문들을 다 읽었다. 심지어 김수행 선생 주도로 쓰였던 『청년을 위한 경제학 강의』에 나온 우석훈의 논문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와 지금 우석훈의 문투는 확실히 다르다. 사회과학적 글쓰기를 못 한다고 하기에 그 글은 너무나 ‘사회과학적’이다.)

그리고 제대하고 나서 우석훈 주위의 20대 집단과도 함께 있었다. 크게 보면 두 무리라고 볼 수 있는데, 한 무리는 문화로 먹고 살겠다는 무리였고(책, 영화, 음악, …), 다른 한 무리는 활동가가 되겠다는 무리였다(NGO 활동가, 정당, 생협, …).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그 무리로 진입했기 때문에 ‘과대평가’되어 조교의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러한 ‘과대평가’가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로 판단하고 싶진 않다. 내 나름 주어진 역할들을 했다고 생각한다. one of the people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젊은 친구들을 많이 모아놓은 우석훈의 군단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font></span>우석훈은 주위의 무리들과 늘 뭔가의 워크샵을 하거나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를 했다. </p>

또한 우석훈은 뭔가 ‘솔루션’을 주려고 했다. 두 집단에 대한 나름의 해법. 그 결실이 바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와 『문화로 먹고살기』라고 생각한다. 뭔가 주변의 ‘잉여 문화기획자’와 ‘잉여 활동가 준비생’을 위한 대답이 바로 이 책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언급한 우석훈의 이 두 책은 ‘일반적’ 해법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지점이 다수 존재한다. 일반인을 범주로 놓고 생각해보자면 변정수의 지적은 너무나 적실하다. 문제는 우석훈이 바라보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점 하나 뿐이다.

# 데이터북으로서의 『문화로 먹고살기』, 전략의 부재
『문화로 먹고살기』에 대한 가장 적실한 평가는 문화판에서 먹고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시장보고서’ 정도로 보인다. 경제학자로서 ‘숫자’, 즉 ‘돈’을 다루는 우석훈의 분석을 읽다보면 뭔가 ‘똑똑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디테일이 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숫자가 가지고 있는 명징성이다. 문제는 종종 틀리기도 한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아마 에디터와의 호흡, 우석훈 고유의 집필 스타일이 결부되어있을 것이다. (이건 영업비밀이라니까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석훈이 그 ‘숫자’로 모든 걸 말하려 하지는 않는다. 우석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프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는 ‘생태경제학자’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델은 생태학의 최신 프레임인 ‘복원가능성resilience’에 입각한 것이다. 종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돌연변이mutant’가 생존할 수 있는 상태의 생태계. 그 생태계는 문화일 수도 있고, 정치일 수도 있으며, 사회일 수도 있다. 총체적 프레임워크를 생태학이 제공하려 하고, 우석훈의 분석은 늘 그러한 프레임워크를 통해서 작동한다. 우석훈이 인디 밴드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20대 감독을, 혹은 아방가르드 작가와 사회과학 저자를 말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집단들이 모두 ‘돌연변이mutant’라는 점이다.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자’가 아니라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개체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석훈이 문화로 먹고사는 이들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읽는 독자가 자신이 장정일이나 공지영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지점들을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우석훈을 비판해왔던 지점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디테일의 맞고 틀리고를 공격하는 방식(ghistory같은 방식)은 어찌보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맥락이 없다는 점에서 ‘초합리적 바보hyper-rational idiot’의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우석훈에 대한 적실한 비판은 생태학적 이론이 작동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서 공박하는 방식이나, 좀 더 그람시주의적인 방식으로 ‘쟁투’가 불가피함을 드러내는 방식 정도가 될 것이다. 대체로 우석훈의 ‘제안’들은 생태학적 패러다임+사회적 경제의 개념들을 통한 ‘생협’, ‘지역’, ‘탈토건’, ‘탈원전’ 정도가 될 텐데, 문제는 그 대안들를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의 ‘옵션’으로 제시해 끌고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 하면 다 죽으니까, 이제 결단을 내리쇼!”

20대가 뭔가를 하기 위해서 우석훈의 ‘~하자’시리즈, 즉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와 『문화로 먹고살기』를 읽고 대안을 찾으려 할 경우, 이 지점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뭐가 나쁜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계몽이기에 이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대의 입장, 청년세대 ‘잉여’의 입장에서 뭔가 무기력함이 밀려오는 것은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스포츠계의 발전을 위해 ‘인권센터’가 필요하다는 당위론적 주장이 나오니 말이다.

이쯤해서 생각나는 건, 지배계급 혹은 지배계층이 체제 자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기를 느꼈을 때 과연 ‘대안’을 손쉽게 쥐냐는 것이다. 이건 case by case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현명한 보수’ 혹은 ‘현명한 우파’가 만약 없다면 이러한 정책적 ‘옵션’들은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무지 뛰고 있는 야구팀 자체가 일개 막내 선수인 내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달리 말하자면 『문화로 먹고살기』에는 열받아서 들이받고 있는 문화판의 ‘젊은 잉여’들이 싸울 수 있는 방법들이 별로 없다. 제도는 있지만, 전략이 없다. 매번 ‘착한 개체’보다 ‘똑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강변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도 여전히 그 ‘똑똑한 개체’가 세울 수 있는 전략은 한정적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파토스’만 남게 되는 수도 있다.

# 우석훈의 책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공부를 위해, 디테일에 대한 감을 살리기 위해 우석훈의 책들은 많은 도움이 된다. 생태학적 프레임워크도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함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대안’을 위해 싸우기에 적절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여기에서 그려내기에는 한계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물론 이건 어쩌면 읽는 이들을 골려서 ‘전략적’으로 살게하려는 우석훈의 간계인지도 모른다. 매번 그렇게 믿었기에 나는 나름의 전략을 팀으로 짜고 들이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최근 우석훈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많은 청년들이 사라졌다. 개별적으로 연락하는 청년들이 여전히 깨나 있을 것 같긴 한데. 지속적인 관계를 통하여 ‘공진화co-evolution’하는 모델이 생겨났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오류들이 산적해 있다. 너무나 많은 실패들을 다 감당했다고 말하기에는 보듬어야 할 것들이 더 많다. 상처받은 청춘들도 많다. 나는 이들을 다 보듬어 내지 못한다. 그럴 아량도 안 되고, 성품도 되지 않는다. 다만 이제 그들 중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무리가 있다면 함께 뭔가를 ‘전략적’으로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으로 이 역시 우석훈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의 조직론과 ‘책사적’ 기질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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